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팩션 장르를 굉장히 좋아한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사건이나 인물들이 펼치는 가상의 미싱 링크를 훔쳐보는 재미를 즐긴다. 최근에 읽었던 김탁환 선생의 <노서아 가비>기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랑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작가인 김연수 작가가 1930년대 만주 간도 지방에서 실제로 있었던 ‘민생단사건’을 모티프로 삼아서 쓴 <밤은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아주 오래전에 접했던 어느 공산당 출신 독립운동가 김산, 아니 장지락의 비극적인 삶이 떠올랐다.

경술국치를 겪고, 망국의 한(恨)을 품은 채로 살아야 했던 조선 사람들이 일제가 통치하는 조국을 떠나 중국과 조선의 사이라는 지명 간도(間島)에 정착해서 생활의 터전을 삼았다. 한편, 조선을 병탄한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은 드디어 9·18 만주사변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폭발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일본을 상대로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이던 망국 조선의 열혈지사들은 일본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이냐 아니면 중국혁명을 우선 완수하고 난 뒤에, 조선혁명을 도모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뒤로하고, 김연수 작가는 김해연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로 당시 잘 나가는 일본 기업이었던 만철의 측량기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독자를 잃어버린 고토 만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 경남 통영 태생으로 민족이나 국가 의식 없이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자란 김해연은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만철의 용정 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1932년 9월의 어느 날, 그에게 전해진 편지 한 통이 김해연의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다른 김연수 작가의 작품들처럼 <밤은 노래한다>에서도 ‘사랑’이라는 조금은 진부한 주제가주인공의 운명을 가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만주에서 용맹을 떨치던 일본의 최정예 부대 관동군의 나카지마 중위와 용정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하던 이정희 간의 삼각관계는 소설의 주인공 김해연의 삶을 온통 혼란 속으로 빠뜨려 버린다. 소설의 초반에 나카지마가 인생을 바꿔 놓은 사랑이란 걸 한 번 해보라는 충고가 묵시록처럼 다가온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출발한 내러티브는 주인공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항일투쟁의 장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공산주의와 국가주의 파시즘이 절대 양립할 수 없었다는 역사를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서로 상극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때,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일제에 협력하는 변절자, 일제의 교묘한 선전에 넘어가 일국일당주의라는 코민테른의 원칙 대신 간도에 조선족이 자치하는 공동체를 수립하려는 민생단 운동가, 유격구에서 일가친척들을 토벌대에게 잃고 유격대원으로 변신해 가는 사람들, 그리고 낭만적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관동군 장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글 속에서 펄떡이는 다양한 인물군들이 등장한다.

작가에게 만주 북간도는 선과 악이 혼재된 공간적 배경이다. 만주사변 후에 세워진 일제의 위성국가 만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만큼이나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의 그것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민족과 국가 의식 따위라고는 전혀 가지지 못했던 주인공이, 배신과 실연으로 두려움-분노 그리고 무기력에 떨면서 타인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정신세계의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 앞서 선구자들이 이미 지나간 길을 되짚어가는 의식화의 과정일는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작가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소설의 갈등을 이루는 인물들의 악연에서 그 실마리를 제시한다.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는 일제의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 앞에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경도된 간도의 젊은이들은 더는 인도주의적 협상이나 대화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의존하지 않은, 조선인들만의 독립국 혹은 해방구로서의 한인(韓人) 소비에트를 만들겠다는 박길룡/박타이와 우선 중국혁명을 성공하고 나서 차후를 도모하자는 박도만의 대립은 그 내면에 깔린 이정희/안나 리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열망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시대의 혼란상을 극명하게 도출하고 있다. 객관을 호소하면서도, 자신들의 주관적인 주장에서는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못하는 그네들의 양가적 시선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는 말인가?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작가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노래한다.

한편, 주인공 김해연은 이런 역사적 계급투쟁의 갈등 속에서도, 유격구에서 혁명의 도리를 배운 여옥과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수도 없이 오가는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바다를 보여주마고 약속한다. 이것은 마치 격랑이 이는 역동적인 시대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의 숙명적인 개인화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주인공의 감정의 흐름은 일본군 토벌대에게 포위된 어랑촌 소비에트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용정에 잠입한 김해연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권총 한 자루로 무장한 채 총영사관으로 돌입하려는 장면이 묘하게 겹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민족주의와 쟁파주의 그리고 일본군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혁명의 아수라장에서 죽어가는 민생단원들의 모습에서, 1938년 중국 연안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희대의 혁명가 김산, 장지락이 떠올랐다. 혁명의 대의가 얼마만큼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무고한 이의 목숨까지도 담보해야 할 혁명이라면 단연히 거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혁명가 장지락의 신원은 1983년에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만시지탄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은 아무리 읽어도 빡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에 읽은 김훈 작가의 글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나의 부족함이거나 아니면 작가의 스타일이랑 나의 독서습관이 안 맞는 것일지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좀 더 형상화하는데 공을 들였더라면 하는 김연수 작가의 공력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에 가려져 있던 잊힌 역사를 물 위로 부상시켰다는 점만으로도 <밤은 노래한다>는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을 한다. 많은 역사가도 미처 하지 못한 잊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끌게 만든, 김연수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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