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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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무도하>를 읽기 전에

솔직히 말해서 김훈 작가의 책은 읽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글 속에 담긴 작가의 생각에는 다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책을 산 10월에 이미 <공무도하>는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에 경기를 일으키는 나는 책을 사고서도 근 한 달 정도를 묵혀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생겨서 갑자기 책을 읽게 됐는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야말로 책에 손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공무도하>를 읽던 나의 집중력은 가히 대단했다.

얼마 전, 온라인 북카페 모임에서 신문기자 출신 작가들의 작법에 대해 잠시 경청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팩트를 명확하고, 정해진 분량(기사 꼭지) 안에 신속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짧은 호흡과 정확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된다는 말을 들었다. 예의 모임에서 들은 말을 김훈 작가의 신작 <공무도하>에 적용시켜 보니 적확하게 이해가 됐다.

나와 김훈 작가의 첫 만남은 <남한산성>이었다. 사실 예의 책은 동네 서점 형의 추천으로 구매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미처 못 읽고 지인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올해 봄, 드디어 김훈 작가의 책들과 만날 수가 있었다. 그 기회 역시 온라인 북카페 독서토론회였다. <칼의 노래>와 <강산무진>의 독서토론회를 통해, 깨닫게 된 김훈 작가의 첫 인상은 마초이즘(machoism)과 모호함이었다. 더 좋지 않았던 건, 그가 1980년대 신군부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신용비어천가를 주도했던 기자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그가 한국일보 기자 시절 쓴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육사 입교에서 대장전역까지>(한국일보, 1980년 8월 23일부터 상중하 연재)라는 30년 전 기사와 2000년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한겨레21과의 <쾌도난담> 인터뷰에서의 마초 발언으로 시사저널을 사직하게 된 과정을 추적해 보고 싶었다. 어느 작가의 작품에서 그의 지나간 삶의 모습을 떼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기자에서 이제는 한국 문학의 축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위치에 서게 된 어느 작가의 변신을 염두에 두고 <공무도하>를 접해야 할 것이다.

2. 님이여 그래도 강을 건너시겠소

책의 제목 <공무도하>는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국어와 고문(古文) 시간에 수도 없이,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온 백수광부의 아내가 불렀다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서정가요로 손꼽히는 <공무도하가>의 원형질을 자극한다. 고대시가에서 그랬듯이, <공무도하>에서도 이야기는 물로 말미암은 재난으로 시작된다. 사건이 있으니 이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 예의 물난리를 기사로 다루는 한국매일신문의 5년 차 현장 선임 기자 문정수 그리고 그 물난리 때문에 출근하는 대신 재택근무를 하게 된 출판사의 편집자 노목희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리고 제3의 인물로 고향 창야에서 농촌지도소 돼지담당 생활을 하던 장철수가 맞닥뜨리게 되는 어느 노동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개에게 물려 죽은 어느 소년 그리고 캐피털 백화점의 화재사고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주인공들이 구식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척척 맞아 돌아간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군산항 부근의 해망(海望)으로 끌어 모은다. 아니 ‘바다 바라기’라는 지명이 그들에게 자장을 발휘해서, 운명이 그들을 인도하는 대로 모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개에게 물려 죽은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기자 문정수, 노동쟁의와 파출소습격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고향 창해를 떠나 해망의 터를 잡게 된 장철수, 아들을 잃고 해망으로 흘러든 오금자, 화재현장에서 금붙이들을 한몫 챙기고 은퇴해서 해망을 찾은 전직소방수 박옥출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이 하나둘씩 그렇게 해망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개도 가출을 해서 돌아오지 않는 해망이라는 공간이 책을 읽는 동안 무시로 익숙해져 버렸다.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약속이 땅이, 또 다른 이에게는 은거하고 자신을 버리기 위해 찾은 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중적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소설의 두 주인공인 문정수와 노목희를 중심으로 한 관계의 동심원은 파동을 일으키면서, 서로 간섭하고, 혹은 교접하기도 하면서 끊임없는 물리작용을 반복한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주인공들의 던적스러워 보이는 관계는 어느 순간, 허공으로 휘발과 동시에 소멸해 버리고 만다. 그것은 마치 지난봄에 읽었던 <강산무진>의 허무와 모호함과 교묘한 동조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내용 중에 묘한 기시감이 드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짚고 넘어가고 싶다. 타이웨이 교수의 <시간 너머로> 한국어판 표지에 서양화를 전공한 노목희가 낙타를 그린다. 이 이야기는 연초에 읽은 대만 출신의 작가 싼마오의 <흐느끼는 낙타>를 출간한 일인출판사 막내집게의 조은 씨가 책의 표지에 등장한 단봉낙타를 직접 디자인했다는 것과 어쩌면 이리도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

3. 그래도 우리의 던적스러운 삶은 계속된다

김훈 작가는 <공무도하>의 초반에서 추락사한 어느 노동자에서 장철수의 추모사를 통해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삶의 메타포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기자 시절부터 자신의 글을 팔아[賣文], 먹고 살아야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적인 냉소였을까. 현대를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악성 무좀으로 쓰라린 발을 감싸 안고 문정수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현장을 누벼야 하고, 근본 없이 해망에 불시착한 장철수와 베트남의 허리 쯤에 위치한 후에(Hue) 출신의 후에는 뱀섬 부근에서 탄피를 불법으로 수거해다가 연명을 한다. 오금자는 역시 자식을 잃고 받은 보상비로 빚잔치를 하고 고향을 떠난 이로부터 위임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 소설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여고생 방미호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여중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죽음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거대 자본 논리로 포장된 지역개발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던적스러움을 독자들에게 내던진다. 이들의 삶은 관념 속의 잔영에서 신기루처럼 피어난 어수룩한 희망이 아닌, 오늘을 먹고 사는 실존적 투쟁으로서의 삶이다.

<칼의 노래>에서는 워낙 전쟁터를 다룬 역사극이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들의 디테일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10년 전의 설화(舌禍) 사건에도 김훈 작가의 부정적인 여성상은 여전하다. 해망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노목희야 예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이주여성인 후에에 대한 묘사는 리얼리티에만 치중해서 그런진 몰라도 너무나 평면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입체적 캐릭터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나마 후에와 한집에서 살면서 자신의 던적스러운 삶에 맞서는 오금자 정도를 가장 낫다고 평가해야 할까. 다음에 발표될 작품에서 기존의 작품에 나온 캐릭터들을 뛰어넘는 더욱 진화된 여성 캐릭터를 만나보고 싶은 소망을 노래해 본다.

지난 세기에 연재소설의 창이 신문이었다면, 새로운 천 년에는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공무도하> 역시 인터넷 문학동네의 블로그에서 2009년 5월 1일부터 9월 25일까지 148일에 걸쳐 106회에 걸쳐 연재된 분량이 엮어 한 권의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육필원고를 고집하는 작가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매체의 조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책의 겉표지를 살짝 벗겨 보면, 김훈 작가의 육필원고가 인쇄되어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도 고집스레 자신의 원칙대로 저술활동을 펼치는 그의 아날로그 감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차기작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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