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나오기 전에 미 중앙정보부(CIA)에서 이 책의 출간에 대해서 항의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50년도 더 지난 일들에 대해 비밀등급 해제가 된 마당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장장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전 세계 도처에서 미국의 대외관계 비밀업무를 관장하고 있다는 CI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략사무국(OSS)을 그 모태로 해서 탄생이 되었다. 사실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대외 첩보 및 정보를 다루는 국가기관이 전무했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그 필요성이 대두되게 되었다. 물론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치열한 첩보전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상황에서 비밀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긴급을 요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기관의 업무 계획과 장기적인 플랜 없이 거의 급조되다시피 한 CIA는 그 태생에서부터 라이벌 소련의 KGB에 적수가 되지 않았다. 그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CIA의 대외 정보부 의존은 여전한데, 결국 1947년 9월 CIA의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 치세 하에서 CIA는 출범하기에 이른다. 연이은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에 대항해서 CIA는 서유럽 각지에서 국회의 승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비밀 업무에 뛰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비밀정보 업무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CIA는 전후 서유럽 경제부흥 계획으로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 마셜 플랜으로부터 비밀리에 무한정의 자금을 지원 받아(그 소용 처를 밝힐 필요도 없었던), 서유럽 각지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각종 비밀 업무에 준군사적 활동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특히 CIA는 동독과 동유럽을 석권한 소련군에 대항하기 위해, 나치 전범들과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협력했던 우크라이나 유격대 출신의 난민들을 포섭해서 소련의 배후에 낙하시켜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부단한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던 활동에 소모적인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거의 공개적으로 들어났던 CIA의 그 어느 활동도 전혀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정말 중요했던 사실들이었던 소련의 핵무기 개발 상황 그리고 냉전 무력 충돌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의 발발 조차도 CIA는 예측해 내지 못하면서 비등하는 국내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CIA 조직은 트루먼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를 대신해서 들어선 아이젠하워 정부 하에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실질적으로 CIA의 모든 비밀활동을 주재했던 프랭크 와이즈너와 앨런 덜레스 국장 아래서 CIA는 미국의 국익과 전 세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게다가 CIA 조직은 인원과 자금 면에서 해가 갈수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우선 1953년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면서 점점 소련 측으로 가까워져가고 있는 징후를 보인 이란의 모사데드 정권을 무차별 금품살포와 준군사적 활동 다시 말해서 폭력에 근거한 테러를 부추기는 가운데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후 팔레비 샤는 20여 년간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친 끝에 결국 1979년 회교혁명으로 권좌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이 근본주의 무슬림 혁명은 CIA와 미국에게 또 다른 재앙으로 다가오게 되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CIA의 성공신화는 소위 “성공작전”으로 불리는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점점 사회주의화 되어가는 과테말라는 미국의 안마당으로 간주되던 중앙아메리카에서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CIA는 유언비어와 역시 뇌물 그리고 카스티요 아마스라는 반정부 인사와 반군을 지원하면서 과테말라에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막판에 가서는 과테말라는 고사시키기 위해 해상봉쇄를 하고  미공군기까지 동원해서 과테말라를 폭격하는 등 그야말로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 성공신화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일본에서도 전범으로 기소된 기시 노부스케를 공공연하게 지원하면서, 새로 창당된 자민당과 야심찬 젊은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면서 맥아더 방식의 군정으로 일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CIA가 창조해낸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의 일본을 지배하고 동아시아에서 최대한의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기 위한 밀월관계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물론 냉전 초기에 이런 성공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근동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시리아에서의 공작실패와 제3세계 론을 주창했던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해 지원했던 인도네시아 작전과 동베를린에서 소련의 정보를 얻기 위해 역시 많은 자금을 들여서 준비했던 땅굴작전들은 그야말로 처참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아이젠하워 치세 막판에 벌어진 소련 영내에서 벌어진 U-2기 격추사건과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혁명은 미국과 소련을 극한 대립으로 몰고 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소위 몽구스 작전의 일환으로 계획된 1961년 4월의 쿠바 피그스만 침공 사건의 처절한 실패는 CIA 비밀공작 작전의 최대의 실패 중의 하나였고, 뒤이어 전개된 미사일 위기 사건은 그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때에도 CIA는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예측을 하지 못함으로써 제 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몰고 왔다. 게다가 1963년 11월 JFK가 오스왈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CIA는 오스왈드와 쿠바/소련의 연계설을 은폐했고 그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CIA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던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1964년 8월 가공된 정보 조작으로 미 의회가 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개입을 하게 됐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에 막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를 퍼부었지만 그들의 패망을 저지하는데 결국 실패하고 인도차이나가 도미노 이론처럼 차례차례 공산화 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CIA의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사살과 1973년 칠레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몰락시킨 비밀공작은 CIA 최고의 작품 중의 하나였다. 닉슨 행정부를 결국 좌초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미국의 정치지도는 크게 훼손되었고, 그 하수인 역할을 했던 CIA 역시 카운터펀치를 먹고 비틀거리게 됐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 신보수주의 반공노선을 표방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CIA는 다시 한 번 화려한 비상을 하게 된다.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에 대항해서 미국은 아낌없이 무자헤딘 전사들을 지원하고(나중에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되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양쪽 편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중앙아메리카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비밀자금을 마련하는 등 세계각처에서 수많은 비밀공작들을 다시 한 번 CIA가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CIA는 정작 중요한 소련의 붕괴를 예측해내지 못하면서 급작스러운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등장하게 된 테러조직과의 싸움에서도 전혀 예측 불허한 상황들에 민감하게 대처해내지 못하고 다시 한 번 2001년의 9-11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WMD)를 천명하면서 그 위상은 급전직하하게 되었다.

<잿더미의 유산>에 등장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미증유의 재난 후에 설립된 CIA는 미국의 전후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CIA는 기본적인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였던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장기적 전략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익을 도모한다는 취지보다,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과 막대한 예산을 통제하면서 초법적인 존재로 군림해 왔다. 그리고 미국의 국익을 위한다는 전제 하에, 많은 나라들에서 선전선동, 쿠데타 지원, 요인암살 등과 같은 불법적인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 왔다. 그것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역대 대통령들과 CIA 국장들의 계속된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CIA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유용한 정보들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숱한 위기들을 자초했다.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 사람들과 세계에 거짓말을 해야 했고, CIA 내부에서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덮어가는 관행이 수립되어졌다.

결국 CIA가 정보 권력을 놓고 국방부와 벌인 지난 60년간의 치열한 경쟁은 국방부의 일방적인 KO승으로 끝이 났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가 안보와 국민들의 안위를 위한 정보수집의 중요성은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팀 와이너의 역작 <잿더미의 유산>은 새로 거듭나게 될 과거의 ‘실패한 조직, CIA의 슬픈 묘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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