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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인근 중고서점에 기대하고 있던 책이 매물로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어제는 너무 바빠서 잠시 짬을 내서 책을 사러 갈 겨를이 없었다. 미리보기로 30쪽을 읽었는데, 다음이 궁금해졌다. 이러면 바로 사다가 보던가 해야 하는데. 집에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근처 도서관에 마침 있다고 한다. 오늘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달려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검색해 보니, 넷플릭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프리뷰를 봤는데, 무서워서 아무래도 영화는 못볼 것 같다.
<피버 드림>은 170여쪽 분량의 금세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상대로 바로 다 읽었다. 오후에 점심 먹고 돌아다니다 들어와서 누워서 책을 읽다 보니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나중에 일어나서 완독했다. 끄적이다 보니 책 이야기는 도통 시작하지 않고 나의 일상 타령만 하는 그런 느낌이다. 나의 책읽기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변명해 본다.
도시에 사는 아만다와 그의 딸 니나가 작가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 마을에 휴가차 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메인이다. 응급실에서 화자인 아만다는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녀의 대화 상대는 다비드다. 다비드는 아만다가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카를라의 아들이다. 카를라는 자신의 아들인 다비드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사실 대화체로 구성된 <피버 드림>은 쫓아 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뒤편에 실린 해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날것 그대로 내가 읽은 느낌을 조금 적어보고 싶었다.

요즘 고골의 연작 소설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 왠지 그 결을 같이 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만다가 떠나온 도시라는 공간은 문명이자 빛의 공간이고, 카를라와 그녀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다비드가 사는 시골은 그 반대의 무엇이라고나 할까. 병상의 아만다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다비드는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다비드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다비드가 말하는 벌레의 그 무엇에 중독되어 말이 죽었고, 다비드 역시 6년 전에 비슷한 처지에 처했다가 시골 사람들이 병원 대신 더 선호하는 ‘녹색의 집’에서 이체된 그런 존재다. 이건 판타지 소설인가? 현실은 판타지를 능가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하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코로나 시대와 그에 따른 자발적 억압 등등이 무시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는 최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걸리면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르는 그런 전염병 대유행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판타지스러운 세상은 만나보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피버 드림>은 잠재된 나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한다. 아니 카를라도 어쩌면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영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아르헨티나라는 공간에 무지한 독자로서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그것들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그저 이끌려 간다고나 할까. 슬쩍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는 더더욱 현존하는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버 드림>을 다 읽고 난 뒤의 나의 감상은 잘 모르겠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만난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도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한 수 위라는 느낌이다. 12월의 첫 번째 주말에 나는 그렇게 꾸역꾸역 책을 읽고 있었다. 넷플릭스 영화는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전히 고민 중이다. 무서운 건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