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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커트 보네거트 옹의 두 번째 유고집은 그리하야 2019 기해년에 내가 마지막으로 다 읽은 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어제 책읽기를 시작하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2020 경자년에 다 읽겠구나 싶었는데 아니 이게 왠걸. 너무 재밌었다. 역시나 보네거트 옹이 구사하는 블랙유머는 나의 개인적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그걸 이미 지난 십년도 전에 알았지만 그동안 멀리하고 있다가 보네거트 옹이야말로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라는 걸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아마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작품들이 이러저러한 사정을 거쳐 다시 출간되고 있고, 유고집들도 꾸준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으로부터 딱 십년 전에 발표된 <카메라를 보세요>에는 보네거트 옹 특유의 촌철살인 블랙유머가 가득 담긴 14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지금은 맛이 갔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놀라운 상상력이 돋보인 개미 나라와 에드옹 웰즈의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러시아 개미 연구가들의 중생대 개미 화석 발굴에 대한 이야기가 빛을 발한다. 제목이 뭐였더라 <개미 화석>이구나. 그러니까 모든 문명에 앞서 개미들이 영롱한 문명의 개척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만적인 집게턱을 가진 개미들이 등장해서(스탈린이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사회 구소련에서는 그들을 자본가라고 명명했다) 원주민 개미들을 몰살시켜 버렸다나 뭐라나. 더 놀라운 건 그들이 “재교육 수용소”를 세웠다는 것이다. 개미 연구 학자 형제는 입방정을 떨었다가 그만 삭풍이 몰아치는 싸이베리아로 추방당한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에드 루비 키 클럽>에서 보네거트 옹은 예언자로 둔갑한다. 불의가 넘쳐흐르고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알 카포네 밑에서 일하던 갱스터 에드 루비가 지배하는 일리움의 현재는 천조국의 그것과 너무 유사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클레어와 하브 엘리엇 부부는 20달러를 들고 평소처럼 자신들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에드 루비 스테이크하우스를 찾았다가 봉변을 당한다. 아니 심지어 진짜 살인범 에드 루비가 쩌 놓은 그물에 걸려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탈주자가 되기에 이른다. 경찰의 추격을 피하는 도중에, 하브 엘리엇은 에드 루비가 촘촘하게 엮어 놓은 일리움에서 모든 이들이 자신의 반대편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오히려 피해자를 도우려 했던 자신을 공격하는 장면에 아연할 따름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마 하브 엘리엇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났으리라.
멋진 로맨스 소설을 발표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실제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치닫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저택에 들른 세일즈맨이 목격한 진실에 대한 비꼬기는 또 어떤가. 물신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위대한 작가의 실체를 몰랐기에 예의 세일즈맨은 성공적으로 덧창을 파는데 성공했다. 다만 문제는 부인 작가가 자신이 등장하는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다는 것. 이 서사는 글쓰기 소재에 굶주린 작가들이 공격성을 보네거트 옹 특유의 블랙유머로 멋지게 요리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는 백 모씨의 조언과 조력으로 전국에 방명을 떨치게 된 포방터 돈까스의 버금가는 그런 맛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아무리 맛집이라고 하더라도 몇 시간씩 줄서서 먹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점을 밝힌다. 이미 오래전 군산의 어느 유명한 짬뽕집에서 경험해 보았기에, 사양하련다.
뉴욕의 성악가 래리는 돈 많고 자신에게 음악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제자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너무나 규칙적인 삶을 사는 래리에게 결혼이란 아름다운 구속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연인인지 제자인지 헷갈리는 그들이 말썽을 부리면 래리는 곧 그들을 졸업시켰다. 그래도 구름떼처럼 달려드는 새로운 제자들 때문에 래리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일과 성악가로서 직업 그리고 교육인지 연애인지 헷갈리는 비즈니스에서 래리는 그동안 성공가도를 질주해왔다. 버펄로 출신의 호적수 엘런을 만나기 전까지. 노련한 바람둥이 성악가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풋내기 엘런의 복수가 어찌나 통쾌하던지. 복수는 이제부터라는 선언이 더 황홀했다.
아, 소설집의 초반에 보네거트 옹은 어느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좋은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거침없이 직진하는 서사와 깜짝 결말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했던가. 모든 글쟁이들이 보네거트 옹의 조언대로만 한다면 침체일로의 문학씬이 다시 부흥하게 되지 않을까. 그냥 나의 엉뚱한 상상이었다.
그렇게 놀라운 속도로 책을 다 읽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마 나는 어제 이 책을 집어드는 순간부터, 이제 곧 과거가 될 2019 기해년의 마지막 책으로 보네거트 옹의 <카메라를 보세요>를 마음 속으로 점지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나의 계획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리고 이렇게 휘리릭 리뷰까지 모두 쓰는데 성공했다. 올 한 해도 (책) 사고, 읽고, 쓰고 기록하느라 수고했다. 아듀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