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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911 테러 이후, 미국 전역에 보도된 충격적인 영상 하나가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던 월드 트레이트 센터(WTC)가 마침내 무너져 내리자, 그것을 보고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장면이었다. 미국 언론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분노를 조장하는 듯 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효과는 대단했다.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초유의 사태 속에서 민주당 8년 시절을 보낸 미국 사람들은 급속도로 우경화하기 시작했고, 맹목적인 애국주의의 물결이 전 미국을 휩쓸었다. 당장에라도 911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아프간의 오사마 빈 라덴을 핵무기로 폭격하라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가 불티나게 팔렸다. 그 가운데 이성적인 목소리들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파키스탄 출신 작가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는 주인공 찬게즈가 그토록 미국의 일부가 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주류 사회에 편입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터진 911 테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작가의 명백한 페르소나인 찬게즈(칭기스칸의 애너그램이라고 했던가)는 파키스탄 라호르 출신의 뛰어난 인재로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대 프린스턴 출신으로 언더우드샘슨이라는 기업 감정(평가) 회사에 취업해서 소위 잘나가는 슈퍼엘리트다. 이렇게 미국식 교육의 혜택을 풍족하게 받은 찬게즈가 180도로 바뀌어서, WTC가 불타는 장면을 보고 자신이 느낀 첫 번째 반응이 ‘즐거움’이었노라고 밝히고 근본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신 하미드는 절묘한 서사 구성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우선 주인공 찬게즈는 자신의 무대였던 미국 뉴욕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파키스탄 라호르의 아나르칼리의 어느 거리에서 처음 만난 미국인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가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일하게 된 언더우드샘슨에서는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끊임없이 직원들에게 세뇌하는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첨병이다. 아울러 아무 것도 ‘우연’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바로 찬게즈와 아나르칼리에서 만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국인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고 모신 하미드의 서사를 따라가 보자.
작가의 서사 구조 한쪽에 아무런 배경 없는 파키스탄 출신의 남자 찬게즈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프린스턴 학벌이라는 무기를 들고, 세상이라는 거친 무대에서 싸우는 과정이 그려졌다면 다른 한 쪽에는 주인공 찬게즈의 러브스토리가 자리 잡고 있다. 찬게즈의 이름이 중세 세계의 정복자 이름의 애너그램이라면 그가 사랑하는 미국 여인 에리카라는 이름은 볼 것도 없이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진 아메리카의 재현이다. 찬게즈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연애의 싸움을 하고 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에리카의 죽은 첫 애인 크리스와의 경쟁이다. 아무리 불확실한 것도 수치화하고 계량화해낼 수 있는 철두철미한 교육을 받은 찬게즈는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이길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진흙탕 싸움에 빠져든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전쟁 이래 서양과 동양의 갈등/전쟁 구조는 21세기 파키스탄 작가의 치밀한 문학 작품을 통해 다시 형상화됐다. 동양남자 찬게즈의 물질적으로 발전한 서방세계에 대한 처절한 구애는 죽은 애인을 잊을 수 없다는 야릇한 핑계로 요리조리 피하는 에리카의 밀당의 다름 아니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닌 이 남자는 자신의 업무나 관계 파악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지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임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장해제당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바로 그 점을 작가는 '주저(reluctant)'라는 표현으로 집약해낸 게 아닐까. 어떤 노력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죽은 옛 애인과의 게임은 아무리 뛰어난 학벌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미국 주류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의 비애를 절묘하게 짚어낸다. 이창래 선생이나 줌파 라히리의 이민자 문학이 화해 혹은 타협을 지향한다면, 모신 하미드의 그것은 좀 더 공세적이다. 물론, 이 작품 하나로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말이다.
한 때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더 이상 관용적이지 않다. 그것은 마치 과거 로마제국이 관용(클레멘티아) 정책을 버리고 수구적으로 변해 가면서 세계 제국의 위상을 잃었던 것과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다. 찬게즈는 꾸준하게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에리카를 포기하지 않지만, 에리카의 세계에 그를 받아들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한 조건부 짝사랑이다. 미국 사회에 효용이 될 만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은 환영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문호개방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사랑의 유효기간 만료는 이민자들의 합법적인 체류를 보장하는 비자 기간 만료와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랑이 끝나면 그들은 미국을 떠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 용병 예니체리에 비유한 장면은 신의 한수처럼 다가온다. 술탄에게 예니체리들은 언제나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운명은 일치한다.
다시 작가 모신 하미드는 독자를 라호르의 번잡한 아나르칼리 거리로 데려간다. 찬게즈는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이 미국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파키스탄 전통 차와 음식, 문화를 권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자신의 조국 파키스탄은 뛰어난 문명을 이루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역전되었다고 자조하는 찬게즈의 모습에서 작가의 의도가 무언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고향 라호르를 잊을 수 없었던 남자 찬게즈는 미국에서의 생활과 업무 때문에 파견된 칠레에서의 자각을 통해 반미투사 혹은 근본주의자라 불리게 되었다.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런 급격한 변신의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 느낌은 있어도 작가의 문학적 미니멀리즘을 통한 직접적 현실성 담보가 인상적이다. 그만큼 현실과 문학적 창조의 상상력을 오가는 모신 하미드의 작법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열린 결말을 배려한 점도 역시 일품이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201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영화도 봐서 책과 비교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