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풍경
쟝 모르.존 버거 지음, 박유안 옮김 / 바람구두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주로 한 놈만 팬다. 어느 한 작가가 꽂히면 일단 그 작가의 책들부터 수집한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다. 최근에 독일 출신 작가 율리 체가 그랬다. 그나마 율리 체는 번역서가 네 권이어서 다행이지. 로맹 가리나 이언 매큐언 같은 작가들의 경우에는 책이 끝없이 나온다. 그래서 전작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존 버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고책방에서 왜 그렇게 존 버저의 책들은 만나기가 쉽지 않은지. 지난 여름에 존 버저의 이름을 보고 산 <세상 끝의 풍경>도 그랬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건 존 버저의 책이 아니라, 그의 문학적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사진가 쟝 모르의 책이 아닌가. 뭐 그래도 상관없다. 책이 인도하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정도(正道)만은 아닐 테니까.

 

사진가인 쟝 모르는 세상의 인정을 받았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그에게 일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말라리아 퇴치사업을 벌이는 동부 유럽 루마니아(루마니아에도 말라리아가 발생하는지 처음 알았다)를 비롯해서 산디니스타의 초대를 받아 지배하던 니카라과의 마나과 그리고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는 북한에도 가본 모양이다.

 

스위스 국적인 쟝 모르는 뜨거웠던 동서냉전 시대에 비교적 자유롭게 사회주의 진영에도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쟝 모르는 언론인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나라들이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하는 사진가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기껏 촬영한 필름들을 모두 뺏기고(그 시절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초대 받아 방문한 북한에서도 공화국의 후진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당국의 사전검열로 대부분의 사진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나 역시 잔뜩 기대하고 북한 편을 보았지만 달랑 두 컷이 전부였지 싶다.

 

여전히 세상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서방 언론들은 그런 순치된 이미지들을 자신들의 신문 지상에 싣고 싶지 않았으리라. 자신들보다 못한 후진 나라들의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원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양심적인 사진작가인 쟝 모르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를 방문하면서 사람이 끄는 인력거인 릭샤가 주는 매력과 호사에 빠지기도 하지만, 앞에서 전력을 다해 인력거를 끄는 노동자의 등줄기에 나는 땀을 보고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런 쟝 모르의 인간적인 점들이 너무 좋았다.

 

어디선가 보았는데 사람들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도 한때 사진을 찍어 보았지만, 좋은 사진을 건지기 위해서는 관찰과 아무런 의미 없이 셔터를 누르는 그런 행위가 필요하다. 물론 예전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필름이며 현상 그리고 인화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셔터를 누를 때 초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도래한 디지털 카메라 시절에는 필름 카메라 시절만큼의 자본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이제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도 저물로 휴대폰 카메라 시절이 도래한 걸 잊었다. 쟝 모르의 책 <세상 끝의 풍경>과 만나면서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도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 그리고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사진가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연의 작동이 더 크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내가 쟝 모르처럼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제법 많은 사진을 찍다 보니 내가 의도해서 찍은 사진보다 우연히 얻어 걸린 사진들이 더 마음에 든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의 삶도 그렇지만, 우연도 내가 통제할 수 있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사진찍기와 삶은 상당히 닮은 부분이 많구나 싶다.

 

책을 읽느라 그동안 사진찍기를 멀리 했었는데 오늘은 간만에 집에서 책사진이나 찍는데 쓰는 카메라를 집어 들고, 우연을 만나고 이미지를 포착하러 출사나 나가볼까 싶다. 나에게 이런 삶의 작은 동기를 부여해 준 쟝 모르 선생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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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10-25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의 깊이 있는 독서를 보면 많이 부럽습니다. 저는 진득하게 그처럼 한 작가, 한 분야를 읽지를 못합니다... ㅜㅜ 화창한 가을 날 즐거운 독서 되세요! ^^:)

레삭매냐 2020-10-25 09:16   좋아요 1 | URL
부끄럽습니다 -

오히려 제가 겨울호랑이님의 광범위한
독서력에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요.

<스페인 내전> 포스팅을 보고 나서
많은 독서의 자극을 받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참으로.

겨울호랑이 2020-10-25 09:34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괜히 쑥스럽습니다. 레삭매냐님 좋은 가을날 되세요! ^^:)

비연 2020-10-25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주로 한 놈만 팬다. 어느 한 작가가 꽂히면 일단 그 작가의 책들부터 수집한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저랑 완전 같다는 것에 감동^^

번역 많이 되어 나온 작가도 고민이지만, 너무 안 나온 작가도 가끔 고민이에요. 원서를 읽으려고 했더니 영어가 아닌 경우도 있고. 그저 턱 괴고 기다려야 하니.

레삭매냐 2020-10-25 20:14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 한놈만팬다 중의 한 명인
설터 작가의 책을 읽고 있는데...

30-35권 정도의 책을 소장하라고 하네요.
하 - 공감하면서도 세상에 참 어려운 일
이지 싶네요.

너무 많아도 걱정, 너무 없어도 걱정~
이놈의 걱정하다가 가게 생겼습니다 :>

han22598 2020-10-25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찍으시는 레삭님! 멋지시네요 :)

레삭매냐 2020-10-25 20:18   좋아요 0 | URL
예전에 필카 시절에는 참 사진
열심히 찍었었는데...

디카 시절로 넘어 오면서부터는
확실히 더 사진을 찍지 않게 되
었네요.

오늘도 디카 메고 나가려고 했으나
귀찮니즘으로 결국 포기했네요 -
사진은 무엇보다 열정이 중요하다는.

근데 디카 에라에는 관리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