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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결국 한 번 산 책을 언제고 다시 읽게 된다. 팔거나 누구에게 주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신축년 설날에는 그런 책 두 권을 만났다. 하나는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의 재창종한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이다. 두 책 모두 그래픽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좌파 지식인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가 조국으로 선택한 사회주의 동독에서도 수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 브레히트의 존재감이 아마 신생 동독 정부 입장에선 그야말로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선 독일 패망의 단초를 제공한 아돌프 히틀러와 그 일당에 대해 신랄한 4행시로 응수하다. 제3제국의 총통은 물론이고,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자 제국의 2인자였던 괴링을 ‘도살광대’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그에 버금가는 악당으로 프로파간다의 명수 선전상 괴벨스도 마찬가지다. 나치스의 핵심이었던 이 세 명 모두 자신들이 인류에 저지른 죄악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자살이라는 간악한 방식으로 피해 나갔다. 사진 28에 등장하는 세 악당들의 종말은 정말 말 그대로 바그너적이었다.
히틀러가 자랑하는 다섯 명의 원수들과 기갑총감 하인츠 구데리안의 사진은 또 어떤가. 페도르 폰 보크, 후고 슈페를레, 칼 폰 룬트슈테트, 에르빈 롬멜, 지그문트 리스트와 하인츠 구데리안이 30번 사진에 등장한다. 전후 조작되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 같은 전쟁범죄와는 상관 없이 오직 명령에 따라 전투에만 충실했다는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들은 히틀러의 수하로, 총통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각처에서 발생한 전쟁범죄는 부수적인 피해가 아닌, 처음부터 계획된 플랜이었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독설이 담긴 4행시로 이들을 ‘여섯 명의 살인자들’이라고 간단하게 박제해 버렸다. 대단한 패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히틀러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서방 세계 지도자들에서는 어떨까? 좌파 지식인의 날선 비판은 독일을 꺾은 제국주의자 처칠마저도 저격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링컨이 연방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라면 노예제 존속도 고려했던 것처럼, 몰락해 가는 대영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히틀러에 이은 숙적 스탈린과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유럽을 스탈린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준 장본인이 처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집불통 몽고메리가 주창한 마켓가든 작전으로 종전이 길어진 것은 누구 탓을 하리오.
히틀러의 전쟁 기도가 완전히 분쇄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남은 독일군 병사들의 초췌한 모습에서 세계대전 초기, 서방에 ‘블리츠크리크(전격전)’로 알려진 질풍노도 같이 폴란드와 프랑스를 석권한 무패신화의 베어마흐트의 위풍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전 해인 1941년 12월, 적도 모스크바가 독일군의 침공으로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소련의 모든 인민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소련군의 매서운 반격으로 독일 전쟁기계들은 첫 패배를 기록했고 400KM나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독일군 170개 사단이 동원되어의 소련의 철과 밀 그리고 석유를 빼앗아 독일 민족의 새로운 레벤스라움을 세우겠다는 총통의 망상은 그렇게 소멸되어 갔다.
철저한 약탈 전쟁답게 소련 점령지의 독일군들은 소련 민중들을 수탈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소련 아낙에게서 말을 징발하는 장면의 사진을 들여다 보라. 독소전쟁에서 독일군 보급부대는 차량이 아닌 말의 수송력에 의존했다. 그러니 피점령지에서 말을 징발하는 일은 전장에 나간 동료들의 보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광활한 농토를 일구기 위해서 소련 농부들도 밭을 갈 말이 필요했다. 말을 뺏긴 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있나.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독일 점령군에게 환멸을 느낀 러시아 농부들은 곧 빨치산으로 변신해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하게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사진처럼 보이지만,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이런 다양한 사례들을 유추해 내는 것이 브레히트가 독자들에게 주문한 게 아닐까 싶다.
부록인가 해설에 실린 전쟁 후,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유입된 식품에 대한 설명도 짠했다. 수년 간의 전쟁으로 당장 먹을 게 없어진 서유럽 각국들은 미국의 과잉생산된 식품들의 소비처로 전락하게 된다. 먹고사니즘의 으뜸은 바로 먹거리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때부터 미국의 카길 같은 다국적 식품회사들의 다른 차원의 세계 정복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미국에서 실시한 원조 프로그램 덕분으로 카길은 실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13번 사진의 주인공은 리온 포이히트방어다.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포이히트방어는 프랑스 정부의 모든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감금되어야 한다는 명령에 의해 님므의 수용소에 갇혔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아내 마르타와 함께 마르세이유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다. 그가 만약 수용소에서 죽었더라면 우리에게 소개된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같은 작품도 없었으리라. 그가 저술한 프랑스에서 수용소 생활을 다룬 <프랑스의 악마>라는 책도 있다고 하던데, 그 책 역시 궁금하다.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진은 아무래도 89번의 수용소에서 죽은 이들의 신발 사진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브레히트가 열심히 달던 4행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로 받아 들이라는 말일 것이다.
진짜 오랜 만에 다시 만난 책이었는데 감동의 여진은 여전했다. 뭐 그랬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