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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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미 중의 하나는 책수집이다. 전작을 하는 작가라면 물론이고, 앞으로 읽게 될 작가의 책도 하나둘 사 모으는 그런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다. 지난 가을엔가 나의 취미 대상으로 물색된 작가가 있으니 바로 이창래 선생의 책들이었다. 이 리뷰 바로 앞에 쓴 <영원한 이방인>에서도 말했지만 국내에 출간된 이창래 선생의 책은 오늘 이야기할 <생존자>외에는 거의 구할 수가 없는 그런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헌책방이 있지 않은가. 헌책방을 통해 절판된 <영원한 이방인>과 <가족>을 차례로 구했다. 비교적 근간에 해당하는 <생존자>도 물론 구했다, 다만 아직 읽지 않았을 뿐. 신작도 아마존을 통해 구입했다. 하지만 책을 사두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읽지 않고 있다가 어느 순간 독서열이 폭발해 버렸다. <영원한 이방인>을 읽고 나서, 상당한 두께 때문에 망설이던 <생존자>를 단박에 읽어냈다. 그것도 지독한 독감으로 고생하던 와중에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책쟁이다.

 

소설 <생존자>는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시작한다. 전쟁이 언제나 그렇듯 민간인의 희생이 가장 크지 않았던가. 주인공 준 싱어는 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와 오빠를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된다. 가히 충격적인 상실로 시작되는 그녀의 연대기는 고난의 행진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36년의 시간이 흘러 공간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진다. 미국에 정착해서 골동품상으로 성공한 준은 암세포가 자신의 육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업을 정리하고 8년 전 자신의 곁을 떠나 세계를 유랑하는 아들 니콜라스를 찾아 나선다. 살아남기 위해 전쟁 중엔 무슨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창래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준에 이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정착하지 못하는 또 다른 영혼 헥터 브레넌을 창조한다. 헥터와 준 그리고 그들이 한국의 어느 고아원에서 만난 실비 태너는 소설 <생존자>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캐릭터 삼총사다. 준이 전쟁에서 가족을 잃었다면, 아버지를 잃고 전쟁판에 뛰어든 소년 헥터는 삶과 죽음이 실낱같은 차이로 나뉘는 전쟁터에서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전쟁이 끝난지 33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렇기 때문에 50대 중년이 되어서도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삶을 계속한다. 그나마 그의 정착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던 도라 역시 불운의 아이콘 준의 등장으로 잃게 된다.

 

두 명만으론 부족했을까? 여기에 한국전쟁보다 좀 이른 만주사변 시기에 일본군의 만행으로 선교사업을 하던 부모님을 처참하게 상실한 실비 태너의 악몽이 겹쳐진다. 광란이 지나간 뒤, 미국으로 건너가 착실한 아가씨로 성장하지만 그런 광기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보통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참화로 고아가 된 한국의 아이들을 도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르핀 중독자가 된 목사 사모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비극의 재연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생존자>를 통해 강력한 작가의 반전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도대체 이보다 더 센 표현과 주제의식으로 전쟁을 반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전쟁 때문에 상실을 겪은 준과 헥터 그리고 실비의 과거가 소설의 들줄이라면, 현재 진행되는 준의 유일한 혈육 니콜라스를 찾는 과정은 소설의 한축을 차지하는 씨줄일 것이다. 이창래 선생은 <영원한 이방인>에서도 보여 주었던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해서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등장인물들이 이런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것일까에 대한 과정의 서사를 보여준다. 준이 고용한 탐정 클라인스가 하차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헥터가 죽어가는 준을 데리고 아들 니콜라스를 찾아나선 장면은 미국 로드무비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한다.

 

어쩌면 소설 <생존자>가 한국전쟁을 무대로 했다는 점에서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는 한국전쟁은 단지 비극을 전개하기 위한 무대일 뿐이다. 장소가 굳이 한국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일본이나 베트남 혹은 아프간이라도 상관없다. 작가는 그런 공간적 배경보다는 전쟁이 초래하는 보편적 비극에 방점을 찍고 있다. 보편 인류의 마음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이 어떻게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고찰과 분석이 이창래 선생이 <생존자>에서 이룬 문학적 성과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예상한 한국전쟁의 디테일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보다 더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한국전쟁보다 소설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앙리 뒤낭이 쓴 <솔페리노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1859년 6월 24일 유럽의 숙적 프랑스 연합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30만 명이 맞붙은 치열하고 비참했던 전쟁 후기는 헥터와 실비 그리고 준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의 사건은 지남철처럼 종양으로 죽어가는 준과 그녀를 돕는 헥터를 결국 솔페리노까지 끌어들인다.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지어낸 뒤에, 죽어가는 엄마의 아들 찾아 삼만리라는 멜로까지 곁들인 다음 마주치게 되는 크고 작은 비밀들이 이어지고, 삶이 곧 구원이라는 도정(道程)을 읽으면서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이보다 그려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데뷔작 <영원한 이방인>에서 이창래 선생이 이민자 소설이라는 특수한 양식을 충실하게 수행해 냈다면, <생존자>에서는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방식으로 보편 인류애에 접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창래 선생의 이런 소설적 전략이야말로 미국 주류 문단에서 호평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독자 지평의 확장이라는 점에서도 보편적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이런 자세야말로 누구에게나 호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먼저 660쪽에 달하는 책의 두터운 두께에 나처럼 절대 겁먹지 마라. 일단 이창래 선생이 구사하는 서사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책의 두께는 한낱 형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제 슬슬 <가족>과 원서로 구입한 <온 서치 어 풀 시>를 읽어 볼 때가 된 것 같다. 선생의 팬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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