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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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망치 소리와 수시로 구슬프게 짖어대는 멍멍이 울음소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또 그전에 살던 집에서 밤 11시만 되면 시작되던 진공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그들은 왜 그 시간에 항상 청소를 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모자간의 다툼 소리에 비하면 양반이지 싶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듯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가 보다. 그 시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도, 생활소음이 거슬린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2019년 여름, 처음으로 아파트 거주 가구 비율이 50%를 돌파했다. 그만큼 아파트는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주거 환경이라는 방증일 게다. 그런데 아파트라는 공동 주거 형태가 과연 모두에게 이로운 것일까? 아파트 주거는 살아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내가 이웃을 고를 수는 없지 않은가.

 

정소현 작가의 <가해자들>은 바로 그런 오늘날 이상적 주거 형태로 꼽히는 아파트에서 소음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을 정밀하게 타격한다. 소리와 냄새만 없다면, 이웃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이웃의 저녁 메뉴가 자반 고등어인지 구수한 청국장인지 달달한 불고기전골인지 후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해치는 요소가 냄새보다 소리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냄새는 대개의 경우 끼니 때를 전후해서 발생하고 소멸하지만, 생활소음으로 알려진 사운드는 그렇지 않다.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조용한 나만의 시간에 발망치로 찧듯 쿵쿵 거리며 거실을 돌아다니는 소리, 화장실에서 변기물 내리는 소리,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들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소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정소현 작가는 정말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리얼하게 재현해낸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듯 소설의 1111호 윤서 엄마도 마찬가지다. 아이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 했던 주인공은 자신의 아이를 낳은 뒤 수년 뒤에 산후풍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그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소머즈 같은 청각의 소유자로 변신한다. 다른 이들은 무심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그런 생활소음들이 그녀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소리의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네 이웃과 전쟁에 나설 것인가. 주인공의 선택은 후자였다.

 

이것은 단지 성격상의 예민함이 문제가 아닌 심리치료가 필요한 영역의 문제였다.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상처 받은 자신의 내면세계는 끓어 오르는 투쟁의 대상을 이웃의 타자로 삼았고,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1211호 아줌마는 자신의 눈앞에서 토악질을 하며 뒹구는 윤서 엄마의 증상을 시어머니 알레르기라고 진단한다.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의 본질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상호간의 불신에서 비롯된 혐오가 아니었을까. 이후 첨예하게 벌어지는 대결 구조에서 이웃 간의 보일만한 양보의 미덕은 점점 침몰의 수순을 밟는다.

 

인내와 양보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강력한 우퍼와 브릿니 스피어즈의 히트곡 <TOXIC> 환청이었다. 이웃을 징벌하기 위한 미영 씨(윤서 엄마)의 노력은 대단했다. 천정에 우퍼를 달 정도라니. 아니 그건 광기라고 봐야 할까? 실제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홈파티 열기를 좋아하던 내 친구의 아랫집에 살던 부부는 파티가 벌어질 때마다 빗자루인지 장대를 가지고 따라 다니면서 천정을 쿵쿵대면서 치곤 했다고 한다. 나도 그 파티의 일원이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렇다, 그런 식으로 나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것이다.

 

억압받은 한 영혼이 폭발시킨 광기의 전염성을 대단했다. 전선은 위층 아래층 그리고 심지어 옆집 가리지 않고 마구 퍼져나갔다. 중재에 나선 관리소장 아저씨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이해와 타협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공간을 파국이 채우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만 어떤 형태로 오는가가 관건일 뿐.

 

정소현 작가의 <가해자들>을 스피디하게 다 읽고 나서, 성경에도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나도 시시각각 변하고 회의하는 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힘든 마당에, 타자인 이웃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묻게 된다. 소설 <가해자들>은 아파트 거주란 공동 거주 양식이 모든 이들의 선망이 되었지만, 내가 아닌 타인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다. 소시민적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얄궂은 경계선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싶기도 하다.

 

이웃의 멍멍이 울음소리에 대해서는 다른 주민이 엘리베이터 거울에 멍멍이 울음소리로 다른 이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취지의 노란색 포스트잇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 뒤, 멍멍이 주인이 멍멍이가 피부병에 걸려 약을 복용 중인데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 자주 흥분하고, 분리불안 증세를 겪고 있다는 사연을 덧붙이며 양해를 구하고 아파트 주민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마침 <가해자들>을 읽고 나서인지 어쩐지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리고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을 멍멍이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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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26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층간소음이라면 저도 할 말 많은 사람이지만요 ㅎㅎㅎㅎ 이 책은 정말 우리의 일상의 가장 가까운 일을 그리고 있네요. 그저께 신간도서칸에서 봤던 책인데 제목이 눈길을 끌어 자세히 보다가 권수 때문에 탈락했거든요. 아쉽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0-11-26 09:07   좋아요 0 | URL
가비얍게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고런 책이었답니다.

요즘 층간소음에 시달려서 그런
진 몰라도 더더욱 와 닿더군요.
역으로 제가 누군가에게 가해자
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