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 을미사변과 황해 위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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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근대사에 대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됐다. 아니 국권침탈의 시대를 외면하고 싶은 어떤 마음의 발로에서 아예 이 시절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보면 볼수록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8월말부터 읽기 시작했다가 지지부진하던 17번째 이야기들은 어제 하루 작정하고 다시 읽기 시작해서 날을 넘기지 않고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오늘 도서관에 가는 길에 반납하려고 리뷰까지 부지런히 써야겠다.

 

1894723일 경복궁 폴런으로 이미 조선은 망국으로 접어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다음 해인 을미년에도 다시 한 번 조선 왕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이 털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심각했다. 일단의 일본 낭인들로 구성된 자객들과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합세해서 일명 왕비 처단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계속되는 정변 속에서도 고종 정권의 핵심으로 부활하는 왕비 민씨를 물리적으로 처단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돌리기 시작했다. 친일파 유길준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며느리이자 정적인 왕비를 처단해 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했다고 하나, 믿을만한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왕비 민씨는 이미 백성들의 온갖 미움을 받고 있는 터여서, 십여년 전 임오군란 당시에도 민중에게 잡혔더라면 바로 죽었을 것이다. 조선 국가를 망국으로 몰아넣은 핵심 인물 중에 하나이자 오직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던 그에게 동정이 일지 않는다.

 

어쨌든 일국의 왕비를 처단한 행위는 만국의 지탄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일본이 주도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항거하는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을미사변 후에 구성된 김홍집 주도의 친일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역시 의병활동에 불을 끼얹는 효과를 가져왔다. 신체발부수지부모 타령하며 단발령에 극렬 저항하던 유생들의 속마음은 양반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에 더 컸다는 굽시니스트 선생의 지적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와이프가 국가의 정전인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군주 고종은 PTSD에 시달리게 됐다. 그리고 국가의 안위나 군주로서 체면보다 오직 자신의 신변만 걱정하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튀게 된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이런 전후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앵무새처럼 아관파천을 외우던 시절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는 기분이랄까.

 

이를 계기로 해서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되고, 조선 병탄의 야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비치던 조선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조선을 홀로 다 먹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러시아와 나눠 먹겠다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이 조선 37도 분할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2차 세계대전 후 미소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의 미래가 엿보이기도 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해서 다시 정권이 뒤집어지고, 불사조 같아 보이던 총리대신 김홍집과 어윤중이 순검들에게 맞아 죽고 갑오파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은 김윤식은 유배형을 받는다. 그리고 정동파 선수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비로소 을사오적의 수괴 이완용이 등장한다.

 

한편, 청일전쟁으로 2억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일본에 할양된 포모사(대만)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대만 할양에 동의했지만, 현지에 있던 외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남방 양무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장지동은 갖은 꼼수로 대만 할양을 막아 보려고 시도했고, 대만순무 당경승과 대만군무 유영복은 이른바 대만 민주국을 수립하면서 일본에 저항했다.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최초로 해외 식민지 획득에 성공한 일본이 이런 사태를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결국 사단급 병력을 동원해서 타이베이와 타이중 그리고 타이난을 차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대만 전토를 장악한 일본은 총독을 파견해서 패전까지 50년 동안 대만을 지배하게 됐다. 대만을 일본의 현으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본 헌법의 테두리 밖에서 예외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식민지 사람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훗날 조선에서도 써먹게 된다. 이런 방식이 주는 다른 효과로는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특권의식을 갖게 했다나. 위정자들은 상층부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다음의 소소한 이야기들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의 대관신에 관련된 에피소드들, 이홍장의 세계유람 그리고 거대한 청제국을 무너뜨리게 되는 젊은 혁명가 손문(쑨원)의 굴기가 이어진다. 하와이에서 성공한 형님의 도움으로 미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손문은 광저우에서 기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도주한다. 뜻을 같이 하다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동료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청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손문은 역적인 셈이다. 나중에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납치되어 있다가 영국 정부의 압력으로 석방되면서 네임드 인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 차르 대관식 잡상편에서 보리스 아쿠닌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오늘 도서관에 가면 빌려서 볼 생각이다.

 

일본의 압력과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시원하게 러시아의 뒤통수를 때리고 환궁한다. , 방대한 경복궁 대신 주위에 외국공사관이 많고 단출한 경운궁이 고종의 픽이었다. 그리고 고종은 처음에 일본이 제의한 칭제건원을 시행하고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지. 아마 세계열강들의 비웃음만 사지 않았나 싶다. 그럴 시간에 개혁과 내실을 다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러시아가 만주에서 러청밀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보이자, 역시나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이번에는 러시아에게 만한 나눠먹기를 제안한다. 고종을 자기 공사관에 품은 러시아는 조선 경영에 자신감을 품고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영도)에 저탄소를 만들기 위한 조차 요구에 나선다. 중국에서 거점을 만들고 싶었던 독일제국이 칭다오와 교주 조차에 들어가자 부동항을 노리던 러시아가 뤼순을 점거하고 25년짜리 조차를 따내기에 이른다. 세계 최강대국 영국은 독일의 교주 먹기는 양해했지만,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 러시아는 철저하게 견제했다. 갑신 역적으로 몰려 미주로 건너갔다가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해서 조선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서재필의 독립협회 주도로 절영도 조차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시도는 무산되고 뤼순 확보에 만족해야했다. 다음 세기에 벌어질 러일전쟁에서 뤼순이 육전에서 가장 결정적 전투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고s> 에피소드에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사들의 부고장을 돌린다. 일본이 맺은 불평등조약 갱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를 필두로 해서, 영국 수상 글래드스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청나라의 공친왕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편을 통해 19세기말 극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열강의 치열한 각축전의 실태를 알게 됐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엯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차르 니콜라이의 대관식 즈음에 벌어진 호딘카 압사 사건이 제국의 종말을 가져올 줄 누가 알았을까. 보잘 것 없는 흥중회라는 단체를 설립한 애송이 혁명가가 거대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아마 그런 점에서 훗날 역사를 복기하는 재미가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역사 가운데 미처 몰랐던 그런 소소한 점들을 애써 전파하는 이 시리즈를 내가 좋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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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9-22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리즈를 읽으시는 분, 훌륭합니다!!!
저도 긴 역사 시리즈를 읽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어요. 계 획 만...
한국 근현대사나 로마인 이야기 같은...
완독하고 나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9-23 22:44   좋아요 1 | URL
저는 오래 전에 <로마인 이야기>를
열심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작가가 극우 성향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바로 끊어
버렸네요. 책을 읽으면서도 영웅주의
사관이 좀 그랬거든요.

그리고 보니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
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네요. 흠...

말씀해 주신 대로 다 읽었을 적에는 왠
지 성취감이 생기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