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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신을 죽인 여자들
소설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작품이다. 내가 언제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의 작품을 또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강한 것들이? 다가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왜 나는 남미 출신 작가들은 으레 조금씩은 그러하지 않을까(무엇이 그러하다는 말인지-.-!)라고 지레짐작 하는 것일까. 못난 추측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딱히 뭐랄까. 그저 불성실한 개인만의 추측 때문은 아니고, 이번 소설은 조금은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접해왔던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과는 또 살짝 다른 성격의 작품이지 않을까.
보통의 범죄 스릴러, 혹은 호러 장르를 생각할 때 따라오는 요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개인의 평범하지 않았던 가족사, 성장과정에서 주인공을 괴롭혀왔던 고통과 장애물, 개인과 집단의 심리적 접근(교집합적인 문제)을 포함한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문제적 인물들의 사회 부적응과 같은 불안적인 요소와 함께 이를 끌어안고 걸러낼 수 있는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의 자정작용이 부족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는 묘하게 다양한 요소들을 배치한 피라미드 위 최상단에 종교적 문제를 배치하고 있다. 범죄와 종교라.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예수는 제자들을 물리고 홀로 기도하는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아버지께 애원의 기도를 올렸던 것을 성경에서 본 적이 있다. 아니 그렇게 배우고 일평생 기억하며 살도록 들어왔던 것 같다.
피할 수 있으면 비껴가게 해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처절한 애원, 혹은 삶의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대목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어떤 비범한 존재로 인식되는 딱딱한 시선을 다소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끝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며 다시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이 작품에서 함께 생각해야 할 요소들은 인간적인 예수의 고백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게서 거두어 달라는 말 보다는, 이어지는 뒷문장에 더 큰 무게감이 실려 있는 것은 아닌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작가는 작품에서 이 부분을 왜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 중 이를테면 가장 중심인물로 보여지는 인물인 홀리안과 카르멘에게 종교는 어떤 차원의 세계였을까.
소설의 사건은 30년 전 열일곱의 어린 여학생 아나의 토막 사건으로 시작되고 있다. 소녀는 왜 죽어야 했을까. 왜 범인은 사체를 토막내어 불태워야 했을까. 이 모든 알 수 없는 의문의 행위들과 절대적 신념의 종교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딸의 죽음을 끝까지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사건으로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매. 그리고 인간적 사랑을 쫒아 신과의 언약을 깨는 홀리오와 아나의 진정한 지지자이자 친구였던 마르셀라를 통해 소설은 이어진다. 책은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과 같은 이야기를 실은 구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책을 읽으면서 줄기차게 물고 늘어졌던 부분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잘못을 신은 그저 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용서 할 수 있을까. 죄를 범하는 이들의 주장처럼 이 또한 신의 뜻이니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죄 역시 신의 뜻이란 말인가. 범죄와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이 결국 숨을 곳은 신의 그림자와 신의 날개 밑이라면, 인간이 그토록 신께 의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응당 흔들려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작품 안에서 만나는 인물인 홀리안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암시를 거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더불어 그와 함께 피해당사자였던 아나의 첫째 언니인 카르멘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데 당연해 보인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자기 합리화의 덫에 안착하려고 하는 것일까. 작가는 왜 두 인물을 이렇게 그려낸 것일까. 이는 예수가 자신의 나약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고백의 무게를 자신의 아버지인 신께 돌리려 했던 순간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신실한 종교인에게는 반감을 살지도 모를 이야기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이므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잠깐의 인용이다. 홀리안의 생각들 중 일부를 들여다보자.
-그(아들 마테오)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지금도 그를 찾고 있지만, 나는 아무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아나가 죽은 후로 아내가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
(중간생략) 카르멘이 불임이 된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는 두려웠으나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믿었던 신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 숨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소극적이면서도 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홀리안, 적극적이면서 결단력 있는 행동을 옮기는 카르멘. 무엇을 연상할 수 있을지 가만히 생각한다. 문득. 에덴동산에 살았다던 아담과 이브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모든 죄를 자신의 여인 이브의 탓으로 돌렸던 그는 어쩐지 아담과 닮아있다.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가 그러했던 것일까. 작가 역시 성경 창세기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제 정리를 해야한다.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사건과 인물들의 관계를 매우 정교하게 그려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연계도 그렇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성격과 작품 안에 녹아드는 인물들의 특징들이 매우 상징적인 동시에 작품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소 비중이 적은 인물인 마테오의 설정 역시 작가의 전체적 의도 안에 잘 안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작품 안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들이 등장한다. 대성당 역시 그 중 하나다. 작품을 완독한 이들이라면 작가가 의도하는 대성당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왜 제목이 ‘신을 죽인 여자들’이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생각 중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아 보인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자주 언급해서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드는 지금이다. 복잡한 것들일랑 다 내려놓고 들여다보자. 어쨌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마다 자기만의 아름다운 대성당 하나쯤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