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창하게 세운 2010년 고전읽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러시아 문학계의 거장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하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그야말로 귀에 목이 박히게 들어왔지만, 정작 제대로 그들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물론이고,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도 단편선 정도를 읽었던 게 전부인 것 같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버전 중에서 지난해 말 문학동네에서 야심차게 발간한 세계문학전집의 그 첫 번째를 장식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모두 3권 8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번역도 러시아 문학이라면 국내에서 자타의 인정을 받는 박형규 교수가 맡아 주셨는데, 러시아국가연방훈장에 빛나는 그의 경력에 믿음이 가는 정전(正傳)을 기대해 보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동료 러시아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역사상 “완전무결”한 작품이라고 칭찬을 했다는 책의 뒷날개 카피에 그만 구미가 동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작가로서 자존심도 접고 극찬을 했는지 말이다. 거장의 묵직한 3부작에 드디어 그 첫발을 내딛는다.

그 유명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문구로 <안나 카레니나>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의 기저를 파고든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사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오블론스키(스티바)의 불장난으로 다복해 보이던 오블론스키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어난다. 쉬체르바쓰키 공작의 큰 딸인 돌리는 남편의 외도에 그간 참아왔던 분노를 폭발시킨다. 무려 아이가 5명이나 있지만, 스티바의 관심은 아내 돌리와 아이들이 아니라 독신자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편, 스티바의 친구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은 대도시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대신 시골인 포크로프스코예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다. 한 때, 지방의회에도 참여했으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자유주의적인 사고에 따라서 보다 개인주의적인 처지에서 농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레빈은 돌리의 막냇동생인 키티를 짝사랑한다. 스티바와 레빈은 친구지만, 자신의 가정교사를 사랑한 불륜남과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처녀를 사랑하는 짝사랑남만큼이나 큰 괴리감을 토로한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18세의 키티는 레빈에 대해서도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녀가 정말 사랑하는 남자는 바로 궁정 무관 출신의 브론스키 공작이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브론스키에 비하면, 레빈의 처지는 그저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정숙한 외모와 우아하고 자유로운 동작의 키티에 대해 자신만의 공상 속에서 시적 아름다움의 단계로까지 승화시켜,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짜내 힘겹게 청혼했던 레빈은 자신의 연적 브론스키의 등장으로 키티에게 완곡한 거절을 당하고, 참담하게 물러난다.

러시아 호남자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브론스키는 사실 키티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결혼의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화려한 사교계의 연애만을 즐기고 싶은 브론스키는 자신의 어머니를 마중하러 기차역으로 나갔다가 주인공 안나 아르카디예브나 카레니나(안나)와 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 운명적 첫 만남을 갖는다. 훗날 걷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타오르게 되는 사랑의 단초가 되는 이 만남은 소설의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한다.

오블론스키 집안의 “사랑과 전쟁”을 진화하기 위해 투입된 구원투수 안나는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낸다. 역시 8살 난 아들을 데리고 있는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안나는 자신의 올케를 잘 설득해서 백척간두에 서 있던 가정의 위기를 어설프게나마 봉합한다. 오랜만에 모스크바 사교계에 나온 안나는 곧이어 초대받은 무도회에서 키티가 사랑하는 브론스키 공작을 독차지함으로써 이번에는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나와 브론스키의 행복은 키티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무서운 속도로 치닫던 소설의 전개는 순간 숨을 고르면서, 레빈의 형인 니콜라이의 얘기를 슬쩍 끼워 넣는다. 한 때 신앙심 깊은 수사의 삶을 살던 니콜라이는 타락과 방탕의 길에 들어서면서 수상쩍은 행동을 일삼는다. 자본주의를 타격하라는 주장을 하면서, 경제 조건을 개혁하라는 공산주의자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한다. 니콜라이를 방문하고서, 실연의 상처를 안은 채 포크로프스코예로 돌아온 레빈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성하며 이상적인 부인상을 꿈꾸며 고향집의 부흥을 꿈꾼다.

한편, 모스크바에서 브론스키와의 운명적 만남 끝에 안나는 결국 자신의 남편인 알렉세이 안드로비치가 기다리는 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듯 달려온다. 하지만, 그 기차 안에서 다시 브론스키를 만난다. 브론스키의 안나에 대한 고백은 그녀의 가슴에 일대 파문을 던진다. 이어 안나는 알렉세이와의 결혼생활이 사랑 없이 불만,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마음속으로 선언한다. 페테르부르크에 몰아치는 눈보라는 안나의 험난한 앞날에 대한 복선으로 다가온다.

2부에서는 브론스키의 안나에 대한 감정을 읽어 버린 키티가 시름시름 병을 앓게 되며, 다시 기만적인 결혼생활로 돌아온 돌리의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결국, 브론스키와 안나의 관계는 험담에 열을 올리는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화젯거리가 되고, 아내의 부정을 인정할 수 없는 노련한 정치가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불안은 가중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는 분노하기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결정적 불륜 탓에 알렉세이의 사랑 없는 결혼의 종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레빈은 실연의 아픔을 딛고 농사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빈의 스티바는 자신의 숲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레빈을 찾아온다. 페테르부르크의 관리직에서 나오는 봉급만으로는 가족의 생활비와 자신의 유흥비를 마련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지방 상인의 농간에 원래 가격보다 무려 3만 루블이나 싸게 숲을 팔게 되는 스티바.

안나와 브론스키가 불륜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하는 가운데,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를 연상시키는 경마대회로 안나와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갈등으로 치닫고 결국 자신과 브론스키의 관계를 남편에게 밝히는 안나. 이제 결정의 공은 남편에게 넘어갔고, 과연 안나의 운명을 어찌 될 것인가.

항상 하는 고민이지만,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긴 주인공들의 이름과 그들의 애칭은 정말 혼란 그 자체다. 1권을 다 읽으면서도 여전히 주인공들의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우리나라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보통 삼음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 같은 보통의 독자라면 오프라 윈프리의 북클럽이 제시한 것처럼 주인공 목록 표라도 만들어서 시시때때로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걸까 싶을 정도다.

책을 읽으면서 귀족 출신의 톨스토이가 묘사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와 풍속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에 그만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물론, 귀족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기반으로 해서 수많은 야회와 사교계의 무도회를 섭렵한 탓도 있겠지만, 대가의 섬세한 기술방식은 가히 “완전무결”이라는 찬사를 들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남성이면서도, 안나와 키티 그리고 돌리 같은 주요 여성 주인공들의 변화무쌍하면서도 복잡다단한 심층의 얼개를 기가 막히게 짚어내는 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랑에 눈을 뜨게 된 레빈과 키티의 사랑과 실연에 아픔을 다룬 부분에서는 또 어떠한가. 도저히 인간 삶을 모두 체험하고 달관한 대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점 기존의 러시아 전통에서 벗어나 자유연애에 바탕을 둔 결혼풍속에 대한 톨스토이의 분석 또한 예리했다.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결혼생활에 타격을 가하는 ‘신여성’ 안나에게 가정이라는 종래의 구속적 제도보다는 자신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사랑이 없다면 행복도 불행도 없다는 선언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그렇다고 2세기 전 노땅 작가라고 해서 톨스토이가 유머가 떨어지는가? 쉬체르바쓰키 공작 내외의 부부싸움을 읽어 보라, 어지간한 유머작가는 댈 것도 아니다(116쪽 참조). 브론스키 경마 장면의 디테일한 묘사 역시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이렇게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주는 톨스토이가 금세기에 영화감독이었다면 아카데미 감독상은 내내 그의 몫이었으리라.

왜 톨스토이는 혁명이나 전쟁 같이 웅대한 주제보다, 사랑과 불륜이라는 조금은 통속적인 주제를 <안나 카레니나>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그것은 아마도 인본주의자로서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탐구의 여정이 이 대작의 바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던 키티에게 톨스토이는 마드무아젤 바레니카의 모습을 통해 “자기를 잊고 남을 사랑하는 것”(438쪽)이라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그 답을 주고 있다.

2권에서는 콘스탄틴 레빈을 통해 18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기저를 파헤치는 톨스토이의 사회정치적 오디세이가 펼쳐질 예정이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의 행로를 쫓는 나의 여정도 뒤따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