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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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쉰두 번째 서평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실리어 블루 존슨, 신선해 역

 

 

프롤로그 모음집

 

 

  흥미로운 책임에는 틀림없다. 세간의 호기심을 순간이라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문학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비화라고 할 수 있을까.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담겨진 책이다. 저 유명한 어느 작가의 무슨 무슨 문학작품이 세상에 탄생하기까지의 숨겨진 이야기가 지금 오롯하게 당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면, 구태여 뒷걸음쳐 도망갈 사람은 많지는 않을 듯 싶다. 어쩌면 호기심이란 고약하면서도 위태로우며, 혹은 천진스런 복잡 다양한 인간의 심리가 녹아든 감성일지도 모른다.

 

 

  책의 저자 실리어 블루 존슨은 책에 담겨진 비화가 백퍼센트 사실성을 추구한다기보다는, 한 작가의 사상과 생각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지에 더 초점을 맞춰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오래된 기억이란, 자주 혼돈을 가져오는 법이지 않은가. 각설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여유를 좀 챙겨야 할법하다. 적어도 우리가 지금 물리학의 공식을 대입해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든지, 수학의 연산을 풀기 위해서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구성면에서 ‘번쩍 스치는 황홀한 순간’,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현실 속, 그와 그녀의 이야기’,‘ 어둠 속 저편, 영감이 떠오르다’, ‘영감을 찾아 떠난 위대한 여정’, ‘내 삶의 현장이 곧 이야기다’. 라는 소 제목으로 구분하여 이야기를 싣고 있다. 책의 내용면에서 혹은 작가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작품을 완성해나갔는가에 따라 구분지어진 듯한 느낌이다.

   책은 우선 익히 잘 알려진 문학작품을 선두로 이목을 끈다. 그 첫 장면을 장식하는 작품이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다. 잠시 책에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살펴보자.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보물섬, 왕의 귀환으로도 알려진 영화 ‘반지의 제왕’의 문학적 모티브가 된 작품 ‘호빗’, 정치적 성향을 갖고 문학작품과 현실 사회적 비판이라는 논지로 자주 거론되어왔던 ‘동물농장’, 소녀취향이 물씬 풍기는 ‘오즈의 마법사’ 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근깨 빼빼마른 이라는 가사로 기억되는 ‘빨강머리 앤’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다.

 

 

  작품을 설명하는 동시에 작가에 대한 이야기, 작가와 그 주변의 상황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편의 문학작품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비교적 객관적 시각으로 차분하게 그려가고 있어 안정감 있게 잘 읽힌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만 이런류의 책은 다양성과 포괄성을 갖는 동시에 깊이감에서는 아쉬움이 남기 쉽다는 점에서 장단점을 동시에 갖는 듯하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는 말이 생각난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라 했던가. 한권의 책 속에 소개되어 있는 문학작품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볼 욕심이 커진다.

이를테면 책은 일종의 프롤로그 모음집처럼 보인다. 본문으로 이어진 내용을 접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시간적 요소와 더불어 심적인 요소의 투자가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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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이 독깨비 (책콩 어린이) 22
R. J. 팔라시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쉰 한번 째 서평

아름다운 아이-R. J필라시오

 

긍정의 힘.

 

아름다운 아이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안면기형으로 태어난 어거스트 풀몬. 책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외모로 태어난 주인공 어거스트가, 긍정의 힘을 빌어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외적인 혹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오판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은 어쩌면 면접시험장에서 들어봤음직한 표현이지만, 사실 사람을 알아간다는 일은 그렇게 찰나의 순간에 국한되어서 완성되는 일은 결코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늘 해오던 사념이다.

한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고 다시 낙엽이 지는 것까지 봐야 조금이라도 그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급하게 공감을 하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정신이 이끄는 내면의 깊이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조금은 더 편리한 시각적인 효과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 어거스트 풀먼은 유전적 질환에 의해 마치 화상을 입을 듯한 얼굴로 태어났다. 세상에는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느낌이란 것이 있을까. 그것을 감동이라는 어휘로 바꿔 말할 수 있을까. 몇 개월 전 역시 장애를 가진 소년과 그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 청소년 문학을 접한 적이 있기에 부득불 자꾸 비교가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로가 다르지 않았다. 라는 것과 함께, 개개인의 심리를 다루는 면에서는 필라시오의 작품이 세부적으로 더 디테일 했다는 차이점을 찾게 되는가 싶다.

뭐랄까,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그의 가족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주변의 긍정적인 성향의 친구들과 필수 불가분의 법칙처럼 따라오는 부정적 이미지의 친구들과의 사건들 속에서 일년 동안 사립학교에서의 생활이 그야말로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 어니스트(예명:오기)를 중심으로 오기의 누나(비아), 비아의 친구들, 또 오기의 친구들이 각자 독립적인 시점에서 글을 이끌어내고 있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단막극처럼 부담 없는 길이의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에는 이들 에피소드가 갖는 연계성이 동떨어지지 않으며 서로 잘 짜여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니스트의 시점, 비아의 시점, 미란다의 시점, 잭의 시점, 서머의 시점 등과 같이 책은 이들 인물들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이들 서로가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성장기에 봉착한 아이들에게 시작되고야 마는 다양하면서도 깊이감이 서로 다른 난관과의 충돌, 그리고 그 난관을 그들만의 개성 있는 방식으로 잘 해쳐나가는 ‘성장기 아이들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스토리의 전개 면에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독특한 요소는 잘 띄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마저 토를 다는 나는 이미 식상하기 그지없으며, 고약하기 짝이 없는 편협한 어른의 사고에 절어버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세상은 그래도 멋진 곳이며, 타인과 더불어 교감하면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다는 정설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듯한 책이지 싶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에게 어쩐지 잘 어울릴 것 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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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쉰번 째 서평

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김형경

 

 

 

 

사랑에게 묻는다.

 

 

 

거의 한 달을 들고 다니던 책을 오늘에서야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을까 싶으면서도, 오랜 시간과 많은 생각과 그 생각들의 조화가 필요했던 책이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김형경. 나는 그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당시에 살던 집을 내놓고, 세계일주를 할 생각이라 했던 그 말 하나는 아직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무사히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는지, 물론 그랬으니 새로운 책도 내고, 이렇게 다시 한권의 책으로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까닭이 아닌가.

 

그녀의 처녀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는 한 시절 늘 가방 속에서 동고동락하던 귀한 친구였다. 김형경의 시집에서 머물다가 기형도와 허수경의 시집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사이 전혜린의 사상과 세계관에 푹 빠져 있곤 했다.

 

 

 

<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 는 <성에>로 출간되었던 작품을 다시 새로운 제목으로 출간한 경우다. 이 작품이 <성에>라는 제목을 등에 지고 세간에 나왔을 때 나는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때문에 <성에>라는 제목이었을 때와, 지금의<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다가왔을 때 차이점이 있다면 그 점을 간파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다만 이상하게도 김형경 그녀가 다시 새로 지어준 이름인 <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를 중얼거리다보면 언제나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걸 깨닫는다.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이 생각이 나더란 말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무슨 연유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 했던 기형도의 시와, ‘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가 동시에 머릿속에서 맴을 도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김형경의 이번 소설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도와 같은 선상에서 해석할만한 이야기일 듯싶다.

 

 

한 편의 소설이 있다. 전체적인 플롯과 같은 형식적인 면을 떠나서 들여다보더라도 이 작품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개개인의 수용적인 면도 과히 가볍지 않아 보인다. 사랑와 열망, 인간의 이중적이면서도 가장 순수하며 숭고한 감정인 사랑과 애정을 구체화함에 있어 작가는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작가 자신과 함께 이 글을 읽는 이들 모두를 함께 떨어뜨린다. 떨어지는 순간은 찰나겠으나, 그 추락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스스로에게, 혹은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각자의 정해진 길을 외면하고 서로의 눈앞에 있는 이성에게 이끌려 길을 떠나는 두 사람. 세종과 연희라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소설은 두 인물의 이야기와 함께 한 여자와 두 남자의 묘한 동거와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동시에 보여줌으로 해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에 잠자고 있는 본성과 애욕을 풀어낸다.

소설은 바람, 청설모, 박새, 참나무와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자연의 시점에서 은밀하면서도 기괴하기까지 한 한명의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를 묘사한다. 자연의 생명체를 소재로 가져와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상황을 자연의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 어쩌면 작가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적 시선이 따라와야 하는데 작가는 그러한 요소를 자연에서 가져왔던 것 같다.

다분히 자연의 주인이 바라보는 시선에서 인간들의 사랑과 애정과 모든 복잡한 심상 따위는 그저 생존에 의한,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이 사실을 작가는 바람과 참나무 박새와 청솔모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그렇게 본다면 인간이 느끼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감정인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의 감정적 요소로 그 가치를 살짝 하락할 수도 있을 법 하다.

 

작가가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랑이란... 참...오묘한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이란 참 이율배반적인 불온한 것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일까.

김형경의 소설을 접하면서 나는 사랑에 대해, 그 사랑을 만들어가고, 추구해가는 인간들의 내면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오래도록 놓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무거운 것인 동시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인간을 어떤 나락으로 내몰기도 하는 양극단의 힘을 지닌 정리하기 어려운 감정의 실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느낌이자 감흥이다.

문득 이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랑과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랑 사이에는 골이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골을 얼마나 잘 덮어가는 가에 따라, 인간의 사랑은, 아니 모든 생명체의 이성, 즉 다른 성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의 조절은 환희인 동시에 상처일 수도 있을 법하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 그것을 생각하는 일. 그것을 하느라고, 그것을 다시 곱씹어 생각하느라고 내가 김형경의 소설을 쉽게 놓지 못하는가. 다시 묻는다. 사랑에게. 사랑이 무엇인가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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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기억, 지도 - KBS 특집 다큐멘터리 지도에 새겨진 2,000년 문명의 기억을 따라가다
KBS <문명의 기억, 지도> 제작팀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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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마흔 아홉번째 서평

 

문명의 기억. 지도

 

 지도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사

 

 

  책 한권 오롯하게 지도 이야기가 가득찼다.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다시 책으로 만나는 기회다. 책은 다양하고 값진 사진들을 함께 싣고 있어,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감흥을 책에서도 충분하게 보태고 있다. 비록 나레이션이 잔잔하게 읊어주는 청각적 자극이야 아쉬운 부분으로 남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책은 꼼꼼하고 상세하게 저술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세계를 접해볼 수 있을까. 세계를 만나러 가는 통로가 바로 지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세계사는 좋아했지만, 세계지리는 좋아하지 않았었던가 보다. 이 무슨 이율배반적 사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지리가 총괄적으로 세계사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유난히 약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지도에 대한 책을 읽고 있으려니 자연적으로 책상 위에 지구본이 자주 그 얼굴을 보여준다. 책에서 말하는 <말라카 해협>은 어디쯤인지, 삐딱하게 선 지구본을 이리저리 굴려보며 자잘한 글씨 속에서 해협이란 글씨를 찾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들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세계사에 맞게 변화해가는 새로운 지도의 필요성이 아니었을까. 20세기 이후 독립을 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 중인 신생국가와 그들이 오롯하게 지켜낸 땅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세계지도를 바라보는 관점도 역시 수정과 변화를 감당해가며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라는 혼자만의 속절없는 생각들이다.

 

 

  이쯤에서 각설하고. 이번 문명의 기억, 지도는 ‘지도’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들여다본 세계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고대부터 시작된 지도 만들기와 읽기, 중세를 거쳐 정해진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지도는 발전이란 것의 경험을 누렸다. 늘 조금씩 보태졌으며, 수정되었고, 때로는 그대로 필사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문명의 힘을 전파했다.

 

  이를테면 과거에 지도가 지녔던 의미는 생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인류가 발전함과 동시에 지도의 의미는 문화의 전파, 내지는 정복이란 야욕의 긴밀한 수단으로 차용되기도 했다는 말이 된다.

 

책은 <달의 산, 프톨레마이오스, 프레스터 존, 지도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각 시기별로 지도의 특성과, 지도가 지니는 의미와 영향력, 주변국 혹은 그 너머의 대륙을 가로지르는 지도상의 표시된 땅들 사이에서 갖가지 진귀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 보여주고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시작으로 계속 영향을 주고 받았던 다양한 지도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났던 사람들은 스페인과 이집트, 터키 등으로 지도와 관계된 지역을 두루두루 살펴사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중심으로 동으로 서로 역사적 흐름의 추이를 따르기 때문에 이야기는 재차 반복되기도 하고 그 중간에 백여 년 이라는 시간의 공백까지 보태진 까닭에 책은 지도와 나라 그리고 오래된 역사라는 다양한 측면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셈이다.

 

실제로 <프레스터 존>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읽는다면 혼란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1246년 에 등장하는 <프레스터 존>의 이야기는 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와 중국에 관한 이야기지만, 1439년에 등장하는 <프레스터 존>의 이야기는 중국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포르투갈과 에티오피아를 거론하고 있다. 같은 프레스터 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년도의 차이에 따라 또는 프레스터 존의 존재를 갈망하는 제국의 다양성과 특성에 따라 그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혼돈 없이 잘 읽어내기를. 문제는 증명되지 못한 <프레스터 존>에 대한 환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도 이야기가 이렇게 다양할 줄이야. 이렇게까지 역사가 깊을 줄이야. 어느 한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하나를 알게 되는 순간은 다시 새로운 지식의 시발점이 된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호기심과 무한한 자극을 채워주는 순간이 바로 지금 현실이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넘쳐나는 인식 속에서 과학적 내지는 인류학적 지식에 휘둘려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세계사는 어느 것 하나가 동떨어져진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세계지도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떤 지도가 더 잘 만들어졌다, 더 의미가 크다, 는 식으로 비교 분석에만 국한할 것은 아닌 듯싶다.

  지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며 살아낸 인류의 보편적인 존엄과 그들이 이어온 문명에 대한 가치가 중요하지 않은가. 아무렇지도 않은 평이한 오늘 하루도 문명이라는 거대한 이름하에 여전히 이 ‘문명의 힘’은 이어진다. 문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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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 10세 공부두뇌를 키우는 결정적 순간
하야시 나리유키 지음, 김정연 옮김 / 테이크 원(Take One)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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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흔 여덟 번째 서평

3.7.10세 공부두뇌를 키우는 결정적 순간-하야시 나리유키

 

교감이 중요하다

 

 

  연령대별로 구분해서 뇌를 키운다는 이론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 40만부 판매 실적을 올리고 육아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는 광고가 한쪽 귀퉁이에서 반짝인다.

  뇌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게 없다. 의학적으로 뇌의 해부학적 구조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한두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다 일뿐이다. 사실 생물학 시간도 해부학 시간도 서른 여덟살 아줌마인 내게는 별천지 같은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하고 신비스런 인체조직인 뇌의 기능과 두뇌 향상의 관계를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 하야시 나리유키이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총체적인 느낌은 조금은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존의 출간된 육아서와 큰 차이점을 획득하지 못한 듯 하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이 교육과 양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그 접근법인데 바로 뇌와의 연계성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육아와 관련된 각종 다양한 서적은 이미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에 의한 해석으로 방향을 트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독자들은 기존에 나와 있던 식상한 육아서의 해석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짬을 얻을 수 있는 반면에 작가는 독자들에게 신선한 이론과 개념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좋은 게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솔직히 큰 구미를 당기지는 못하는 듯하다. 초반에 실린 뇌구조와 발달측면에서 실린 내용은 저자 하야시 나리유키의 독특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분별력 있는 과학계라든지, 의학계 혹은 아동과 관계된 기관에서 인정받은 신빙성이 있는 이론이기 보다는, 개인적인 학설로 아직까지는 소수의 영향력 안에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작가 하야시 나리유시의 이론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뇌의 구조에 맞게 자신의 이론을 접목시켜 나가려 하는 노력이 보인다. 그런데 딴은 어떤지 그의 이론은 그만의 세계 안에서만 생명력을 갖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이론이 갖는 기본적인 체계를 풀어본다면 의외로 간단하다. 뇌의 기능은 본능과 마음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상태이며, 부정적인 아닌 긍정적 마음 상태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긍정적 마음상태는 긍정적인 동시에 적극적인 욕구를 가져오고, 이러한 긍정적인 동기부여와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행동과 결과물에서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는 이야기이다.

결론은 아동이 늘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상황에 맞게 저자가 안내하고 있는 질의 응답문이 같이 실려있긴 하지만, 그 범주가 다소 산만한 감이 느껴진다. 종합적으로는 아동에 대한 질의는 분명하다. 그러나 아동의 뇌와 관련해서 학업 측면이라기보다는, 아동의 전반적인 생활에 관한 질의와 답 차원의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외. 연령대별로 부모의 역할, 어떤 방식으로 아동을 이끌어줄 것인지, 엄마와 아버지의 역할분담, 또래와의 관계 등 등 다양한 이론과 사례를 싣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대부분 교과서적인 대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교과서적인 대답이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뜻과 같다. 저자만의 독특한 사고가 담긴 해답을 기대했다면 기우였을까.

0-3세 아이의뇌를 단련시키는 10가지 포인트에서 ‘진지하게 시합한다’라는 소제목으로 작가는 손위 형제간의 경쟁과 결과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이의 성장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승부가 나도록 조건을 조정하는 것이 부모의 능력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이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 그 속에서 각자 노력하게 해주세요.”

<p80>

 

 

  책 한권을 통해 저자의 이야기에 대부분 수긍하고 있지만, 조건을 조정한다는 작가의 말에는 동조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일종의 임의적인 동시에 비도덕적 환경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진지하게 시합한다는 명제 앞에서는 자신의 부족한 면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고도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할 부분이다. 저자 역시 자신의 이론에서 “나쁜 습관 중 한가지로 ‘자신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p114>는 것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나쁜 습관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그렇다고 볼 때 상황을 조정하는 것은 그런 습관을 미루어 묵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최선을 다해서 이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속에서 노력하게 배려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길 수 있는 환경 즉 경쟁사회에서만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까. 경쟁이 아닌 사회에서는 자아성취감은 얻기 어려운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손위 형과 했던 시합에서 졌다면, 아이가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잘 수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차이가 크다면 큰대로 적다면 적은대로... 그만큼 아이에게 채워줄 수 있는 무한의 가능성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굳이 조건을 조정하면서까지 아이에게 현실과는 다른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을까.

 

  굳이 연령대 구별을 하지 않더라도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다. 뇌를 발달시켜 성적으로 올리는 목적이라든지, 인성을 위한 차원에서 부모에게 필요로 하는 노력 따위조차도 모든 원인과 결과가 부모와 아동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관계유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관계란 당연히 말 뿐인 관계가 아닌 친근함과 친밀함, 돈독함과 애정이 넘치는 관계를 말 할 것이다.

  주제넘게 한마디 해보자. 저자의 말을 빌려온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고 싶은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하야시의 뇌 이론과 연령의 구별의 특성’과는 무관하지만, 어쨌든 정리를 해보면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싶다. 끊임없이 사랑하며, 부모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해주고, 지치지 말고 아이 곁에서 늘 말 걸어주는 동시에, 내 아이를 또 다시 바라봐 주는 것이 기본이지 않을까 싶은거다. 나와 내 아이 사이의 교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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