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율리 체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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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 꽂히면 무조건 모두 다 읽는다주의다. 그래서 일단 <새해>로 출발한 율리 체 작가의 여정은 그의 책사재기부터 시작했다. 일단 살 수 있는 책들인 <어떤 소송><잠수 한계 시간> 그리고 절판책인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을 차례로 사들였다. 일단 사들이고 책 읽는 건 뒷전이다. 지난 주말을 끼고 세 권의 책들을 다 읽었다. 법학 박사님이 구사하는 서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인생을 모두 규정하게 된 법학의 세계에까지 아우르는 그런 서사가 말이다.

 

소설 <새해>의 주인공은 독일 괴팅겐에 사는 헤닝과 테레자다. 그들은 요나스와 비비를 데리고 연말 연휴를 보내기 위해 아프리카 해안 근처의 카나리아 군도의 란사로테 섬을 찾는다. 프리랜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헤닝은 아내 테레자를 대신해서 전업주부를 자처한다. 아이도 보고, 시장에서 장을 봐다가 식사 준비도 했던가. 자고로 집에서 경제권이 있는 사람이 가사노동을 덜 하는가 보다. 부부간의 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란사로테 여행을 왔다고 해서 육아로부터 해방된 건 절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는 법이다. 그나마 출근이라도 하면, 일 핑계를 대고 짬짬이 휴식의 시간을 갖기라도 하지. 아직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는 휴가는 육아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율리 체 작가는 예리하게 그 점을 짚어낸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 작가 대단한데. 이 정도의 리얼리티가 아니라면 내가 꽂히기도 않았을래나.

 

헤닝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손아래 동생인 루나다. 제법 나이가 들었음에도 변변한 직장이나 거주지도 없이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 스타일의 캐릭터다. 헤닝 남매에게는 트라우마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 베르너가 루나가 두 살 때 그들의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엄마 울라는 싱글맘으로 남매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이제 자신이 가장이 된 헤닝은 엄마에게 그런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헤닝이 가진 고민 중의 하나는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무 때나 제멋대로 그를 수시로 습격해 오는 그것이라는 이름의 발작증세. 아내 테레자는 처음에는 그런 그의 증상을 이해래 주려고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란사로테 휴가 중에 헤닝이 그것과 마주하게 되자, 테레자는 남편에게 남자답게 굴고 자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라고 꾸짖는다. 이런 압박이 헤닝의 노이로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라스 올라스 호텔에서 아내 테레자와 춤춘 프랑스 놈팽이도 심히 거슬린다.

 

아무런 준비 없이 자전거 하나만 타고 하이킹에 나선 헤닝은 섬을 도는 짧은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다. 그의 건장한 육신은 쉴 새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사방에서 들이대는 자동차를 피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했고,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했다. 수분부족과 에너지 고갈 때문에 탈수와 저혈당 증세로 쓰러질 뻔한 헤닝은 페메스 마을의 한 집에 사는 친절한 독일 여성 리자에게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의식세계에 잠자고 있던 트라우마의 원형이 되는 과거의 사건이 플래시백으로 이어진다.

 

소설의 전반부가 주인공 헤닝의 현재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수시 때때로 그것의 습격에 시달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플래시백이다. 그런데 헤닝과 루나 가족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란사로테에 휴가를 즐기러 왔던 헤닝 가족이 왜 풍비박산이 나는지에 대한 과정을 다룬 디테일 때문이었다. 아니면 견고해 보이던 가정이 외부에서 날아온 작은충격으로 파국에 이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까.

 

그것의 습격에 시달리던 헤닝이 테레자로부터 오지도 않은 결별 선언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 때문에 패닉 상황에 빠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완벽해 보이는 삶을 압박해오는 그것의 습격은 자신이 어려서 경험한 유기에 관한 악몽 때문이었다. 물론 율리 체 작가는 사전에 두툼한 떡밥을 투척해둔다. 리자는 오래전에 초주검이 된 어린 남매 사건을 슬쩍 흘린다. 헤닝 주연의 모노드라마 같은 상황극이라고 해야 할까.

 

독자는 왜 그렇게 헤닝이 작가의 삶을 동경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루나와 강력한 유대감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소설 후반의 서사로부터 알게 된다. 어떤 경험들은 강력하게 평생을 가는 법이다. 테레자와 요나스 그리고 비비로 구성된 완벽해 보이는 헤닝의 가정에 루나의 존재는 에일리언 같은 불청객이자 이방인일 뿐이다. 동시에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철부지 같은 여동생에 대한 헤닝이 지닌 책임감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헤닝은 루나와의 관계를 보다 명징하게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테레자가 헤닝에게 외친 남자다워지라는 말은 어쩌면 동생 앞에만 서면 우유부단해지는 남편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살면서 대면하게 되는 고민과 갈등의 상당 부분에 대해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백만 가지 이유들 때문에 뭘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액션을 취하지 못할 뿐이다. 실천에 앞선 어떤 계기가 필요할 뿐. 그렇게 개인적 트라우마를 딛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을 극복한 헤닝의 훈훈한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렇지 않은가.


[뱀다리] 리뷰를 날림으로 다 쓰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율리 체 작가는 시간의 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처음에 만난 <형사 실프>에서도 평행 우주는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는데, 시간이란 요소는 율리 체 작가의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다.

 

<새해>에서도 과거로 계속해서 바뀌는 현재와 가까운 과거로부터 출발해서 아주 오래전 과거의 시간으로 양분되는 내러티브로 독자의 사유를 흡입한다. 현재의 시간을 구성하는 고통과 불안의 원인과 그것의 습격 그리고 헤닝이 느끼는 노이로제들은 모두가 과거로부터 온 청구서다. 어쩌면 헤닝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방어기제를 가동해서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인 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제약 없이 현재에서 출발해서 과거를 무시로 오가는 설정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특권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율리 체 작가는 그런 불연속적인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이고.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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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0-12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저랑 비슷한 스타일이네요 ㅋㅋ 한놈만 팬다 ㅎㅎㅎ 덕분에 알지 알게된 율리님의 책들 바구니에 넣어둘게요 ㅋㅋ

레삭매냐 2020-10-13 09:01   좋아요 0 | URL
율리 체 작가의 국내 번역서 네번 째
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소송>... 법학 박사님의 전문
가다운 풍모가 풍기는 책으로 일단
율리 체의 여정은 잠시 쉬게 될 것
같네요. 한놈패기가 더 이어져야
하는데 아쉽네요.

구름물고기 2020-10-13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글도 잘 참았는데 휴~아..사버렸다~읽고 싶어지는 글!!감사해요

레삭매냐 2020-10-13 09:20   좋아요 0 | URL
리뷰어에게는 최고의 상찬입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서 책을 (사서)
읽으신다면 그보다 더 한 영광이
어딨겠습니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