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볼라뇨다. 지난주에 새로 <SF의 유령>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오늘 아침 출근길에 모두 읽었다. 어젯밤에 문득 12년 전에 처음 만난 <칠레의 밤> 생각이 났다. 생각이 났다면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지. 바로 읽기 시작했다. 느즈막하게 읽기 시작했는데 얇은 책이라 그런지 날을 넘기지 않고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세 번째 읽는 <칠레의 밤>에서는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던 포인트들을 짚어낼 수가 있었다. 너튜브의 도움이 있었다는 말도 해야 할 것 같다.

 

볼라뇨 작가가 죽기 3년 전인 2000년에 발표된 <칠레의 밤>은 죽어가는 어느 사제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놈의 늙다리 청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 두 번의 독서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미지의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늙다리 청년은 훗날 사제이자 문학비평가가 되는 주인공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마다 등장하는 가공의 캐릭터라고나 할까.

 

1950년대 사제의 길을 걷고자 한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 신부는 사제 서품 후, 페어웰이라는 필명의 문학 비평가를 후원자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농장에서 당시 칠레문단에서 신 이상의 대우를 받던 파블로 네루다와 만나기도 한다. 평소에 볼라뇨는 라틴 아메리카 문단을 주름 잡던 문호들을 까기로 유명했는데, 네루다와 옥타비오 파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너무 적나라하게 까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칠레의 밤>을 통해 저자가 가장 순수한 독일 문인이라 칭하는 에른스트 윙거를 알게 됐고 그의 책도 구해서 읽게 됐다. 파리가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시절 윙거 대위와 만난 칠레 외교관 살바도르 페리스의 에피소드가 명멸한다.

 

그 다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절, 합스부르크 황실에 품질 좋은 신발을 공급하고자 황제의 눈에 들려고 영웅들의 언덕에 묘지와 영웅들의 동상을 건립하려고 했던 어느 제화업자의 이야기도 기억 속에서 소환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의 전화 속에서 제국은 멸망했고 결국 막대한 부를 창출해 보겠다는 제화업자의 꿈 역시 일장춘몽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바카체라는 필명으로 활발하게 칠레 문단에서 활동하던 우루티아 신부는 어느 날 권태와 나락에 빠져 버린다. 그 좋아하는 독서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오데임과 오이도라는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 장학금을 줄테니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모종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 이바카체. 그 임무라는 것이 자신을 위해 설계된 것이라는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미션 역시 조금은 황당하게 들린다. 오데임과 오이도는 유럽의 많은 성당들이 비둘기의 배설물로 쇠락해 가고 있는데, 그것을 방지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했던가. 유럽으로 가는 배 안에서 자신의 권태와 나락을 극복하는데 성공한 이바카체 신부는 이탈리아 피스토이아를 시작으로 해서 토리노와 스트라스부르, 아비뇽, 부르고스, 나뮈르 그리고 생캉탱 등지에서 매를 이용해서 비둘기들을 만들어내는 무질서와 혼란을 제거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 바로 이 지점부터 내가 좋아하는 정치적 서사의 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쇠락해 가는 유럽 문화의 정수인 성당을 파괴하는 비둘기들은 좌파 지식인들로 유추할 수가 있다. 중세 이래 유럽 대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과시해오던 종교는 프랑스대혁명 이래 추락을 거듭했다. 볼테르를 필두로 한 무신론자 지식인들은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질서유지라는 미명 아래 보수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온 종교를 공격했다. 그 결과, 반동 파시즘이 창궐하기 시작해서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 혼란을 종식하기 위해 신부들은 매사냥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에스파냐에서 종교재판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유럽 각처의 신부들이 고안한 매사냥 프로젝트는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곳곳에서 피투성이가 된 비둘기 사체들이 쌓이긴 했지만 그들은 부수적 피해라는 말로 내세웠다. 그리고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런 매사냥 프로젝트가 이전될 것이라는 묵시록적 예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셔널리스트 프랑코 총통이 이끈 스페인 내전에서 성공한 매사냥 프로젝트의 다음 무대는 바로 저자 볼라뇨의 조국 칠레였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한다. 세계의 보수적 질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일대 충격이었다. 선거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합법적 방식으로 사회주의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걸 직접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런 칠레 혁명은 내부의 반동과 외부의 공작에 의해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게 됐다. 결국 1973911일 미국 CIA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칠레 혁명은 끝나 버렸다. 이바카체 신부의 후원자였던 페어웰은 이것을 보고 속이 다 시원하다고 했던가.

 

오데임과 오이도가 이즈음에 다시 등장해서, 우루티아 신부에게 상당히 미묘한 제안을 한다. 그것은 바로 일단의 수강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강의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후한 보수 제안이 뒤따랐다. 그렇다면 그 수강생들은 누구였을까? 바로 군사 쿠데타의 주범들인 피노체트 일당이었다. 쿠데타 당일 모네다 궁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아옌데 대통령은 이미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매사냥을 하기 위해 자신들의 적이 교조로 받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이 악랄한 독재자는 자신이 어디까지 갈지 알고 있다며, 과연 그렇다면 자신의 적들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에 알 필요가 있다는 적확한 진단을 내린 것이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동지들이었던 라이, 멘도사 장군 그리고 메리노 제독이 이바카체 신부의 강의에 시큰둥했지만 피노체트는 역시 달랐다. 피노체트는 정보 조직을 통해 순교자 아옌데는 물론이고 전임 대통령들인 프레이와 알레산드리가 전혀 사회나 적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규정한다. 어쨌든 이바카체 신부는 열 번의 강의로 독재자에게 대한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

 

볼라뇨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국가였던 칠레가 군부 독재 아래 야만의 시대로 퇴행하던 시절에 침묵했던 소위 지식인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야만의 시대가 드디어 종식되고 민주화가 도래했을 때, 예의 지식인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업에 복귀했다. 이바카체 신부 역시 가벼운 열병, 광기 혹은 일시적 정신 착란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았던가. 우리와 비슷한 역사의 궤적을 그린 칠레 역사의 실재를 알게 되면서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설 <칠레의 밤>에서 을 의미하며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리아 카날레스의 파티하우스 이야기는 패스한다. 이미 두 번의 리뷰에서 빼놓지 않고 다루기도 했거니와 새로운 해석이 떠오르지 않아서다. 소위 진보 지식인들이 자신들만의 해방구에서 희희낙락하는 가운데, 파티하우스의 지하실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대파에 대한 고문이 실행되었다는 점이 그야말로 초현실적이지 않은가.

 

결말에 등장하는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는 볼라뇨의 선언이 뼈를 때린다. 그 어느 때보다 가짜 뉴스, 정치적 혐오와 선동이 난무하는 시절에 한국에서 문학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뱀다리] 오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벼르던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샀다.

쿠폰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해서 단돈 4,910원

에 득템 !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보니, 두께가 참으로 야만스럽다.


집에 가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가르시아 마데로, 울리세스 리마 그리고 아르투로

벨라노까지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니 반갑다.

읽다말마의 반복을 이번에야 끊어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2-05-09 16: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갖고 있는데 아직 안 읽었네요. 조만간 읽어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5-09 17:37   좋아요 2 | URL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으실
수 있으리라 예상해 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드는 그런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