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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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을 만났을 때. 온전한 깨달음으로 법열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연초에 만났던 유시민 선생의 <후불제 민주주의>가 그랬고 올해가 다 저물어 가는 세밑에 있는 한홍구 교수의 <특강>이 그랬다. 지난 4월에 책을 사두고서도 이제야 읽게 됐다. 그것도 유시민 선생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서야 비로소 ‘아, 올해가 가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작정을 했으니.

1987년 이래 사회 전반에서 진행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역주행의 시대를 맞아 한홍구 교수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8차례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을 통해 얼마 전에 읽었던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에 나오는 민생단 사건이 바로 한홍구 교수의 전공분야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역사학자로서는 국내에서 한국현대사에 처음으로 도전한 한홍구 교수는 역시 <특강>의 총론 격에 해당하는 첫 번째 이야기로 과감하게 친일파와 관련된 건국절 논란으로 타이틀을 뽑는다.

이제는 더 왜 우리나라의 과거사가 청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친일파와 관련된 사안은 역사적 당위성을 담보로 한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 친일파야말로 이후에 벌어진 개발독재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참으로 희한한 말로 포장된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살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친일파들이 권력의 주체로 등장하기까지에 대한 한홍구 교수의 설명은 참으로 명쾌하다. 동시에, 왜 그때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서 반세기가 지날 때까지 우리 후손들이 그 멍에를 쓰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울분이 터졌다.

이웃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있는 권력의 ‘소프트랜딩’을 연달아 성공해 온 우리나라 보수 엘리트계층의 끈질긴 생명력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기만 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나와 있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선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낸 건국절이라는 희한한 발상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 태생적 한계 탓에, 대한민국에서 민족을 내세울 수 없는 친일파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 집단이라는 것이 한홍구 교수의 시각이다. 정통성의 부재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민족 대신 외세에 대한 의존할 수 없는 그네들의 실상을 적확하게 집어낸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정권 보위용 간첩 조작사건들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어렸을 적에 북에서 내려온 간첩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생긴 손과 얼굴이 털이 숭숭 나고, 거의 늑대 수준으로 묘사된 만화와 반공포스터를 보면서 자란 세대의 비애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석훈 교수가 경고해온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은 나중에 소개되는 사교육과 그 짝을 이뤄 누구도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정치가 판을 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철하게 그려낸다.

한편, 현 정권에서 명운을 걸고 진행 중인 4대강 정비사업과 더불어 시대정신으로 포장된 민영화 사업에 대한 허실을 한홍구 교수는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예단한다. 좌파나 사회주의자들이 아닌 보수 우파가 입안한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한홍구 교수가 적시한 대로 그렇게 지금 들어도 놀랄 정도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넘쳐 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그것이야말로 글의 초반에 기술했던 법열의 순간이었다.

어느덧 <특강>은 중반 레이스로 치달으면서, 2008년 초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광우병 논란의 중심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사문화된 유언비어 유포죄로 체포하고, 인터넷 담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던 지배층에 대항해서 루머와 괴담이라는 형식을 빌려 정보 소통과 언로가 막히고, 억압적인 조건을 타파하려고 한 계급성에 한홍구 교수는 날카로운 필치를 놀린다.

<특강>은 국민의 안녕과 공공질서라는 본연의 임무보다, 정권 보위를 위한 조직으로 전락해 버린 경찰 폭력과 과잉진압에 대해 역사적 입장에서 접근을 시도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도 먼저 창설된 경찰은, 일제 치하의 순사 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민족경찰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채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으로 변신하게 된다. 평소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경찰청장의 이름이 2008년 여름 내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명박산성’을 쌓아 소통의 단절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기가 막힌 퍼포먼스로 시각화한 경찰에게 중립화와 시민에 대한 서비스라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올 것을 주문한다.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버려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 떠올랐다. 근대민족국가 태동기에, 학교(교육), 군대(징병제) 그리고 공장(자본주의) 삼위일체라는 자본주의의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근대적 인간형으로 개량을 위해 공교육이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간답게 살려는 방법이 아닌 오로지 사회적 신분상승 혹은 지배계층의 공고화라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학부모들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그리고 학습의 주체인 학생들로부터 창조적 학습의지와 능력을 거세시켜 버리는 과외와 사교육이야말로 작금에 현장에서 벌어지는 공교육 붕괴의 주범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특강>에는 한홍구 교수가 풀어내는 야담 같은 한국현대사의 이야기들이 한가득 들어 있다. 한홍구 교수의 글을 통해,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던 아주 중요한 사실들, 혹은 지배계층이 알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치부들과 접할 수가 있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H. Carr)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책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문명 역주행의 시대에 왜 역사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엿볼 수가 있었다. 물론 한홍구 교수가 저술한 우리 역사 이야기 속에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역동성을 읽는 기가 막힌 재미도 빼놓을 수가 없다.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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