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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홋타 요시에 지음, 박현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평점 :

중고로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중고로 사려고 하던 홋타 요시에의 <시간>을 결국 적립금의 유혹에 빠져 지난 주말에 주문했다. 그리고 퇴근해 보니 어제 꽁꽁 언 채로 집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내 손의 온기로 책을 녹여 가며 첫 장을 펼쳤다. 원래는 오에 겐산로 선생의 <만엔원년의 풋볼>을 읽기 시작하는 게 나의 계획이었는데. 어디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던가. 피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1937년 가을의 난징이라는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937년 11월 30일부터 해군 문관 천잉디가 쓴 전쟁 일기가 시작된다. 같은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촉발된 중일전쟁의 불길은 상하이와 쑤저우를 거쳐 장난[江南]의 중심이자 중국 제2의 도시라는 난징으로 불이 옮겨 붙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반 장제스가 버티고 있는 난징의 상징성 때문에라도 난징을 꼭 점령해야만 했다.
이미 돈과 빽이 있는 이들은 일본군이 몰려들기 전에 한커우로 도망갔다. 일본 유학까지 마친 사법부 판사 천씨 집안의 장남인 잉창은 후일을 동생 잉디에게 맡기고 한커우로 튀어 버렸다. 적의 가공할 대공세를 앞두고 지도자들이 튀는 모습은 망국의 징조 같은 게 아니었을까? 형은 동생을 사지에 두고 도망가면서도, 집안의 재산을 지키고 기회를 봐서 투기하라는 조언도 아까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배신자, 한간이 될 거라고 잉디는 생각했던가.
이웃집의 젊은 소좌가 연못을 파내고, 가물치를 잡는 장면을 보면서 잉디는 난징이라는 성 안에 갇힌 자신들의 신세가 그 가물치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잉디는 Naval Company 소속의 문관이라기 보다, 차라리 서정 시인에 가까운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런 인물로 묘사된다.
다가오는 조국과 가족의 멸망을 앞둔 이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모양이다. 다섯 살배기 아들 잉우는 빨간 단풍잎이 예쁘다고 아빠에게 말한다. 1870-71년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 군에게 포위당한 파리 시민들도 조국의 패전을 앞두고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하지 않던가. 잉디의 아내 모처우는 산달에 접어들었다. 어쩌면 그 사실이 잉디가 제 때 피란에 나서지 못한 결정적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웃 쑤저우의 이름난 도예가 집안의 영애이자 사촌여동생인 양양도 잉디 가족에 합류한다. 그녀는 쑤저우를 점령한 일본군들의 난폭함을 전한다. 위생부에서 일하는 잉디의 백부도 부지런히 불길한 소식들을 퍼 나른다. 조변석개하는 백부도 한간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잉디는 판단한다.
1937년 겨울 난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불안하기만 했다. 결국 전쟁이 몰고 온 폭풍은 천잉디의 가족의 평안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난징이 함락되고, 6개월이 지나 일본 정보장교 기리오 중위의 하인이 된 천잉디는 다시 전쟁 일기를 재개한다. 그의 기록은 비극의 재현이다. 자신도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주변에는 아내 모처우도, 아들 잉우도 그리고 여동생 양양도 없다.
1955년 소설 <시간>이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소설을 쓴 홋타 요시에가 일본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이 많은데, 전쟁이 끝난 지 10년 만에 이렇게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소설을 발표한 홋타 요시에 작가의 의기에 감탄했다.
저자가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난징은 남방의 중심인 동시에 대전란의 피해를 극심하게 입은 곳이기도 했다. 난징사건이 벌어지기 정확하게 73년 전,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천경(난징)을 함락한 청조의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은 태평천국군을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이 난징에 들어왔을 때, 천씨 집안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훙위는 노인들에게 들은 태평천국 시절의 비극을 떠올릴 정도였다. 상하이와 쑤저우 전투에서 중국 국민당군의 맹렬한 저항에 직면한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이자 특별시였던 난징을 함락시키면서 그야말로 독기가 오른 상태였다. 주석 장제스는 난징을 포기하고 결사항전을 외치면서 한커우로 후퇴했다. 기존의 인구에 전란을 피해 난징으로 들어온 피란민까지 더해진 상태에서 난징은 이렇다 할 시가전도 치르지 않은 채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뒤, 3주간의 지옥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난징 공략 초기, 천잉디는 난징이 일본군에게 빼앗기더라도 결국 다시 해방될 거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일본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부 출신 군인들이 상관들에게 모욕을 받는 일상에 대해서도 저자는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한다. 그들이 주창하는 대동아공영권이 얼마나 삿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국 그들이 원하는 세계정복 욕망은 파멸과 고립이라는 알레고리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홋타 요시에는 적확하게 짚어낸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잃고 상실에 빠진 주인공 천잉디가 살아남아 기리노 중위의 하인 행세를 하며, 레지스탕스 활동에 나서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예전에 배운 인식론이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어찌나 명징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결국 인간은 불행과 시련의 끝에서 삶과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된다는 것일까. 아, 그리고 보니 천잉디는 이십대 시절에 피 끓는 가슴으로 혁명에 투신했던 청년이었다. 그는 장제스가 1927년 4월 12일 그동안 협력했던 노동자들과 청년들을 숙청한 반동 쿠데타로 혁명에 회의를 느끼고 인도와 구라파를 떠돌았다지. 10년 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번에는 외세에 의한 그것으로 바뀌었을 뿐인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양양이 회복되면 항일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설정도 이해가 된다. 아마 누구라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화가 지망생이자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는 K의 에피소드도 주목할 만하다. 한간으로 변신한 잉디의 백부처럼,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적에게 부역하는 건 물론이다. 상황이 이러니 잉디의 부인 모처우가 이런 아수라장 같은 지상 세계를 버리고 자진하겠다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을 읽으면서, 심신이 피로해졌다. 과거사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사과가 담기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소설을 구상할 수 없었으리라.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과 타의에 의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갈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넘어, 구원의 문제에까지 도달한 문학적 성취에 책 읽는 동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덜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홋타 요시에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도 만나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