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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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필멸(生者必滅),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어떤 예외도 없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했다고 했던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작가 로베르트 제탈러의 <들판>의 주제다. 제탈러는 <들판>에서 가상의 작은 마을 파울슈타트 공동묘지에 묻힌 혹은 앞으로 그곳 들판으로 가게 될 29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나는 <한평생>으로 제탈러 작가를 알게 됐고, <담배 가게 소년>을 읽으면서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이번에 나온 <들판>2018년에 발표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거의 빛의 속도로 제탈러 작가의 책을 내준 그러나 출판사에 감사를 표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소설을, 문학을 읽는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야기꾼에 해당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자 독서의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데 제탈러 작가는 특이하게도 행복한 순간들이라기보다, 어쩌면 그 반대에 서 있는 망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다스 펠트(Das Feld), 들판은 죽음을 상징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가상의 장소 파울슈타트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던가. 죽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삶은 공정하지 않지만, 딱 한 가지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과연 죽음에 대처하는 파울슈타트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가.

 

어떤 신부는 자신이 모시는 주님의 집에 불을 지르고 놀라운 환영 속에 죽음을 선택한다. 어느 노동자는 노름과 도박에 빠져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에게 버림받는다. 꽃집 주인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발견이 되기도 하고. 마을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시장의 엽색행각, 뇌물수수는 이야기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우리네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제각각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렇다면 미래 삶의 결과를 안다면 우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 과연 합당할까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백년을 넘게 산 할머니의 지혜를 빌려 보자. 일정한 나이가 되면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착각이라고 할머니는 준엄하게 선언한다. 그렇다, 꾸준하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드는 대로 그리고 또 새로운 책에 대한 갈급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되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읽을거리가 내 삶 속에서 부재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행복한 전조가 아닌가.

 

<들판>의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주인공들이 사는 파울슈타트 마을을 매개로 어떤 인연으로 닿아 있다는 점이다. 누구는 호베르크 신부가 불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고, 또 누구는 시장의 비석에 오줌을 갈기기도 했다. 비록 원주민은 아니지만 채소장수 나비드 알 바크리는 파울슈타트의 진정한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알 바크리 같은 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지향적 인간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시민이 아닐까.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39년 동안 파울슈타트의 소식을 활자화한 기자, 편집자인 동시에 식자공이었던 인사는 또 어떤가. 그런 면면에서 나는 제탈러가 추구하는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외에도 독서하는 동안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짧은 글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정말 너무 멋진 글이 아닐 수 없다, 가히 전율적이다.

 

산 자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자신이 필멸의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쉽지 않은 주제를 29명의 주인공들을 통해 능숙하게 풀어낸 제탈러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주 진부하지만 다음의 구절로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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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10-16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삭매냐님 덕분에 제탈러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반가운 신간소식이군요! 일단은 찜 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9-10-16 19:09   좋아요 1 | URL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어제
달려 나가서 사서 읽었답니다.

동시대 작가의 책을 읽는 즐거
움이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