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달
멤포 지아르 디넬르 / 도서출판 대경 / 1996년 10월
평점 :
품절


 

*** 대량의 스포일러가 첨가되어 있으니 유의해 주세요.

 

도대체 어디서도 이 책을 만나볼 수가 없었다. 중고서점에도 그리고 도서관에도.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욕망은 채워지지 않을수록 갈급하게 된다는. 인스타에서 알게 된 아르헨티나 레시스텐시아 출신 작가 멤포 지아르디넬리의 책 <뜨거운 달>은 그렇게 나를 애가 타게 만들었다. 결국 책바다 서비스를 통해 어제 입수해서, 기갈 하듯이 그렇게 책을 읽었다. 물론 책을 수중에 넣기 전에 인터넷을 뒤지고, 구글링을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나 읽고 싶었으면 아마존에서 영어 번역판을 구하려고 했을까.

 

어느 해외 리뷰에서는 나브코프의 <롤리타>와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도끼 선생의 스멜이 난다고도 했다. 얼마나 그런지 한 번 읽어보자는 속셈으로 책을 펴들었다. 모두 4개의 장과 마지막 에필로그로 구성된 <뜨거운 달>은 1977년 11월 그러니까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폭압이 최고로 치닫던 시기를 시간적으로 배경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지아르디넬리의 고향 레시스텐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의 주인공 라미로 베르나르데스 박사는 폰타나에 있는 선친의 친구 의사 테넨바움 씨의 집을 방문했다. 8년간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법학박사가 되어 귀국한 라미로는 노르데스테 교수 임용을 앞둔 그야말로 미래가 창창한 청년이다. 그런데 테넨바움 씨의 13세 딸 아라셀리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중독이 되어 대사를 그르치는 잘못된 선택을 연달아 하게 된다. 아니 처음부터 아라셀리가 라미로를 유혹했던가? <롤리타>의 짙은 향기가 피어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번역을 맡은 송병선 교수님은 <뜨거운 달>의 두 가지 요소로 에로티시즘과 탐정 소설을 꼽았는데 첫 주제인 에로티시즘이 여과 없이 남반부 레시스텐시아의 열대야를 뜨겁게 달군다.

 

친구 후안 고물카에게 빌린 구식 포드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던 게 결정적 원인이었을까. 하는 수 없이 라미로는 테넨바움 씨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무더위와 야릇한 갈망 때문에 라미로는 잠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리고 8년 만에 만난 그놈의 달빛 덕분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아라셀리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아라셀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라미로는 그대로 도주를 결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라셀리의 아버지 테넨바움이 자기와 함께 술 한 잔 더하자는 권유를 하고 라미로의 차에 오른다.

 

그 다음부터 소설은 탐정 소설의 계보를 따르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동지 로베르토 볼라뇨가 떠올랐다. 두말할 것도 없이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다. 끈질지게 달라붙는 테넨바움 씨를 혼절시키고 결국 자동차에 실어 수장시키는 플랜을 가동한다. 처음에 자신을 “가벼운 살인자”라며 자위하던 라미로는 이제는 진짜 살인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 와중에 경찰 검문에 걸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트레일러 운전사에게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자신의 흔적을 곳곳에 뿌린다. 자 이제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라미로 박사는 어떤 방식의 알리바이를 제시할지 말이다. 테넨바움 씨와 마지막까지 있었던 사람이 그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살인자도 피로와 긴장을 이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수면에 빠지는 그를 누가 찾아온다. 그건 바로 아라셀리였다. 아니 이럴 수가! 그녀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소설은 이 지점부터 스릴러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남성우월주의자 라미로는 여성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신의 유약한 성격을 숨기기 위해 그런 행세를 했던 건 아닐까.

 

욕망의 대상에서 언제고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로 변신한 아라셀리는 라미로에게 뜨거운 성애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아니 팜므 파탈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걸까? 지아르디넬리 작가는 아름다움과 뇌쇄적 매력을 지닌 아라셀리를 이용해서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에로티시즘을 극한으로 밀어 붙인다. 놀라울 정도다. <뜨거운 달>에서 아라셀리 테넨바움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욕망을 갈구하는 메피스토펠레스적 욕정을 상상 그 이상으로 발휘한다.

 

자 이제 소설의 위기가 등장할 차례겠지? 알미론 형사와 알시데스 카를로스 감보아 보셰티 중령/경찰서장은 라미로의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살인 용의자로 규정하고 감방에 가두어 버린다. 전도유망한 청년이 살인자가 되어 감방에 갇히게 되는 과정이 정말 초현실적이지 않은가. 더 무서운 사실은 군부가 이미 라미로를 “비축 인력”으로 점찍었다는 점이다. 보셰티 중령으로 대표되는 군부 세력은 사회질서의 지속이라는 이유로 엘리트 계급을 포섭해서 자신들의 명분없는 통치를 영속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에로티시즘과 탐정 소설의 궤도는 이 지점으로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보셰티 중령은 뚜렷한 테넨바움 씨 살인에 대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라미로의 자백을 강요한다. 미래의 부역자로 낙점된 라미로는 영리하게도 같은 진술을 번복한다. 그러자 보셰티 중령은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그들이 원하는 자백을 얻어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방식이 고문이라고 지레 짐작한 라미로의 공포는 극한대로 돌입한다. 그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인 장면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완벽해 보이는 알리바이를 깰 수 있는 그를 히치하이킹해준 트레일러 운전사의 등장이다. 자, 과연 우리의 주인공 라미로 베르나르데스 박사는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멤포 지아르디넬 리가 그리는 라미로 베르나르데스란 지식인의 초상은 위선의 태양 그 자체다. 해외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얻어낸 학업의 성취를 엄정한 조국의 현실을 위해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군부와 결탁할 궁리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랫도리에 일어나는 욕망도 자제하지 못한 채 어린 소녀를 겁탈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들끓는 욕망이 발각되자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지 않은가. “가벼운 살인자”가 진짜 살인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군부가 내전에 “전염”되지 않은 엘리트 라미로를 그들의 주구로 점지하고 미래의 부역자로 내정해 두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테넨바움 씨는 “망할 나라”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망할 나라에서 시골 의사가 맨 정신으로 살기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 알콜중독자의 길을 걷지 않았을까. 그를 살해한 라미로가 자살로 사건을 몰고 가려고 하지만, 오히려 반란군을 언급하는 장면에서는 당시 아르헨티나 국가가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소설 <뜨거운 달>을 다 읽고 나서 그야말로 소름 끼칠 정도의 전율이 일었다. 아니 도대체 멤포 지아르디넬리란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플롯과 스릴 넘치는 전개 그리고 열대야의 원초적 욕망을 치솟게 만드는 ‘뜨거운 달’ 같은 에로티시즘을 창조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물론 작가가 맨 마지막에 준비한 대망의 엔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련다. 궁금하시다면 책을 구해서 읽어 보시라. 그리고 나와 같은 전율을 경험해 보시길 바란다.

 

[뱀다리] 아니 2019년 2월에는 어쩌면 이렇게 멋진 책들을 연달아 만날 수가 있는지 나도 놀랄 지경이다. 앞으로 나의 인생책으로 꼽을 만한 <바보의 알파벳>도 그렇지만, 파우제방 작가의 <보헤미아의 우편배달부>도 알아 알아스와니의 <시카고>도 그리고 멤포 지아르디넬리의 <뜨거운 달>도 정말 뜨거웠다. 대박이다.


[뱀다리2] 멤포 지아르디넬리의 다른 책들도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세상은 넓고 아직 읽지 못한 작가들의 책이 이렇게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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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2-27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표지의 포스만 봐도 저 책은 정말 구하기 어려워겠네요.
저도 정말 찾다찾다 못찾아서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한 책이 한두권 있긴한데....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해서 읽은 책이라하니 더욱 소장하고 싶지만...
레삭매냐님이 소장 못할 정도였으면 저는 포기합니다. ㅎㅎㅎㅎ
써주신 리뷰로 만족할게요.~

레삭매냐 2019-02-27 11:52   좋아요 1 | URL
언제고 헌책방에서 만나게 되면 냉큼
업어올 거입니다.

심지어 보존서고에 있던 책이더라구요.
다른 곳에서는 제적 처리가 되어 있어
서 책바다 서비스 이용하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ㅠㅠ

소설이 다루고 있는 컨텐츠는 정말 최
고였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난 라틴
아메리카 소설 중의 최고였다고나 할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