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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벳 -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레이프 라슨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지난봄에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읽으면서 그 두께에 놀란 적이 있었다. 오늘 이야기할 <스피벳 -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역시 전공서적에 버금갈만한 사이즈에 500쪽에 가까운 분량이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일까 해서 책장을 펴본 순간, 읽고 있던 책마저 내려놓고 이 책부터 먼저 읽게 만드는 마력에 빠져 버렸다.
책의 내용은 무척 간단하다. 미국 몬태나 주 코퍼톱이라는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짜리 꼬마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 협회가 수상하는 베어드상의 시상자로 결정되고, 주인공 티에스(T.S.) 스피벳이 미국 대륙을 횡단해서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내용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티에스(이니셜의 T는 쇼쇼니족의 전설적인 전사 테쿰세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미국 역사에 오점으로 기록된 인디언 학살에 대한 오마쥬처럼 보인다)는 냉담한 과학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세상을 설명해주는 도구로써 ‘도해’를 선택하고 훌륭한 제도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해 나가고 있다. 물론 그의 멘터인 테렌스 욘 박사가 이 모든 소동을 주도하기는 했지만.
물론 작가 레이프 라슨의 상상력의 구현이겠지만, 확실히 12살짜리 꼬마가 자신의 특별한 관찰력을 이용해서 책에 실린 것과 같은 도해들을 그려낸다면 그야말로 해외토픽에 나올 만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티에스의 완고한 카우보이 아버지는 자신의 맏아들의 능력과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마 총기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막내아들 레이턴의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피벳 가족에게 레이턴의 이름은 터부처럼 다가온다. 특히 주인공 티에스에게 레이턴은 트라우마의 원천이다.
어쨌든 그 스미스소니언 협회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로 티에스의 장구한 여정이 시작된다. 사실 책을 보면서 계속해서 든 의문인데, 12살짜리 꼬마가 무임승차와 히치하이킹만으로 그 광활한 미국대륙을 횡단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행하는 동안에 필요한 식량은 어떻게 조달한단 말인가? 바로 그 시점에 작가 레이프 라슨은 적절한 판타지들을 심어 둔다. 나같이 태클을 걸 독자들을 위한 작가의 배려일까? 티에스는 주변의 사물과 대화를 하고, 그것들에게 인격을 부여한다. 얼핏얼핏 남미 출신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술적 리얼리즘의 향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액자식 구성으로 소설 속에 스피벳 가문의 역사적 유래를 다룬 이야기가 티에스가 자신의 어머니 방에서 얼결에 훔쳐온 할머니 엠마 오스터빌 이야기가 중첩이 된다. 사실 이 부분이 티에스의 모험담을 원하는 독자에게 조금은 지루한 요소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상 전래의 과학적 탐구 정신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이성적 접근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처럼 보인다.
스피벳의 이 기묘한 여정은 미국 중서부를 횡단하면서, 꼬마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도해와 기록들이 넘실거린다. 분면 티에스는 사진도 찍었지만, 카메라의 렌즈는 티에스의 눈과 손을 대체할 수가 없었나 보다. 맥도널드 해피밀에서 받은 해적인형으로부터, 자신의 가계도, 자신의 이동로 그리고 시카고의 쓰레기 밀도 분포도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도해로 표현해내는 티에스. 여정의 말미에 가서 티에스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이상적인 학생 상으로 떠받들어진다. 물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No pain, no gain 이라는 경구가 정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역시 이 소설의 백미는 스미스소니언에서 연설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과학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른 티에스 스피벳!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마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어린 아이일 뿐이다. 물론 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어른도 있지만, 정말 선의로 그를 도와주려는 이들도 있다. 티에스에게 뿐만 아니라 그만큼 이 세상은 우리 어른들에게 혼란 그 자체다.
이 멋진 소설의 작가인 레이프 라슨은 이 책의 사이드바(측면주석)에 실린 모든 일러스트들을 직접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을 준비하는데 무려 4년이나 걸렸다고 하는데, 그만큼의 효과는 충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단 한 편의 책으로 문학계의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으니 말이다. 북디자이너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의 일러스트들은 확실히 멋지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은 모름지기 재밌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의 소설관과 아주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신예작가여서 그런진 몰라도, 초반의 멋진 스타트와 중반의 전개에 비해 결말이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가족중심주의적인 미국의 한계가 드러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관계의 회복으로 매조지되는 엔딩이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티에스 스피벳과 함께 하는 3000km의 여행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