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링크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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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볼라뇨다. 열린책들에서 제공하는 리딩 가이드에는 볼라뇨 읽기 5개년 프로젝트가 있더라. 4년 동안, 15권을 읽고 마지막 해에는 <2666>을 읽으라고 되어 있다. 난 아직도 <2666><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다 읽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남아 있던 볼라뇨의 첫 소설 <아이스링크>를 어제 단박에 읽었다. 볼라뇨 21주기를 맞아 올해에는 못 다 읽은 책 두 권도 다 읽을 수 있을까.

 

소설 <아이스링크>는 세 명의 남자가 차례로 등장해서,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Z시 벤빈구트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진술(?)이 교차한다. 진술은 모두 16번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모 모란, 그는 칠레 출신 소설가이자 사업가다. 레모의 멕시코 친구 가스파르 에레디아(가스파린)는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한다. 마지막 인물인 엔리크 로스켈러스는 Z시의 매우 유능한 공무원으로 뚱보 사회주의자다.

 

그리고 금발의 스케이트 소녀 누리아 마르티가 뮤즈처럼 등장해서 엔리크의 영혼을 빼앗아 버린다. 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을 원하는 누리아에게 연습에 매진할 빙상장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누리아를 지상에 강림한 천사로 생각하는 엔리크는 시의 공금을 횡령해서, 신대륙에 가서 성공한 벤빈구트의 버려진 저택의 수영장을 개조해서 자신의 천사를 위한 빙상장으로 개조한다. 사랑에 눈이 먼 이의 대범한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스케이트 소녀를 위한 아이스링크에서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는 누리아에게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을 느끼는 뚱보 엔리크.

 

레모도 엔리크의 동료였던 롤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2년 만에 이혼하고 카르타고 주점과 스텔라 마리스 야영장 등의 사업장 운영에 전념하다가, 운명적으로 누리아와 조우한다. 곧바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누리아와 레모. 기묘한 치정으로 미쳐 돌아가는 애정 전선 가운데, 그나마 서사의 균형을 잡아주는 인물이 바로 레모가 아닐까 싶다.

 

멕시코 시절 친구였던 레모에게 픽업되어, 캠핑장에서 5개월 정도 야간경비원으로 일하게 된 가스파린(가스파르 에레디아)은 불법체류자 신세다. 캠핑장의 터줏대감 카라히요 영감님과 어울리며 야간 경비라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야영장에 빌붙어 사는 카르멘이라는 이름의 오페라 가수 할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 카리다드와 관계를 쌓는데 열중한다. 그리고 가스파린은 현재가 행복한 순간이라고 믿고, 무언가 더 바라지 않는다. 이런 게 젊음의 특권이라는 걸까.

 

우여곡절 끝에 벤빈구트 저택의 아이스링크가 완성되고, 우리의 스케이트 소녀 누리아는 그곳에 가서 마음껏 연습에 매진한다. 그리고 야영장에서 쫓겨난 카르멘 할멈과 카리다드도 남몰래 벤빈구트 저택에 잠입해서 삶을 이어간다. 이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서사의 전개는 예상대로 빙상장에서 카르멘 할멈이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왜 누가, 아무에게도 무해해 보이는 카르멘 할멈을 죽였단 말인가.

 

그 다음에는 빙상장 건설에 실무 책임자인 엔리크가 살인죄와 횡령죄로 체포되면서 최고조로 치닫는다. 카르멘 할멈이 시청 공무원 엔리크를 협박해서 10만 페세타를 뜯어낸 전과도 있지 않은가. 모든 지표는 엔리크가 범인이라고 가르킨다. 과연 그럴까?

 

사실 누가 왜 카르멘 할멈을 죽였는가는 소설 <아이스링크>에서 중요하지 않은 요소다. 하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인 볼라뇨는 소설의 끝까지 누가 할멈을 죽였는가에 대한 부분을 밝히지 않으면서, 바로 그 지점에서 파생된 팽팽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역시 불혹의 볼라뇨는 글을 좀 쓸 줄 아는 작가였구만 그래.

 

"아이스링크"에서 벌어지는 게임판에 뛰어든 참가자들의 추구하는 목표는 현상유지다. 성공한 사업가 레모는 말할 것도 없고, 날건달처럼 보이는 가스파린 역시 카리다드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뚱보 사회주의자 엔리크는 자신의 공금 횡령 발각이 시간문제긴 하지만, 적어도 누리아가 벤빈구트 저택의 비밀 빙상장을 누비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복의 행복을 느낀다. 에피쿠로스적인 현세주의자들의 집합인가.

 

어느 순간부터 소설의 중심을 차지할 것처럼 보였던 살인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는 뒷전으로 빠지고, 레모와 가스파린 그리고 엔리크 3인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진중한 삶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춰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예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난폭해 보이는 식칼을 든 카리다드의 존재감은 언제라도 무슨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한몫한다.

 

또 하나의 문제적 인물 누리아 마르티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애타게 고백하는 엔리크의 고백에도 그리고 한때 연인 레모의 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Z시를 폭풍우처럼 집어 삼킨 어마어마한 추문과 스캔들 속에서도 완벽한 알리바이로 혐의를 벗고, 새 삶을 찾아 나선다. 바로셀로나로 떠난 누리아는 비서로 일하면서 예술 화보를 찍어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살인죄 혐의는 벗었지만 빼박이었던 횡령죄로 복역하던 엔리크는 교도 행정에 자신의 특유의 행정력 재능을 보여 주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들이 누리는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그렇게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아니 행복한 순간들은 찰나일 뿐, 나머지 대부분은 인내와 고통의 시간일 지도 모르겠다. 애정하는 작가의 첫 소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회고하는 방식으로 만나는 즐거움은 대단했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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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1-17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처 돌아가는 애정전선과 팽팽한 긴장감의 스릴러인가요? ^^
찾아보니<2666>은 마침 정가가 66,600원이네요ㅋㅋㅋ

매냐님이 애정하는 작가 볼라뇨가 프루스트,조이스와 불멸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니
저도 일단 찜해두어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4-01-17 15:17   좋아요 2 | URL
언제 읽어도 역시나, 볼라뇨구나
싶었습니다 :> 아직까지 읽지 않은
책이 있다니... 놀랐네요.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
은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네요.

다시 한 번 도전해 볼랍니다 고저.

coolcat329 2024-01-17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재미있을 거 같아요!
저야말로 책 사놓기만 하고 단 한 권도 안 읽었네요. <야만스러운 탐정> 어려운가요? 제목이 너무 좋아서 새 책으로 사뒀는데...
저도 조만간 칠레의 밤 도전해봐야겠습니다.
이 책도 찜입니다!

레삭매냐 2024-01-18 16:41   좋아요 0 | URL
왜 수년 전에 사놓고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아마 읽었다고 착각
을 했는지...

역시나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개지구 있는 책을 읽는다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네요.

<야만스러운 탐정>은 두 번인가
읽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미처
완독 못했네요.

<칠레의 밤>은 세 번이나 읽었네
요. 읽을수록 진국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