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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 - 《뉴욕타임스》신디케이트 기고 최신 칼럼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8년 4월
평점 :
9.11과 관련되어서 개인적으로 잊지 못하는 기억이 하나 있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납치된 비행기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보면서 열렬하게 환호해대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모습이 미국 전역의 텔레비전을 통해 끊임없이 방송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느 미국인이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건 언론이 아니라 이제는 기업화된 미디어의 철저하게 계산된 프로파간다였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해 애써 외면하는 미디어가 어쩌면 그렇게 시기적절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장면만을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걸까. 바로 이 시각에서 노암 촘스키의 국가와 권력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된다.
언어학자로 출발을 해서 행동하는 미국의 양심의 상징이 된 80세 노구의 학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세계화 전략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부시행정부의 명분 없는 혹은 조작된 아젠다로 시작된 이라크 침공은 미국에서 제2의 베트남이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세계의 악으로 규정한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후에도 그들의 사실상의 목표인 중동의 에너지 자원 다시 말해 석유를 장악해서 하루가 다르게 미국에 반항하는 그룹들의 목줄을 죄겠다는 것이 바로 이라크 침공의 본질임을 촘스키 선생은 역설하고 있다.
이미 투키디데스가 2000년 전에 말한 대로, 강대국들은 무엇이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약소국들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입버릇처럼 외쳐대는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가 추구하는 지향점인 것이다. 대량살상무기를 없애기 위해 시작했다는 이라크 침공 결과, 그런 대량살상무기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부시 행정부의 날조가 드러나게 되자 이번에는 그 방향을 바꿔서 자신들이 지원하고 만들어낸 독재자 후세인으로부터 이라크 민중을 구하고 아랍세계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겠다고 정책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런 주장 또한 현재 이라크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라크 사람들은 이라크 주둔 미군을 ‘침략자’로 생각하고 있으며,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그렇게 원하는 민주주의 선거 또한 이라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들이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차지하게 될까봐,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 석유매장량 2위에 해당하는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주권국가 이라크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갖은 책동을 다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자신들의 안마당이라고 생각해온 라틴아메리카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제2재무부라고 불린 IMF를 통해 간섭과 “실력행사”를 해왔다. 하지만 우고 차베스가 이끄는 베네수엘라를 필두로 해서,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그리고 브라질의 룰라 등 사회주의 좌파정부들이 속속 수립되면서 외세의 개입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물결이 흘러넘치고 있다. 메르수코르(남미공동시장)이라는 경제블럭화를 꿈꾸면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자주적인 연대와 협력이 증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써, 베네수엘라의 에너지 자원 공유와 쿠바가 제공하는 의료진과 교사들 간의 협력체계가 빈곤과 질병 그리고 문맹에 대항하는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어서 촘스키는 2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팔레스타인으로 눈을 돌린다. 중동에서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정착촌 건설강행과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버금가는 분리장벽 건설이 중동의 장기적인 평화정착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촘스키는 지적하고 있다. 미국과 서구의 주류언론에 의해 테러조직이라는 악명을 달고 있는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현실세계에는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거를 통해 합법적인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미국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 내의 2개 국가안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비협조와 거듭되는 UN권고안에 대한 위반과 폭력은 이제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한편 미국 내의 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2005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안즈를 휩쓸어 버린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재난관리청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재정압박으로 사전에 대비를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가 없었던 연방정부에 상당 부분의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당시 폐허가 된 뉴올리안즈를 뉴스를 통해 본 미국인들은 아마 또 제3세계의 어디선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재해일거라고 생각을 했다던가.
게다가 4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는 엘리트 계층을 대변하고 있는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수의 부유층과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들의 정치 쇼라고 촘스키는 진단하고 있다. 엇비슷한 정책으로 변별점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정책 대결이 아닌 오로지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보고 결정을 내리게 되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촘스키가 제시하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안은 간단하다. 전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겠다는 미국식 패권주의가 아니라 대화에 기반한 외교와 협상으로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면서 서로의 상충되는 이해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해결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의 근간이다. 물론 ‘여기에서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식의 사고 하에서는 그 어느 것도 해결될 수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의 격차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조만간에 그런 식으로 해결되리라는 보장 또한 요원해 보이기만 하다.
하지만 촘스키 역시 철저하게 미국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조심스런 그러나 정신 나간 제안>에 나오는 이란을 제한적으로 무장을 시켜서 이라크를 침공하게 하자는 주장은 중화제국 이래 사용되어져온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현대판 버전이다. 그 근간에는 왜 이라크를 침공해서 지배하는데 있어, 미국 젊은이들의 피를 흘릴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게다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인들이 대오각성해야 한다고 역설을 하고 있는 점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잔영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1929년 이래 최악이라는 금융위기를 통해 지난 20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와 정부의 불간섭주의를 외쳐 대던 목소리들이 사그러들고 있다. 동시에 동아시아와 유럽의 경제블럭들은 하나의 초강대국이 그동안 누려왔던 지위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 나라는 왜 새로운 천년에는 기존의 지배와 복속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현대판 선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지 않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