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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였던 그림자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세풀베다 다시 읽기 프로젝트 No. 6]
집의 서가에서 세풀베다 작가의 책들을 하나둘 찾는 중이다. 경장편, 동화, 기행 산문 그리고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종합선물 세트를 받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예전에 읽은 책들은 읽은 책대로 또 미처 만나 보지 못한 책들은 그런 대로 꾸역꾸역 읽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 좋다는 그런 결론이다.
우선 표지에 대해서 말해 보자. 어느 그림자 같은 인물의 사진이 보인다. 그는 누구일까? 볼 것도 없이 노동자와 농민의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다. 1973년 9월 11일, 산티아고에는 비가 내렸던가.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칠레 군부는 불법적 무력 쿠데타로 합법적 정부인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켰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알다시피 비극이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비밀경찰에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 그리고 실종 처리됐다.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 속에 살거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망명을 선택해야했다.
군사독재 15년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세력은 승리했고 불완전하지만 칠레의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숨죽였던 민주 인사들이 부활의 날갯짓을 하기 시작하고, 해외를 떠돌던 망명자들이 귀국하던 어느 시점의 이야기가 <우리였던 그림자>에서 펼쳐진다.
산티아고 모처의 공장에 3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들의 정체는 왕년에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 활동가로 활약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그림자”라는 별명의 전문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자는 전설적 아나키스트의 손자로 칠레 민중의 저항 씬에서 그야말로 전설 같은 존재다. 그의 이름은 페드로 놀라스코. 글록 권총을 지닌 왕년의 로빈 후드는 옛 동지들을 만나러 가던 중에 부부싸움 끝에 어느 부인이 거리로 내던진 ‘두알’ 턴테이블에 맞아 거리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아내 콘차의 룸펜 남편 코코 아라베나는 그림자의 권총과 연락처를 챙겨 나머지 영웅들의 모의에 합류한다.
모두가 희망으로 들떴던 칠레 혁명의 흥망성쇠를 직접 체험했던 세풀베다는 이방의 독자가 알 수 없는 숱한 조직들과 무엇보다 그들에게 소중했던 자유를 위해 풀잎처럼 스러져간 전사들의 연대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림자의 조상들은 중세 의적처럼 은행을 털어 자본가들이 착취한 돈을 민중에게 나눠준다. 놀라스코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소용이 다하자 깔끔하게 권총으로 삶을 마무리했다. 그런 게 가풍이라나 뭐라나.
우리의 그림자는 산티아고 시내를 신출귀몰하며 자신의 뒤를 쫓는 짭새들을 농락한다. 더 나아가 신참 짭새 크레스포에게 불의에 대한 저항을 해볼 의향이 있냐고 대범하게 묻기도 한다. 소설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세풀베다가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반세기 전의 저항을 너무 낭만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대의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들의 투쟁이 민주화 이후 세대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저자는 회의한다. 우리가 586세대에 대해 가진 일종의 부채의식과 비슷한 게 아닐까. 유효기간이 지난 청구서 같은.
그런 전설의 그림자가 고작 부부 싸움에 창밖으로 내던져진 턴테이블에 맞아 죽다니! 세풀베다는 이런 역설을, 민주화된 칠레정부가 엄혹했던 시절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좌익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대입한다. 인민 전선이 정권을 잡았던 시절에는 마오주의로 무장하고 투쟁의 대오에서 그 누구보다 빛났던 남자 코코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시절에는 그저 집에서 <7인의 사무라이>, <저수지의 개들> 같은 비디오나 보면서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 마누라를 위해 조잡한 알리바이나 짜고 있다는 게 믿어지는가? 그나마 막판에 가서 그림자를 대신해서 옛 전우들과 거하게 한탕으로 마무리했으니 다행이지.
고인을 추모하며 시작한 세풀베다 다시 읽기 프로젝트는 나름 순항 중이다.
<알라디노의 램프>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도저히 못 찾겠다. 다시 사서 읽어야 하나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