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1968년 사진 한 장 -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속임수의 재구성
훌리오 무리요 예르다 지음, 정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1945년 4월 30일,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은 적군(赤軍, 소련군)의 맹공격 앞에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한 때 천년제국을 꿈꾸었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내 미스터리였다.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유해는 공식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해서, 에스파냐 출신의 훌리오 무리요 예르다는 <히틀러의 1968년 사진 한 장>이라는 놀라운 팩션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팩션이라는 장르가 조금은 지루하다는 나의 선입견을 이 책이 한 방에 날려 주었다.

영국 유수의 신문인 가디언 지의의 국제부 기자인 사이먼 다든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인츠 라이너란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사진이 날아든다. 그 사진에는 반세기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 그의 일당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사이먼은 친구이자 사진 전문가인 존 스튜어트에게 감정을 의뢰한다. 존 스튜어트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도 합성사진이 아닌 진짜 사진이라는데 동의한다.

자 이제 소설은 이 엄청난 정보를 제공한 하인츠 라이너의 자취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인츠 라이너는 노르웨이 출신의 생물학자로 본명은 아일러트 랑이다. 그는 다른 8명의 동료들과 함께 남극 대륙에 프로젝트를 위한 탐구와 관찰을 하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동안 숨겨져온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그로부터 6년간의 목숨을 건 진실 폭로전이 개시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악의 축으로 등장하는 나치 비밀결사 조직 울티마 툴레는 하인츠 라이너를 처형하고, 베를린이 함락할 당시 총통 벙커의 비밀에 관련된 5명의 배우들을 차례로 제거하기 시작한다. 하인츠 라이너는 자신을 쫓는 툴레들로부터 도주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이 엄청난 사건에 끼어들게 된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엘케 슐츠와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데 목숨을 건 사이먼 다든과 함께 ‘샹그릴라 작전’의 사실을 밝히기 위한 시각을 다투는 레이스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대단원에 가서 독자들을 모두 무장 해제시켜 버린 다음, 가히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 훌리오 무리요의 2차 세계대전 후를 다룬 연구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솔직히 말해서, 전쟁이 끝난 다음 나치 잔당들이 아르헨티나와 라틴 아메리카 제국으로 망명을 해서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는 신비스러운 음모설은 그동안 많이 들어와서 조금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돌프 아이히만과 조제프 멩겔레 같은 나치 전범들이 라틴 아메리카에 정착한 정황으로 볼 때, 아주 황당무계한 주장만은 아니라는데 공감이 간다.

바로 이 역사의 분절점에 착안을 해서, 훌리오 무리요는 시간과 공간을 파고든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페이퍼클립 작전>(1945)과 <하이점프 작전>(1946~47)들은 실재했던 작전으로 전자는 주로 종전 당시 획기적인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제3제국 출신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프로그램이었고, 후자는 연인원 5,0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이 동원한 남극탐사 프로젝트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 있어, 나치 잔당들이 남극에 기지를 세웠다는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아마 이런 역사적 배경들을 알고서, 이 책을 접한다면 새삼 작가의 상상력과 현실세계의 접점이 보다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울티마 툴레의 절대적 상징인 총통 히틀러보다도 세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 번 네 번째 제국을 꿈꾸며 새로운 압제자의 등장을 기대하는 나치의 후예인 비밀결사조직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큰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작가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 가문과 나치와의 연관성에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샹그릴라>다. 영국의 저명한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 나오는 이상향을 뜻하는 “샹그릴라”는 나치 시절 레벤스보른(생명의 샘) 프로젝트로 육성된 아리안족의 후예들이 꿈꾸는 땅, 남극대륙의 노이슈바벤란트의 다른 이름이었다. 샹그릴라는 마치 이 책에서 알파와 오메가처럼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과 픽션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도, 극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계속되는 음모와 쫓고 쫓기는 스파이소설의 전형적인 요소들도 잊지 않는다. 캐릭터 창조에 있어서도 공을 많이 들인 표가 났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러트 랑은 냉철한 과학도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나이로 목숨이 걸린 도주를 하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열혈남아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처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언론인으로서 사이먼 다든 역시 진실과 가족의 안위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의 단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이 소설에서 최고의 캐릭터는 바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바이올리니스트 엘케 슐츠를 꼽을 수가 있겠다. 자신에게는 오로지 배우자와도 같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밖에 없다고 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주다가도, 동료들을 위해 분노의 일격을 날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입체적 면들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천재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와의 비교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팩션 장르에 대해 조금은 지루하지 않을까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훌리오 무리요 작가는 나의 그런 생각들을 한 방에 날려 버려주었다. 현실세계에서 제기된 음모론과 관계된 잔재미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극적인 반전의 연속으로 그야말로 눈이 다 빡빡해질 때까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었다. <히틀러의 1968년 사진 한 장>을 읽은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