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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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바턴이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읽은 루시 바턴의 이야기가 뭐였더라. 시골 소녀가 대도시 뉴욕으로 가 작가로 성공한다는 이야기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데뷔한 이래 지난 이십년간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었다. 모두 9개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서로 유기적인 상호연관 작용을 하면서 그야말로 감칠맛 나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라는 시카고가 자리한 일리노이주 앰개시 타운을 바탕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우리는 모든 가정은 화목하고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절대적 가정은 시작부터 글러 먹었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그런 가정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행복하고 평안한 가정의 지속을 위해 우리 모두는 무대에 선 마리오네트 배우처럼 우리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지 못할 땐, 그러니까 감정과잉이나 결핍으로 시달리게 되면 배우가 아닌 본연의 모습이 튀어 나와 격렬하게 싸우게 되는 것이고.

 

내가 보기에 앰개시 타운은 전형적인 쇠락해 가는 중서부 지방의 표본이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도티 블레인에 따르면, 중서부 사람들은 동부 사람들처럼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걸 싫어한단다. 예의가 아니라는 말일까? 그녀의 민박집을 찾아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 셸리 스몰 부인은 끝도 없는 수다로 자신의 욕망을 타자에게 투사하다가 그만 수치심을 느낀다. 그 다음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적대적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다. 올리브 키터리지 못지않은 투사형 인간 도티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모름지기 어떤 외부의 충격으로 발화된 감정을 삭이지 못하면 병이 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닥터 스몰 부인에게 대거리하는 도티의 모습에서 뒤틀린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앰개시 타운 사람들에게 가난은 과연 형벌일까? 도티와 에이블 남매는 어려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음직한 케이크를 찾아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블레인 가족에게 가난과 궁핍 속의 삶을 제공했다. 에어컨 회사 사장으로 성공한 에이블은 가족 연례행사인 <크리스마스 캐럴> 공연 후, 공연장에 두고 온 플라스틱 조랑말 스노볼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스크루지 배우 링크 매켄지와 자신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귀중한 순간을 체험하기도 한다. 타인들이 보기에 거의 인질로 잡혀 고문 같은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60대 중반의 에이블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고, 자신이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걸 타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으리라. 이런 경험이 일상이지 않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

 

모든 에피소드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는 루시 바턴은 6번째 에피소드에 비로소 등장한다. 기다렸어요, 루시 바턴. 가족을 향한 나의 시선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같이 자란 형제나 자매들이 있다면, 아마 그들의 시선이 좀 더 객관적이지 않을까. 은둔형 외톨이를 자처하는 피트 오빠와 냉소주의자 언니 비키는 서로에게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어떻게 감정을 다룰 줄 모르는 이들의 흔한 모습이 아닌가. 인격적으로 좀 더 성숙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입장이라면 아마 이런 다툼은 불필요했겠지.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응어리진 감정의 적절한 해소를 위해 어느 정도의 치열한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촉발은 루시 바턴의 고향 방문이었고, 세 남매는 나름 치유의 시간을 가졌다라고 말하고 싶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무엇이든 가능하다>의 진짜 재미는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모든 관계가 결국엔 상호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 예전에 그래서 이런 관계가 생긴 거였어’라는 깨달음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야말로 스트라우트 작가가 <올리브 키터리지> 이래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 아닌가.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진실을 후들겨 패는 작가의 실력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것 같다. 거창한 이야기 대신, 평범한 삶을 거치면서 부대끼고 생채기난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장면들에 대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니까. 그러나 저러나 이제 곧 다시 올리브가 돌아올 모양이다. 그런 멋진 캐릭터를 한 번만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내가 말했었지!

 

지난 번 독서모임에서 어느 동지가 자신의 모습을 타자에게 모두 보여 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타자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란 말이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나의 연기 점수는 과연 몇 점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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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7-03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궁금하던 차에 레삭매냐님 리뷰를 봤으니 곧 데려와야겠어요. ^^
이거 읽기 전에 저자의 <루시 바턴>을 먼저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야말로 연작소설에 탁월한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나의 연기 점수는 얼마나 될까...오늘은 곰곰 그에 대해 생각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19-07-03 10:45   좋아요 1 | URL
일단~ 책은 아주 재밌답니다 -

그리고 이 책 보시기 전에 <루시 바턴>
을 읽어 보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 2년 전
에 쓴 리뷰를 다시 읽어 봤네요.

귀찮으시다면 제 리뷰로 퉁을 ㅋㅋㅋ

전작이 루시 바턴 본인에 대한 이야기에
천착했다면, 이번 책은 루시 바턴의 주변
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coolcat329 2019-07-05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거 읽어야지...했는데, 루시 바턴을 먼저 읽어야 겠군요ㅠ

레삭매냐 2019-07-05 11:17   좋아요 0 | URL
두 권 모두 만족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번 책은 타이트하지 않은 느슨한
이음새가 특히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