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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평점 :

8년 만에 다시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었다. 말미에 나오는 충격적인 사건만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다시 읽어 보니, 처음에 읽었을 때 미처 눈에 띄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이래서 재독을 하게 되는 건가.
<칠레의 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우루티아 라크루아 신부다. 재기 넘치는 젊은 신부는 오푸스 데이 소속의 보수적 성향의 사제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우루티아 신부는 페어웰이라는 문인 출신 외교관을 알게 되어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우선 칠레가 자랑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네루다 아저씨와도 직접 대면하는 영광도 갖는다. 문학의 불멸성을 숭배하는 우루티아 신부는 이바카체라는 필명으로 문학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살바도르 레예스 선생이 들려주는, 8년 전만 하더라도 전혀 몰랐던 에른스트 윙거가 등장하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 시절의 에피소드는 또 어떤가. 누군가에게 윙거는 악랄한 나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볼라뇨에게는 지식인이자 작가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바도르 선생은 윙거야말로 유럽 대륙에서 순수한 사람이라고 보증하지 않는가.
오스트리아 출신 제화업자가 헬덴베르크 언덕에 제국의 영웅들에게 바치는 기념비적인 묘지와 동상을 만들겠다는 꿈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황제의 호의에 힘입어, 제화업자는 쌩뚱맞게도 자신의 본업과는 전혀 상관 없는 대사업을 시작한 걸까? 결국 제국과 황제가 사라져 버리고, 두 번째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는 쑥대밭이 되지 않았던가. 제화업자의 종말은 충분히 예견가능했고, 왠지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 <피츠카랄도>가 떠오르는 걸까.
어쨌든 우리의 주인공 우루티아 신부가 계속해서 언급하는 ‘늙다리 청년’이 도대체 누구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오데임 씨와 오이도 씨의 후원 아래 유럽을 주유하는 일정도 등장한다. 인상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우루티아 신부가 방문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의 성당마다 성당을 부식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 비둘기들을 소탕하기 위해 투르코, 크세노폰, 타 괼, 로드리고라고 이름 붙인 매들의 활약이었다. 결국 비둘기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창조된 피조물인데 그렇게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게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에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다시 칠레로 돌아온 우루티아 신부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현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아옌데의 인민연합이 선거에 승리해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물론 보수 기득권 계층과 군부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사보타주, 미국 CIA의 아옌데 정부 전복 모의 같은 반대파의 저항도 격렬했다며 볼라뇨는 달랑 4페이지로 칠레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혁명의 시간들을 정리해낸다.

자 이제 볼라뇨의 소설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스폰서였던 오데임 씨와 오이도 씨의 제안으로 우루티아 신부는 당시 칠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이들에게 마크르스주의의 기초에 대해 강의를 시작한다. 놀라지 그들은 바로 쿠데타 주범이자 독재자 피노체트와 그 일당이었다. 피노체트는 자신이 칠레의 적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알기 위해 자발적으로 우루티아 신부에게 적절한 보수를 쥐어주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전임자인 아옌데와 기민당 출신으로 아옌데의 경쟁자였던 프레이, 알레산드리 모두 엉터리 지식인이었다고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모름지기 소설에 비밀은 없는 법. 자신의 멘터라고 생각하는 페어웰 씨에게 진상을 털어 놓자 모든 칠레인들이 우루티아 신부의 일에 대해 알게 된다.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우루티아 신부는 시집도 내고 서평과 평론활동에 매진한다. 그리고 뜬금없이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부유한 작가지망생이 등장하는데,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칠레 문단계를 대표하는 살롱의 여주인으로 급부상한다. 그녀의 남편은 미국인 제임스(지미) 톰슨. 그런데 우루티아 신부는 어느날 기묘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한창 흥겨운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길을 잃은 손님 하나가 카날레스 저택의 지하실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낭설이라고 치부하고 싶었겠지만, 그것은 진실로 드러난다. 카날레스의 남편 지미 톰슨이 칠레 국가 정보국의 핵심 인사였고, 갖가지 테러 행위에 연루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흐르고, 우루티아 신부는 여전히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카날레스를 찾아가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된다.
우리 시대 문학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우리 시대에는 볼라뇨처럼 과거에 있었던 부당한 사건들을 전면에 다루는 작가가 없는 걸까. 모든 작가가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불편부당이야말로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듯 우리가 알고 싶은 것 대신 개인의 일상이나 사유를 한없이 파고드는 이야기들을 언제까지 읽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볼라뇨는 칠레 혁명 이후 멕시코와 스페인을 떠돌면서 진실의 모서리를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공략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시, 소설 같은 글쓰기로 말이다.
우루티아 신부로 대변되는 칠레 가톨릭 세력은 쿠데타를 주도한 기득권 세력의 명백한 부역자였다. 아옌데 정부를 지지한 사회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민중의 열망을 저버리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피노체트의 편에 섰다. 그런 점에서 우루티아 신부가 유럽 각처의 성당에서 만난 많은 신부들이 매를 부려 비둘기를 사냥하는 장면과 묘하게 겹치지 않는가 말이다. 성당이라는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매를 부린다는 설정은, 가톨릭이 소중하게 여기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피노체트로 대변되는 무력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볼라뇨가 저술한 대로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로 변했다는 표현의 상징은 의미심장 그 자체였다.
제대로 된 볼라뇨 전작읽기를 시작하기에 <칠레의 밤>만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한다. <안트베르펜>처럼 너무 가볍거나 모호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2666>처럼 버겁지도 않은 그야말로 안성맞춤 아닌가. 그나저나 드디어 대망의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이 도착했다. 볼라뇨 전작읽기는 당연히 이후로 미루어질 것이다. 아니 나의 모든 독서가 일단 <바르도의 링컨>을 다 읽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