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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그가 다시 돌아왔다. 어쩌면 우리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데뷔작일지도 모를 <고래>로 2004년에 혜성같이 등장해서 문단을 강타했던 작가 천명관이 6년 만에 신작 <고령화 가족>으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전작 <고래>에서 주술적 리얼리즘으로 독자를 한 큐에 사로잡았던 천명관은 이번에는 2010년 욕망의 공화국에 널린 막장 드라마가 아닌 고품격 막장 가족소설로 강호에 출사표를 던진다.
우선 등장인물에서부터 하나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 없다. 48세로 관객과 제작자를 처절하게 배신한 파산한 영화감독 오인모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기내식 같은 스튜어디스 아내와 이혼을 하고, 10년째 룸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닭죽을 먹으러 집에 오라는 칠순이 넘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 콩가루 패밀리로 화려한 복귀식을 감행한다.
다음 타자는 오감독보다 네 살 연상의 형 ‘오함마’ 오한모다. 그는 전과 5범으로 어려서부터 연필보다 빨간 벽돌을 먼저 집어 들고 특유의 호전성과 잔인성으로 가막소를 제 안방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120KG을 넘나 드는 육중한 체구로, 역시 백수 생활을 하며 콩가루 패밀리의 식량을 축내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오함마 브러더스의 조카딸로 등장하는 장민경은 되바라진 십 대의 전형으로, 품행과 언행이 불량스럽기 그지없다. 구름과자는 물론이고 버릇은 아예 싸가지에 밥 말아 먹고 나중에는 가출까지 하는 집안의 우환거리다.
민경의 엄마인 미연은 소위 물장사를 하는 45살 재혼녀로 두 번째 결혼도 실패하고, 민경을 데리고 결국 칠순이 넘은 어머니 집으로 컴백한다. 이렇게 누가 봐도 빤한 콩가루 패밀리의 중심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있다. 지난 이십 년간 세상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다가 족족 패배하고 원점으로 귀환한 자식들을 아무 말 없이 보듬어 안으면서, 다시 세상으로 치고 나갈 전투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내레이터 인모의 말대로 살짝 정신 줄을 놓으셨는지 끼니마다 식탁에 허발난 고기와의 전쟁을 준비해 주신다.
이렇게 고품격 막장소설의 주인공 소개만으로 숨이 다 가쁘다. 하긴 앞으로 펼쳐질 막장 스토리라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자, 이제 소설의 중심이 되는 콩가루 패밀리의 공간적 배경을 살펴보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맞바꾼 신도시 외곽의 24평짜리 연립주택이 이들 5인조의 서식처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 무위도식하는 두 아들은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악다구니를 하며 하루해를 보낸다.
인모는 어느 날 우연히 입수하게 된 헤밍웨이 전집을 읽으며, 날개 없이 추락한 자신의 처량한 꼬라지를 한탄한다. 연립주택 앞에 놓인 낡은 소파에서 동네의 온갖 뒷담화를 담당하시는 노인네들에게 콩가루 패밀리만큼 좋은 소재가 또 있을쏘냐. 오함마를 짐승이라고 기탄없이 말하는 그네들의 말에 그만 웃음이 폭발해 버렸다. 도대체 다음에는 또 어떤 유머가 지뢰처럼 숨어 있을지, 막연한 기대감으로 책장 넘기는 손가락이 분주해진다.
수입이 없는 신용불량자 삼촌은 조카딸을 삥 뜯어 동네 미장원 미용사인 한수자 씨와 안면도에 놀러 가기도 한다. 정말 어떻게 삼촌이 조카딸에게 용돈을 주지 못하고 삥을 뜯을 수가 있는지……. 도대체 이 집안의 막장의 끝은 어딘지 갈수록 호기심은 증폭된다. 인모는 집안에서 가장 가방 끈이 긴 사내답게, 수자 씨에게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운운하면서 달뜬 유혹을 해보지만, 사랑을 먼저 내세우는 수자 씨에게 일패도지한다. 인모의 완패다!
자, 이제 막장 드라마의 공식대로 빼놓을 수 없는 출생의 비밀을 등장할 순간이 아니던가. 온갖 욕망의 도가니탕이 그야말로 지옥 불처럼 들끓는 가운데, 오함마가 자신의 배다른 형이라는 사실과 여동생 미연 역시 씨 다른 형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야, 이 정도 스토리라인이라면 각 방송사 본부에서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달려들 만한 걸 그래? 도대체 이 콩가루 패밀리에게는 보통 사람처럼 행복을 추구하는 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정말 황당의 극치를 보여 주는 오함마의 자위사건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던 콩가루 패밀리를 한 방에 날려버린다. 주먹과 욕설이 오가는 난장판이 벌어지는 가운데, 문고리에 목을 매고 이 풍진세상을 뜨려던 오함마의 자살시도는 그의 육중한 몸매 덕분에 여지없이 실패로 귀결된다. 이 순간, 폭소가 작렬했다.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즐겨 책을 읽는 공간인 전철 간이었다면 바로 정신 줄 놓은 놈이 될 뻔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런 자학적인 유머의 페이소스를 뽑아낼 수 있다니! 천명관 작가의 탁월한 연출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동네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가운데 가출을 감행한 민경을, 헤밍웨이를 읽고 어느 순간 심오한 돈오의 세계를 체험한 오함마가 나서서 데려온다. 거의 폭발 직전에 다다른 가족 간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도 잠시뿐, 민경을 구하기 위해 ‘약장수’와 모종의 거래를 한 오함마는 크게 한탕을 하고, 미용실 수자 씨와 함께 거금을 챙겨 해외로 도주한다. 물론, 나머지 처리는 모두 인모에게 맡겨둔 채. 그 결과, 인모는 약장수 패거리에 잡혀가 거의 레테의 강을 건널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 순간 갑자기 오랜 인모의 파트너이자 얼치기 자유주의자인 캐서린 윤주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모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 닭죽을 끓여 주던 어머니가 인생의 막장에 선 인모의 구원자였던 것처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이혼을 하고 돌아온 캐서린 역시 그를 죽음과 절망 그리고 무기력증에서 건져 올린다.
사실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천명관 작가가 이 정도의 내공을 시전해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욕망과 경쟁이 비등점을 향해 달려가는, 현 세태에 전혀 보통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 이들이 평범한 행복을 추구한다. 과연 그들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행복의 추구를 작가는 소설을 통해 재현해 보이고 있다. 누구나 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에 도달하는 길은 참으로 요원해 보인다.
낯 간지러운 뻔한 스타일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가족이 뭐이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결격 사유를 가진 가족 구성원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장면에 더 고개가 끄덕여졌다. 체면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보통 사람의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바로 이 시점에서 천명관 작가는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징 중의 하나인 개념의 정당화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가족이라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에 비틀기와 해학이라는 방법으로 하이킥을 날린다.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모든 가족은 고만고만한 제각각의 행복과 불행의 질량을 가지기 마련 아니던가. 단란하고 화목해 보이는 가정의 이미지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또다른 특징 중의 하나인 복제에 대해서, 작가는 얼치기 영화감독 오인모에 투영해 넣은 80년대 영화광의 오마주를 비춰준다. 노골적으로 B급 영화를 만들어내는 퀜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그런데 정말 ‘저수지’에서 개처럼 싸운다!), 트뤼포의 <쥘과 짐> 그리고 한탕 거하게 하고 튀는 <스팅>에 이르기까지 영상의 문학적 복제라는 이종교배까지도 시도한다. 이 영롱한 광휘를 발하는 캐릭터들의 향연만으로도 즐거운 마당에, 이런 서비스까지 베풀어 주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과연 <고래> 이후 수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다만, 천명관 작가의 차기작을 읽기 위해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