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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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책을 만나는 경로도 다양하다. 미미 여사의 미시마야 시리즈를 읽다가 책 뒤편 후기에 마포 김 사장님이 추천한 <일몰의 저편>을 알게 됐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미리보기 서비스로 좀 읽다가 아 이거다 싶어서 바로 도서관에 들러서 빌려다 읽었다. 재미 하나는 정말 끝내주지 싶다. 그리고 물론 창작과 검열 그리고 요즘 뜨거운 이슈인 '정론'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중년의 작가 마쓰 유메이는 어느날 소환장을 하나 받게 된다. 그리고 총무성 문화국 문예윤리위원회라는 거창한 단체에서 발송한 몇월 몇일(629일 월요일이었나?)까지 어디로 출두하라는 명령조의 소환장이다. '약간의 강습'이 있을 거라는 고지에 사소하지만 주변 정리를 한다. 문제는 고양이 곤부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예전에 동거하던 가네가사키 유라는 친구에게 부탁하려고 전화했는데,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빡센데 이거.

 

도대체 자신이 왜 이바라기 현 근처의 외딴 바닷가 시치후쿠진하마 요양소에 가야 하는지 따지다가 자신을 데리러 온 니시모리와 한바탕하고 벌점 1점을 부과 받는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자신이 받는 벌점 처분은 치명적인 후과를 초래한다. 엄격한 규칙에 적용되는 요양소에 입소한 마쓰 유메이는 B98이라는 수인 번호와 유사한 번호를 부여 받고, 구류 생활을 시작한다.

 

당연히 휴대폰의 와이파이나 연락은 되지 않고, 방에는 전기 콘센트도 하나 없다. 요양소의 다다 소장과 면담하게 되면서 자신이 어떤 일로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성애 소설 작가인 마쓰 유메이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강도 높은 창작물을 생산해냈다. 하지만, 사회에서 그의 그런 작풍을 혐오하던 이가 일년 반 전에 통과된 헤이트스피치 법에 따라 고발을 했고 그 여파로 마쓰 유메이가 이곳에 "교정"을 위해 온 것이다.

 

여기서 순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 들였다면 소설 <일몰의 저편>은 진행되지 않았으리라. 철저하게 통제되는 요양소 운영이 극도의 반발심이 생긴 마쓰 유메이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그 결과 벌점이 추가로 4점이나 발생하면서 구류 기간이 7주로 연장됐다. 물론 그에 수반된 물리적 폭력은 기본이었다.

 

요양소에서는 마쓰 유메이의 왜곡된 창작욕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사육을 전개한다. 우선 물과 음식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그렇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 마쓰는 단것의 유혹에 너무 약하다. 나중에 다다 소장이 원하는 대로 작문을 하면서, 그가 제공하는 달달한 제로콜라의 유혹에 넘어가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19금 수준의 성애 소설을 주로 쓰던 마쓰 유메이에게 다다 소장은 무언가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그리고 노벨문학상에 필적할 만한 그런 작품을 생산할 것을 주문한다.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 소비자로서 나도 이 장면에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왜 다다 소장으로 대변되는 일개 국가 기관이 창작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지? 나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거대한 통제의 단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사회에 반한다는 이유로 낯 뜨거운 성애 소설부터 시작해서 검열을 시작한다면 다음 차례는 뻔하지 않은가. 반사회적 성향의 글이나 반역을 도모하는 그런 부류의 글에 대해서도 문예윤리위원회는 칼날을 휘두를 것이다.

 

실제로 요양소에 수용된 작가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A45라는 이름의 익명의 누군가가 철저하게 감시되는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접근해서 요양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알려준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거다. 그렇다면 과연 A45는 믿을 수 있는 걸까? 게다가 좌절한 작가들이 잇달아 투신하면서 수용된 이들은 연대책임으로 중식을 거르는 벌까지 받게 된다.

 

수용소의 인질이 된 마쓰 유메이는 생존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엄마의 카레라이스>라는 그동안 자신이 구사해온 작풍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탕을 연상시키는 연재물로 다다 소장의 환심을 산다. 그랬더니만, 바로 자신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말이다. 시원한 얼음이 단긴 제로 코카콜라의 유혹은 작가로서 비굴함을 초월하는, 육신의 평안을 달래주는 그 무엇이었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의 <일몰의 저편> 대부분은 디스토피아적 상상에 기반한다. 당연히 우울한 색조를 띨 수밖에 없다. 요양소에서는 수용자들의 교정이 아닌, 그들의 투신을 종용한다. 멀쩡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미치지 않는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외부의 도움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고 끊임없이 자신은 갱생한 순수한 작가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증명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비록 사회에서 성애 소설 작가이긴 하지만, 나름 창작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싶은 마음이 마쓰 유메이를 통해 불쑥불쑥 폭발시킨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을 노벨문학상 작가 정도의 수준이 아닌 포르노 소설 작가로 설정한 건 작가의 신의 한수였다. 아마 누구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요양소에 갇혀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분개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쓰 유메이는 그런 작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속세에 어울리는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자유이며 표현의 자유라는 대전제 가운데 무슨 글을 쓰든지 간에 그건 자유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던진다. 그리고 다다 소장으로 대변되는 국가나 단체에 의한 일체의 (자기)검열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이런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면 실제적 검열보다도,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기검열이 이루어진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제임스 설터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 존경과 사랑, 칭찬 그리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작가들이 마쓰 유메이처럼 핍박받는 시절이 온다면 과연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인가?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배치된 <전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형의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은 자유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존의 자아를 유지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세상의 맛있는 음식들, 안락한 일상과 삶의 편리함 등등.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이 원하는 글을 썼을 때, 과연 자신은 즐거울 수 있을까? 문득 그것조차도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잠시 마쓰 유메이에게 내 자신을 투영했다가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일몰의 저편>은 마포 김 사장님의 추천대로 소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재밌어서 더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었다. 미미 여사의 책을 읽다 말고 시작했는데, 먼저 다 읽어 버렸다. 그것 참. 조금 남은 미미 여사의 <영혼 통행증>도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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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9-11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의 제 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늘만 넘기면 이 무서운 더위도 꺾일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4-09-11 13:45   좋아요 1 | URL
쓰고 싶은 걸, 마음 대로 쓰는 자유!
무언가가 두려워서 마음껏 쓰지
못하니 답답하기도 하구요.

내일하고 모레 비가 온다고 하니
말씀해 주신 대로 더위가 가시길
기대해 봅니다. 너무 덥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