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너튜브 방송의 컨텐츠 크리에이터가 추천하는 아민 말루프 작가의 <레옹 아프리카누스>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됐다. 역사소설가로 일가를 이룬 아민 말루프의 데뷔작이었다. 그리고 그가 실존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들을 자신의 종특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어젯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레옹 아프리카누스는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니 놀랍군 그래.

 

무슬림이 지배하던 알안달루스의 그라나다(가르나타)에서 태어난 레옹 아프리카누스의 본명은 알하산 이븐 모함메드 알웨자즈 알파시였다. 옴마 길기도 하여라. 카스티야 왕국의 레콩키스타 운동으로 알안달루스 전역이 에스파냐 가톨릭 세력의 수중에 넘어갈 즈음,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한 종교의 자유 보장이 순전히 구라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모조리 알안달루스 탈출에 나선다. 정복자들이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그들은 미처 몰랐단 말인가.

 

알와잔 가문의 망명지는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파스였다. 누구에게나 나고 자란 조상의 땅에서 생면부지의 곳으로 이주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치하에서 사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더 문제가 아니었을까. 유대인 개종자들인 마라노나 무어인 개종자들이었던 모리스코에 대한 에스파냐 가톨릭 원리주의자들의 차별과 박해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파스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알하산 알와잔(레옹 아프리카누스)은 그곳의 마드라사에서 수학하면서 다양한 학문을 배운다. 와타스 왕가의 외교관이 된 숙부를 따라, 사하라 이남의 송하이 왕국의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훗날 그가 펴내게 되는 <아프리카 우주지리지>의 유용한 정보가 되지 않았을까. 그전에 유년 시절에는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아르메니아 그리고 타타르 사람들이 사는 중앙아시아까지 여행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 부분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송하이 왕국 사절단행을 경험한 뒤, 탄력을 받은 알하산은 소금장수, 대추야자장수로 변신해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누비는 여행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상은 내가 어제 알게 된 내털리 데이비스의 저술 <책략가의 여행>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레옹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책은 아민 말루프의 저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너무 읽고 싶은 그 소설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미시사의 대가인 내털리 데이비스는 몇 개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그간 레옹 아프리카누스 연구의 집대성을 시도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서론에 아민 말루프의 역작 <레옹 아프리카누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술탄의 군인, 정보원, 밀사, 관리이자 사절로 활동하던 레옹 아프리카누스는 1518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튀니스로 귀환하던 중 시칠리아 해적에게 포로로 잡혀,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산탄젤로 성에 투옥되었다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노예로 진상되었다고 한다. 정말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아닌가.

 

2년 뒤인 1520년에는 기독교로 (강제)개종하고, 조반니 레오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레오 아프리카노라는 별명으로 불린 모양이다. 별명에 세례명에 정말 다양하기도 하여라. 프랑스식으로 장 레옹 라프리켕이라고 하던가. 프랑스사 미시사 전문가인 내털리 여사는 그를 장 레옹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9년 동안의 이탈리아 거주 기간 동안, 장 레옹은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창작활동은 기본이고, 라틴-히브루-아랍어 사전 편찬은 물론이고 로마의 고관들을 대상으로 아랍어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다수의 번역을 작업도 한 모양이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군대의 로마 약탈(Sacco di Roma) 사건이 벌어진 후, 장 레옹은 튀니스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550년에 발표된 <아프리카 우주지리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유럽인들에게는 미지의 대륙이었던 아프리카를 알려준 책이라고 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과연 장 레옹이 소개된 여행지에 갔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작가 아민 말루프는 바로 이 장 레옹을 주인공으로 삼은 걸작 소설 <레옹 아프리카누스>를 자신의 데뷔작으로 창조해냈다. 역사의 빈 공간이 많은 만큼, 역사소설을 장기로 삼는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그런 소재가 아니었을까. 사실 내털리 데이비스의 <책략가의 여행>도 소설에 가깝다는 평이 있다. 과거를 입증하는 사료나 유물을 중시하는 실증사학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서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저런 기사와 서평(<책략가의 여행>)을 만나다 보니 다음의 질문들이 떠올랐다. 장 레옹이 만약 뛰어난 학식과 경험이 없었다면 가톨릭 세계였던 이탈리아 로마에서 그렇게 환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무슬림 노예로 생을 마치게 되었을 것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양서조라는 이미지를 내털리 데이비스는 제시했는데, 원제에 등장하는 Trickster 라는 표현에는 야바위꾼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더라. 30년 이상 무슬림으로 살아온 남자가 순간의 협박에 못 이겨 기독교도로 개종했다는 걸 믿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장 레옹은 왜 아프리카 튀니스에 가서는 이탈리아 시절만한 왕성한 창조적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점들이 의문이다.

 


보신의 달인인 책략가(라고 쓰고 다른 말로는 야바위꾼?)답게 장 레옹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거나 혹은 침묵이라는 전략을 구사한다. 아마 그것은 타의에 의해 서로 적대적 진영인 기독교의 세계와 무슬림 세계를 넘나들어야 했던 자신의 숙명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16세기 기독교 문명과 무슬림 문명이 강력하게 충돌하던 시기에 두 세계를 왔다리 갔다리 하며 일신의 영달을 구하던 야바위꾼 같은 사나이의 삶에 나는 매료되었다. 선택적 역사 해석이 넘실거리는 우리 시대에, 거시사니 미시사니 하는 논쟁의 빈 틈을 문학이 열심히 메꾸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금 해봤다. 아민 말루프 선생은 과연 자신의 데뷔 소설에서 장 레옹의 이 기구한 운명을 어떻게 취사선택해서 요리하셨는지 너무 궁금하다. 아무래도 북디파지토리에 10% 할인 쿠폰이 뜨면 이 책의 영문판을 하나 주문해야지 싶다. 설사 완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소장각으로라도 만족하고 싶다는 마음에. 참고로 내가 사랑하는 작가 고 루이스 세풀베다는 이 책을 자신이 무인도에 가져 가고 싶은 세 권의 책 중의 하나로 꼽으셨다고.

 

[뱀다리] 속설에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주인공이 장 레옹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좀 웃기는 게, 아민 말루프의 <레옹 아프리카누스>로 출발해서 좀 엄하게 돌아왔다.

구글북을 검색해 보니 영문판 장 레옹에 대한 소설이 아주 친절하게도 소개된다.

 

1: 그라나다 / 에피소드 6

2: 파스 / 에피소드 19

3: 카이로 / 에피소드 6

4: 로마 / 에피소드 9

 

4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전기에는 그라나다에서 태어나고 곧 파즈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에피소드가 6개나 되네. 역시 메인은 파스 시절인가 보다.

 

아민 말루프는 완벽하게 주인공 장 레옹에 빙의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첫 번째 챕터를 지금 거북이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한글이라면 정말 금방 다 읽을 텐데... 어렵군 어려워.

 

다시 한 번 세상에는 내 인식의 세계를 벗어난 사실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레옹 아프리카누스의 삶을 추적하면서 알게 됐다. 세상은 여전히 넓고, 내가 모르는 것들은 부지기수이며 못 읽은 책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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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20 11: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라비안 나이트도 잘 모르는데 이 글은 이따 저녁에 집중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레삭님 글 읽으면 늘 성경 이 구절이 떠오르네요.
구하라 주실것이요...☺

Falstaff 2021-04-20 12:14   좋아요 5 | URL
굳이 아라비안 나이트 읽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거 완독하고 얻은 게 딱 하나, 알라딘이 글쎄 중국 서부의 회교지역에 살던 인물이었답니다. 아이고야.....

coolcat329 2021-04-20 14:11   좋아요 3 | URL
정말루요?! ㅋㅋㅋㅋㅋ 아 매우 쇼킹한 정보에요~~

Falstaff 2021-04-20 14:18   좋아요 3 | URL
아 글쎄 삽화에는 청나라 변발까지 했더라니까요.
알.라.딘이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4-20 14:21   좋아요 3 | URL
헉!🤣🤣🤣🤣🤣🤣 변발이라뇨?! 세상에 ㅋㅋ 아 폴스타프님! 지금 입 틀어막고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레삭매냐 2021-04-20 17:59   좋아요 3 | URL
일단 구하긴 했는데 영어책이라
진도가 겁나 느리네요...

300쪽이 넘어가는 데 이걸 언제 다
읽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NYT
리뷰로 만족해야 어쩌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