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4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백종유 옮김 / 들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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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은 사족을 못 쓴다. 가장 최근에 국내 작가 중에 김언수 씨가 쓴 <설계자들>은 물론이고,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킬러가 나오는 소설은 그야말로 불가사리처럼 읽어댄다. 그런데 이번엔 아이슬란드에서 날아온 킬러 소설이라? 그것도 내가 애정해마지 않는 들녘의 일루저니스트 시리즈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우연히 소설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바로 구매했고, 오늘 새벽에 다 읽었다.

 

이름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하들그리뮈르 헬가손(헬가의 아들이란 뜻이겠지?) 작가의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소설로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이 소설은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출신의 킬러 “톡시” 토미슬라브의 좌충우돌 기상천외한 모험에 대한 이야기다. 잘 나가는 뉴욕의 킬러 조직원인 톡시는 잘못해서 FBI 요원을 죽이고 쫓기던 중, JFK 공항에서 막 북극의 나라 아이슬란드로 떠나려는 데이비드 프렌들리 신부님마저 ‘청소’하고 그의 신분을 빌려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미국을 탈출한다.

 

가톨릭 신자지만 평생 교회 출입을 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던 킬러 톡시는 속세에 찌든 악의 무리를 구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아이슬란드 가정에 은신한다. 군대도 없고, 밤에도 해가 지지 않으며, 놀랄 만큼 비싼 물가로 유명하다는 아이슬란드에서 반평생 함께 한 총기 없이 지낸다는 건 그에게 차라리 고문이다.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달고 살던 톡시/토미가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헬가손은 유머스러우면서도 진중하게 그려낸다.

 

톡시는 뉴욕의 애인이 끔찍하게 살해됐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으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고, 말 그대로 죽도록 고생만 한다. 그것도 모자라 게다가 가라데 신부에게 실컷 얻어터진다. 이런 블랙 유머 코드 속에 헬가손은 전쟁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사랑하는 형을 잃고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존의 기본 원리를 깨닫게 된 ‘발칸의 짐승’ 톡시의 원형을 속살 그대로 드러낸다. 작가는 암살(청소)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삶을 영위하던 톡시가 군대와 총기가 전무한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나가는 과정에 묵언의 방점을 ‘쿵’ 찍는다.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종교적 구원이라는 약간의 조미료도 빼놓지 않으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에서 톡시가 귀트민뒤흐르의 집에서 맨발로 탈출해서 아이슬란드의 어느 집에 침입해서 그동안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크로아티아 민병대원에서 뉴욕의 잔혹한 킬러로, 다시 구원과 속죄의 상징인 신부에서 폴란드 출신 페인트공으로 시시때때로 바뀌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지난 세기말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구시대적 슬로건으로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세르보-크로아티아 내전에서 비롯되었다는 톡시의 고백이 이어진다.

 

전 미국을 돌며 무엇에 쫓기듯 살인청부를 하던 톡시는 모든 아가씨들이 버터빛 금발 머리를 하고, 대개 두서너 가지의 일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6주의 짧은 여름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이제 톡시가 끊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되는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새로운 삶의 연착륙을 시도한다. 작가가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제시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역시 하나의 클리셰이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쓸만했던 것 같다. 한편, 자신의 조국 아이슬란드의 좋은 점들을 대놓고 자랑하는 헬가손이 재밌게 느껴졌다. 어쨌든 한 때는 데이트 상대를 벌벌 떨게 만드는 흉악한 킬러였지만, 과거와 이별하고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전직 킬러의 고군분투가 너무 재밌었다.

 

어느 작가의 책을 딸랑 한 권 읽고 나서 팬이 되었다고 말하기엔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의 다른 작품을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헬가손 때문에 낯설지만 친근하게 들리는 아이슬란드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면 오바일까? 아무래도 전작 <레이캬비크 101>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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