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출판계 전문가라는 양반의 헛소리를 다룬 기사를 읽었다. 전국에 알라딘 42곳의 기업형 중고서적을 내고, 후발주자 예스24까지 최근 기흥 아웃렛에 비슷한 형태의 기업형 중고서점을 내서 출판생태계를 망친다는 주장이다.
일견 참고할 만한 이야기도 있다. 나도 올해 알라딘 구입내역을 조회해 보니, 내가 산 책의 90%가 중고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들이 모두 신간이었을까? 아니다. 물론 신간도 있지만, 알라딘 중고서점의 새로운 정책 때문에 6개월은 기다려야 신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렇게 돼서 난 도서관을 더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책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지경이다. 물론 내가 애정하는 작가들의 책들과 아직 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이 부지기수다. 오늘도 한 보따리 쟁여다가 무기명으로 동네 서가에 기증하고 왔다. 모쪼록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란다.
중고서점은 내게 절판 혹은 품절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다. 지금 구하고 있는 호르헤 볼피의 <세계 아닌 세계>도 불과 출간된 지 4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절판돼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책이 가고 싶다고 해서 어디 가서 훔치랴? 예전에 어느 독서 모임에 갔더니만, 한 선수가 자기는 도서관에서 빌린 다음에 분실했노라고 말하고 슈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충격이었다. 아니 책읽는 사람이 그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었다. 나만 좋으면 다른 사람은 어찌 되도 생각없다는 말 아닌가.
개인적으로 아주 많이 한 경험이긴 한데, 신간으로 사서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을 중고서점에서 만나게 될 때의 그런 속쓰림을 아시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리고 내 돈 주고 산 책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겠다는데 그 방식까지 간섭을 받아야 하나? 한겨울에 야영장 캠프에서 불쏘시개로 사용하든, 재활용 수거함에 넣든, 뻣뻣하지만 밑을 닦든, 중고서점에 팔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자꾸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가는군. 어쨌든 예의 전문가라는 양반은 오로지 기업 윤리 차원에서 중고서점을 비판할 따름이다. 예전에 도서정가제 시행을 하게 되면서,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은 재정가 시스템을 적용시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책들이 몇 권이나 되더라. 항상 출판계와 정부만 나서서 날리부루스지 정작 소비자들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체감하는 책값은 여전히 비싸게 느껴진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 2만원이 넘는 책은 산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업자들이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지들 맘대로 제한하려고 하는 건가? 신간이 나오는 대로 바로 사서 읽고 싶은 사람은 제값 주고 사서 읽으면 될 것이고, 아닌 사람들은 시간을 좀 두었다가 중고로 사서 보면 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좀 번거롭기는 해도,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기업형 중고서점에 작가들의 인세를 물리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신박하구나. 왜 도서관에 비치되는 책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한 번 빌려갈 때마다 인세를 물리시지.
그리고 내가 업자가 아니어서 당당하게 말하는데, 내가 글밥 먹고 사는 이들의 통장 사정까지 내가 걱정해 주어야 하나. 우리가 마트에서 라면 사면서 농심이나 삼양 같은 기업 걱정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작가 양반들이 내 통장 사정을 걱정해주지는 않잖아. 내가 어떤 다른 기회비용을 소모해 가면서, 책을 사는지 말이다. 작가와 독자의 상호관계 타령을 하려면 부디 내 통장의 잔고 사정도 좀 고려해 주시면 좋겠다. 내가 어떤 희생을 하면서 책을 사고 읽는 지에 대해서.
어쨌거나 난 계속해서 중고서점을 애용할 것이다. 그게 기업형이든, 아니면 고전적 형태의 중고서점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