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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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지만 작고한 대가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의 서사는 정말 암울했다. 켄터키 스위트홈 농장 출신 도망 노예 세서가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단순하게 서사의 고갱이만 놓고 본다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토니 모리슨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이야기를 다 읽어 보면 마지막에 가서는 수긍할 수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1856, 그러니까 미합중국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실제로 있었던 마거릿 가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바로 <빌러비드>. 개인적으로 왜 흑인 노예를 소재로 한 문학은 흑인들의 전유물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 백인들이 그 서사를 맡는다면 니들이 뭘 아냐는 흑인들의 비아냥거림이 뒤따르지 않을까라는 노파심 때문이 아닐까.

 

토니 모리슨이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던 19세기 중반의 미국이란 낯선 공간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당시 미국 남부에는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었다. 1793년 엘리 휘트니라는 청년이 발명한 목화 솜에서 씨를 제거하는 조면기의 도입으로 남부 플랜테이션은 활황을 맞이했고, 노예제도는 백인들에게 필요악이 되어 버렸다. 흑인들은 동물보다 못한 처우를 받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매주일 교회에 나가는 백인 지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을 착취했고, 가혹한 매질을 아까지 않았으며 도망친 노예들을 나무에 매다는 만행을 저질렀다. 달궁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strange fruits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란.

 

그런 상황에서 노예주와 자유주의 대립은 결국 무력 충돌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내전 혹은 남북전쟁(1861~65)으로 알려진 전쟁 이후가 아마 소설의 배경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베이비 석스와 세서 그리고 덴버가 사는 124번지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씨줄과 날줄을 쉴 새 없이 교차시킨다. 덴버의 아버지 핼리는 켄터키 메이플우드 플랜테이션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어머니 베이비 석스를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킨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나마 주인인 가너 씨의 호의에 의해 그나마 베이비 석스의 해방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다른 농장에 비해 그나마 인간적이었던 메이플우드 농장에서의 삶은 학교 선생과 그의 조카들이 등장하면서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농장에 있던 네 명의 남자 중에서 핼리를 선택했던 세서는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도주를 계획한다. 이 때 등장하는 게 바로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무시무시한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이 도망친 노예들을 연방법인 <도망노예법>을 적용해서 다시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에서 노예들에게 안전이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만삭의 세서는 발이 망가진 채, 백인 에이미 덴버의 도움으로 강(코스 히어로의 따르면, 물은 탈출을 의미한다고 한다)을 건너 마침내 미리 와 있던 자녀들과 함께 베이비 석스의 품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해방된 노예 베이비 석스는 신발 고치는 기술을 가지고 들판에서 회중에게 설교하는 그야말로 성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아직 막내 아들 핼리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성대한 음식을 준비해서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서 떠들썩한 잔치를 준비한다. 물론 그 잔치에 끝에 도사린 비극의 전조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세서가 저지른 비극 뒤에 메이플우드 출신 폴 디 가너가 124번지에 도착한다. 이미 성녀 베이비 석스는 세상을 떠났고, 지난 18년 간 떠돌이 생활을 하던 폴 디는 세상의 온갖 비극을 경험한 사나이다. 그는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로이 배티의 최후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124번지는 세서의 아기 유령이 출몰하는 귀신 들린 집으로 모든 이들을 환영하던 곳에서 배척을 받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폴 디는 한판 푸닥거리로 아기 유령을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그 뒤에 빌러비드라는 보다 강력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면서 서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세서의 유일한 자녀로 124번지에 남은 덴버는 빌러비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동시에 토니 모리슨 작가가 준비한 서사의 소용돌이는 정말 매섭고 힘차게 돌아간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서에게 현재를 규정하는 과거는 추악하고 다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 자신은 모든 수모를 견디고 살아남는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비극의 시작이었을까. 그런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보고 싶은 생각도 차마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서나 폴 디 모두 그렇게 염원하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주체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가 없이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모르고 망연자실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참혹한 노예제도 아래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가족의 연속성에 대한 설명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흑인 여성들은 백인 주인님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고, 재생산을 위한 브리딩 머신(breeding machine)이었다. 남부의 천박하고 지독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흑인 노예들이 낳은 아이들을 그저 증식된 재산의 일부로 간주했다. 이런 가혹한 상황 아래서 마침내 자유를 얻은 세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망겔이 책은 질문하기 위해 읽는다라고 말했던가. 그렇다면 <빌러비드> 만큼 그에 적합한 책이 또 없을 것 같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이 행하는 행동들에 대해 끝없이 물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토니 모리슨은 마거릿 가너 실화의 빈 공간에 자신이 창조해낸 고통스러운 문학적 상상력을 채워 넣었다. 세서의 존재를 잡아먹는 성장한 아기 유령 빌러비드를 몰아내기 위해 모인 30명의 마을 여성들이 벌이는 엑소시즘은 이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희생을 통한 구원에 이르는 서사야말로 소설 <빌러비드>의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비록 고통과 눈물의 서사이긴 했지만 결국 모두 읽어내면서 왜 <빌러비드>가 토니 모리슨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사랑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로마서 9:25>

 

As he saith also in Osee, I will call them my people, which were not my people;

and her beloved, which was not be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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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2-04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 모임 멤버 한 분이 이 소설의 결론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도 그렇게 봤는데, 결말이 조금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

레삭매냐 2020-02-05 08:53   좋아요 0 | URL
오독까지 포함한 독서가 오롯하게
독자의 몫이듯, 책의 저술 또한
작가의 몫이 아닐까요...

저도 결말이 좀 그렇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