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전에 보다만 영화 <화이트 타이거>를 마저 봤다.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엔딩타이틀을 보니 a film by 어쩌구 하는 걸 보면서 이게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구나 싶었다. 그래서 타이틀도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로 정정했다.

 

여기는 다시 델리다. 오늘 아침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스러운 샘의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읽었는데, 배우는 게 많다. 소설가가 될 걸 아니지만, 소설 소비자로서 무언가 영업 비밀을 하나 깨우친 느낌이랄까. 영화의 화자 발람 할와이에게 드디어 위기가 닥친다.

 

핑키 마담의 벌쓰데이에 술에 잔뜩 취한 마담이 마하라자 분장을 한 발람 대신 굳이 운전을 하겠다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사달을 낸 것이다. 여러분, 절대 음주운전은 하지 마시라! 새벽 두시 경에 노상에 있던 어린아이를 친 것이다. 소위 미국에서 교육받았다는(심지어 핑키 마담은 박사님이시다!) 이들이 정당한 사고 수습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꼼수를 쓴다. 그러니까 뺑소니를 친 것이다. 물론 충성스러운 하인 발람은 앰뷸런스나 경찰을 부르자는 주인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사고 수습에 나선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소식을 들은 고향 락사만다르의 황새 아저씨와 장남 무케시/몽구스가 델리로 상경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동안 막대하던 발람에게 친근 모드를 시전한다. 굳이 발람이 끊었다는 맛있는 빤까지 제공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술서를 하나 들이미는데, 그건 바로 뺑소니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조작된 자술서였다. 락사만다르의 가족들에게는 모두 말을 잘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등등 변호사를 동반한 황새 패밀리의 회유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마스터들에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했는데, 자신은 이제 교통사고를 저지른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전과자가 될 판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막바지로 몰린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발람 할와이의 고뇌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예의 교통사고가 소리 소문 없이 무마되자 동생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친근하게 굴던 마스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다시 차가운 주인 모드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이런 마스터들의 행위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황새 아저씨의 이율배반적 행동에 진저리가 난 핑키 마담은 개판(shit)이라고 외치며 시아버지와 아주버님과 대판 싸운다. 그리고 자고 있는 발람을 깨워 뉴욕으로 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 좋은 NRI(Non-resident Indians) 아쇽은 발람을 구타한다.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구만 그래. 한 번 마스터는 마스터일 뿐이다. 아무리 포장을 한다고 해도, 마스터의 DNA는 바뀌지 않는다는 거다.

 

결국 발람은 힌디 무비의 전형적이라는 어떤 서사를 완성하고, 미스터 아쇽이 노래 부르던 뱅갈로르로 가서 시작한 사업이 대성공을 거둔다.

 

영화 <화이트 타이거>에는 현대 인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대부분의 인도 문학이 다루는 카스트 제도는 오히려 심각한 빈부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오죽했으면 발람이 수탉장(the rooster coop)이 인도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말을 했을까. 법률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고질적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은 인도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요소이다. 그렇다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위 카스트에서 순순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가 없겠지.

 

대놓고 농민들을 착취하는 지주 계급에 돈을 요구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무자비하게 정치 헌금의 상납을 요구하는 이가 위대한 사회주의자의 수하라는 점이 역설적일 뿐이다. 잘못 베팅했다가 낭패를 본 아쇽 일가가 위대한 사회주의자 양반을 만나 100만 루피 제공의사를 전달했더니만, 네 배로 뻥튀기해서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런 정치권에서 작금의 최악으로 치닫는 코로나 사태의 해결을 바라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들은 코로나 사태를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1도 없다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황새로 대표되는 지주 계급은 하인들의 가족들을 볼모로 삼아 수탉장을 공고하게 만든다. 집안의 어르신이자 절대반지를 휘두르는 쿠숨은 발람에게 색시를 보내, 닭장에 가둘 생각만 한다. 미스터 아쇽은 발람의 대체(replacement) 운전사를 찾기 시작한다. 자신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발람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델리에서 그를 시골쥐라고 부르는 하숙집 아저씨(으응?)는 해고는 죽음보다 무서우며, 종착지는 판잣집이나 노숙자 신세라는 말에 발람은 대오각성하기에 이른다.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그를 괴롭히는 가운데 시장에서 만난 걸인 할머니는 집요하게 발람에게 적선을 요구한다. 우와,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뛸 일이다. 내 문제도 감당이 안 되는데, 거지까지!!! 막판에 몰린 발람은 그야말로 버럭쟁이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도 못했던 일을 결행에 나서게 되는 거지.

 

발람은 자신이 뭔 짓을 했을 때의 후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락사만다르에서 보내온 조카 다람을 두고 혼자 튀려고 했으나, 그의 불쌍한 운명 때문인지 어쩐지 다람을 데리고 뱅갈로르로 튄다. 쿠숨 할머니의 편지 한 장을 들고 달랑 상경한 다람에게 다짜고짜 손찌검을 하는 못난 삼촌. 에라이! 그는 뱅갈로르에서 북부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 일가족 17명이 몰살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미 결행 이전의 판타지로 처리된 영상으로 시청자는 잘 알고 있다. 지주들이 파견한 청부업자들은 일가족을 소총까지 동원해서 처리한다. 너무 잔인한 장면들을 무음으로 처리해서 희화화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영화는 소설의 풍부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발람 역을 맡은 아르다시 구라브는 고뇌하는 영혼을 지닌 청년 역을 충실하게 완수했다. 그의 프로필을 뒤져 보니 거의 인도판 아이돌급의 스타였다. 소설에서 발람이 쇠파이프를 시멘트 덩어리에 내리치며 울분을 토로하던 장면이 있었나? 비굴하게 마스터들의 비위를 맞춰 가며 요리사, 발마사지사 그리고 운전사를 오가며 결국에는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는 팔색조 같은 연기를 펼친다. 미스터 아쇽 역의 라지쿠마르 라오 역시 NRI 지식인이면서도 결국에는 미국에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조국에 남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게 결국 자신의 파국을 가져 오긴 했지만. 핑키 마담 역의 프리앙카 초프라는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 건지. NYC 출신 박사님답게 거의 네이티브 뺨치는 실력의 영어를 구사한다. 결국 다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야반도주하는 장면으로 영화에서 아웃.

 

영화 <화이트 타이거>에는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1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도 놀랍지 않은가. 모든 발리우드 영화의 공식 같은 흥겨운 노래와 춤이 등장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영화를 딱 절반으로 갈라 전반부가 빛의 인도를 다뤘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둠의 인도를 그리고 있다. 소설도 만족이었지만, 넷플릭스 영화도 상당한 수작이었다.

 

됐고, 아라빈드 아디가의 다른 책들이 어서 우리나라에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바로 사들일 텐데. 그리고 좀 더 심각한 차원에서 인도 사회를 그린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 같은 작품들도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너무 방대해서 그게 과연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가 하는 일이 아니었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oolcat329 2021-05-07 12: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밤 3분의 2까지 봤어요. 책 속의 문장들 그대로 많이 나오더라구요. 이 영화 추천할수 있는 점이 발리우드 영화 특징인 그 춤과 노래가 안나오는거죠! ㅎㅎ

이 책 읽고 미스트리의 <적절한균형>을 집어들기까진 했는데 , 너무 무거워서 다시 꽂아두었네요. 😅


레삭매냐 2021-05-07 13:08   좋아요 6 | URL
인도 관련 독서가 일천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만난 인도를 다룬
책 중에서 단연 로힌턴 미스트리
의 <적절한 균형>이 최고라고
말씀드리겄습니다.

버겁긴 하지만 완독하시고 나면
정말 뿌듯하시리라고 믿슙니다.

저도 어젯밤에 <화이트 타이거>
좀만 보고 자려다가 결국 엔딩
까지 달리게 되었더라는.

새파랑 2021-05-07 12: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세는 인도 ㅎㅎ 재미있을거 같아요 ㅋ 저도 책으로 먼저 읽고 영화를 찾아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5-07 13:09   좋아요 4 | URL
인도 출신 작가들의 영어 쓰기
능력이 출중하야, 세계화에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월등한 것
같습니다.

인도 작가들이 좀 더 많이 소개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입니다.

얄라알라북사랑 2021-05-07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발리우드 영화를 제대로 본 건 없지만, 춤과 노래 화려한 의상을 빼고는 상상할 수 없던데 <화이트 타이거>는 보다 사회비판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인가요?
˝수탉장(the rooster coop)이 인도 최고의 발명품˝ 읽고도 바로 감이 오지는 않았어요. 실리콘벨리에서 대체육으로 주가를 올리는 분이 인도의 닭장을 보고 깨달으을 얻었다고 했던 에피소드는 얼핏 떠오르지만 그런 의미는 아닌듯^^;; 저도 더 찾으며 덕분에 공부해보아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5-07 15:55   좋아요 2 | URL
dark side of India
라고나 할까요?

발리우드가 춤과 노래로 인도의 비참한
현실을 감추었다면, <화이트 타이거>
는 날것 그대로의 인도를 생생하게 전
달합니다.

아, 주인공 발람이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바지를 내리고 길똥을 시전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웃기면서도 참 슬프더라는.

‘수탉장‘은 영화나 책을 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답니다. 더 디테일하게 까면
스포일러로 욕을 먹을 수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