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펭귄클래식 13
허균 지음, 정하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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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그랬던가. 무릇 고전이라 하면, 처음 읽는다고 말할 게 아니라 지금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물론 그런 말이 모든 책에 적용되면 좋겠지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나 도스토옙스키의 저작에는 해당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허균의 <홍길동전>은 이미 내용도 빠삭하게 알고 있고, 또 그 분량에서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지라 읽기 전부터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은행이나 관공서에 서식 샘플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홍길동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조선시대 허균이 쓴 <홍길동전>의 내용도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 대에 홍승상 댁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온갖 역경을 딛고, 입신양명을 꿈을 이룬다는 것이 <홍길동전>의 기본 줄거리다.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태어난 홍길동은 비록 양반 집안이긴 하지만, 적서차별에 따라 관계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유머 코너에서도 하도 많이 소재로 삼아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한(恨)도 어린 홍길동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당시 심리치료가 없어서 그랬지 지금이었다면, 바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홍승상의 애첩인 초낭이 이제 막 십 대에 접어든 길동을 없애기 위해 자객까지 동원한다. 길동은 어디서 배웠는진 모르겠지만, 오묘한 도술로 위기를 벗어나면서, 초낭과 함께 이 일을 도모한 자객과 관상녀에게 복수를 한다. 그 어린 나이에 복수설한을 하고 강호에 나서게 되는 길동!

자신의 출중한 재능을 국가를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이가 갈 길은 빤하다. 도적의 무리에 합류해서 우두머리가 된 길동은 분신술을 사용해서 전국에서 백성을 갈취하는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의적 활빈당을 조직한다. 역설적이게도 조선시대 최고의 명군이라 칭송받던 세종 시대에도 그렇게 간악한 무리가 많았던가. 홍길동의 눈부신 활약에 발칵 뒤집힌 조정은 그 당시로써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었던 연좌제를 동원해서 길동의 체포를 도모한다. 이미 조정 신료의 작전을 눈치챈 길동은 임금과 대신을 한껏 농락한다. 도저히 실력으로 길동을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길동이 원하는 병조판서직은 제수하고 그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꾼다.

자신의 실력을 과시한 길동은 임금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두둑하게 얻어내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먼 곳으로 나가 성도섬을 거쳐 율도국에 자리를 잡아 잘 먹고 잘 살다가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던 17세기 초반에 쓰인 <홍길동전>은 전란으로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하고,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근간이 흔들리던 시기를 대변하는 사회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당장 먹고살 것이 없던 시기에, 건국 초기 세종 시대는 그야말로 당시를 살던 이들에게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여러 사회 부조리 가운데서, 자유로운 신분상승을 가로막고 있던 적서차별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수가 틀리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라고 선동하는 허균의 <홍길동전>이 기득권층에겐 아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전통적 유교질서와 윤리야말로 양반들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야 할 가치였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던 판에, 재능과 실력을 갖춘 하층 세력의 대두가 기득권층으로서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게다가 허균은 <홍길동전>을 한문이 아닌 상민이나 아녀자들도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저술함으로써 독자의 저변 확대에도 이바지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국문 고전소설 작가의 영예는 허균에게 돌아가야할 것 같다. 책의 실린 방각본 경판을 읽어 보려고 하니, 구두점과 띄어쓰기 구분이 되지 않아 현대 독자에게는 역시나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회적 요소에 그리스 고전에서 흔히 등장하는 영웅 살해 모티브까지 들어 있어서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가문에 화가 미치기 전에, 원인을 제거하자는 데 홍승상과 정부인 그리고 길현까지 가세하는 장면에서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하는 가문이라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비정함이 엿보였다. 전기소설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의 재능은 홍길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특출난 재능이 필요하다. 비록 도적 무리이긴 하지만, 입신양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홍길동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도적에게 보이고 단박에 우두머리 자리를 꿰찬다. 분신술을 쓰며 전국 팔도를 누비며, 임금과 조정 신료까지 농락하는 이 영웅에게 누가 도전한단 말인가.

옥에 티라고 한다면, 허균은 역사 공부를 소홀히 했던 걸까? 세종 시대 이야기를 쓰면서 선조 시대에 만들어진 훈련도감을 언급하는 걸 보면 요즘 같으면 어림없었을 일도 세월이 수상하던 시기에는 그냥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도 한 모양이다. 그리고 경판 24장본과 완판 36본에도 할 말이 있다. 완본의 1/3가량이 줄어들 정도라면 그 디테일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날 게 분명한데 과연 누가 그런 편집을 단행했을까? 요즘 같았으면 저자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어 보기도 했다.

읽을 때마다 또 새로운 <홍길동전>은 변화무쌍하다. 역시 고전의 맛은 접할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새로움이 아닐까? 옛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온고지신의 즐거움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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