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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을지세계문학선 18
E.M.레마르크 지음 / 을지출판사 / 1989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마스크를 쓰고 책을 읽은 건 처음인가 싶다. 아들이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묻는다. 왜 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어요? 어색해진 나는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만히 웃어준다.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냄새는 줄곧 기관지 천식으로 골골거리는 나를 자극해왔다. 그 때문에라도 서둘러 완독을 해야했는데, 자꾸만 일들이 생기다보니 시간이 자꾸만 지나가고 있었던가보다. 읽기가 거의 끝나가는데 더 참지 못하고 오늘 아예 덴탈 마스크를 쓰고 책을 완독했던 것을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으려한다.
매캐한 먼지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일까. 작년에 오래된 책을 좀 골라서 처분했었는데 이 책은 예외였던가보다. 1992년이면 언제적인지. 근 삼십년 전 출간된 책인데 용케도 내 집에 숨어 있던 책이라니. 책을 읽으면서 신간으로 새롭게 출간된 책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언제나 사담으로 시작하는 중이다. 지금도 이렇게....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책은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전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것도 아닌데, 레마르크의 소설은 처음인가 싶다. 강렬한 첫 인상은 ‘뛰어난 묘사’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인물의 심리묘사, 전쟁이라는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해가는 작가의 필력에 나는 뭐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줄곧 빠져들곤 했었다. 폭탄을 맞고 갈갈이 찢긴 육신. 그것은 고귀한 생명체인 인간의 육체가 아닌 그냥 단순한 덩어리일뿐이고, 화염에 타버리고 그을린 고기 덩어리와 같은 것들로 묘사된다. 전쟁은 인간이 지닌 이성을 빼앗아가는가도 싶다. 이들에게 생명의 가치란 무엇일까. 전쟁의 잔인함과 함께 극한으로 치닫는 폭력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상실되어가는 인간 본연의 이성이라는 감정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말이다. 이상하게도 레마르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묘하게 오래전 읽었던 소설 한 권을 떠올리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라는 그 소설을 말이다. 깊은 여운과 울림으로 남아있는 그 소설이 자꾸만 기억이 나는 그 이유를 또 여러 번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센티해졌다. 각설하고 레마르크의 소설로 돌아와보자. 주인공 그레버는 스무 살 남짓의 젊은 병사였다. 최전방에서 기적처럼 선물 같은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가족들은 이미 떠나버리고 고향 마을은 폭격으로 인해 폐허로 변해버렸다. 절망 가운데서 작가는 주인공 그레버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만들어주는데 바로 사랑의 감정이다.
주인공 그레버가 겪어가는 육체적 혹은 내면의 변화는 소설에서 단순히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레버를 통해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 더 나아가 특수한 상황에서조차 성장해가고 성숙해가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종단에는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나 살고자 하는 욕망과 희망의 근원이 바로 진솔한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또 한가지 소설의 시점이 어쩌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봐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주인공 그레버는 히틀러가 이끌고 있는 독일군 병사이고 소련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병사이기 이전 보통의 젊은이인 동시에, 잔인한 전쟁의 포효 속에서 살아남고 싶은 욕망을 끌어안고 하루하루 버텨내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렇다는 거다. 나는 늘 서평을 쓸 때마다 이 표현(그렇다는 거다)을 잘 쓰는가도 싶다. 할 말은 많은데 정리가 되지 않을 때 변명처럼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하니까. 어쨌든 소설은 빠른 전개와 인물과 상황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지막 엔딩에 있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작가의 깊은 뜻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딴은 이 결말이기에 작품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한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소심한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최근에 출간된 책으로 레마르크의 소설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다시 구입하고, 새로 정리한 책꽂이에 꽂아두고 싶다는 것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