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꽂아 놓은 책꽂이에서 오랜만에 정호승 시인의 시집들을 ([서울의 예수], [흔들리지 않는 갈대]) 꺼내 읽어 보았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펼쳐서 그의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보니, 시집들을 사서 몇번이고 읽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확실히 '꽃'보다 '밥'을 위해 살고 있지만). 꽃을 소중히 생각하며 보냈던 시절입니다. 그때의 제가 가끔 현재의 저에게 때때로 편지를 보내온다고 느끼는 걸 보면, 제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정호승시인의 시집들을 꺼내서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출간된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처럼 '인생에 용기가 되어줄 이야기'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입니다.

읽고 나서 강하게 머리 속에 남아있는 글들이 있고,작품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서 제가 찍은 사진들과 함께 포스팅 해봅니다.

책의 일부만 맛보기로 발췌했기때문에, 정호승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포스팅 보다는, 산문집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합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이후, 7년만에 정호승 시인이 내놓은... 진정한 힐링을 보여주는 산문집입니다.)

 

 

 

p.249 꽃 한 송이가 밥 한 그릇보다 더 귀할 수 있다.

 

 

‘맞아, 꽃 한 송이가 밥 한 그릇보다 더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그러자 제 마음에 힘이 솟았습니다. 그동안 청춘의 산맥을 넘어 장년의 강을 건너 노년의 산기슭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껏 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만 꽃보다 밥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오랫동안 자성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저로 하여금 다시 그 청춘의 시절처럼 밥보다 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행여 지금 제가 아름답다면 그래도 청춘 시절에 밥보다 꽃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여 지금 제가 아름다움을 잃었다면 꽃보다 밥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꽃이 없으면 제 삶은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제 삶에 꽃이 피지 않으면 봄도 가을도 오지 않습니다. 제 삶에 꽃이 더 소중해야 비로소 저는 한 사람 아름다운 인간이 됩니다.

 

 

 

p.106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

 

 

분노는 벌레처럼 저를 갉아먹습니다. 어떠한 분노든 제 인생을 쓰러뜨립니다. 분노에서는 제 인생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긍정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 단 하루라도 분노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분노의 가슴을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제 삶이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바로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는 이 말씀 덕분입니다.

이 말씀은 제 분노의 가슴을 부드러운 손길로 씻어주고 재워줍니다. 더러워진 제 몸을 씻어주는 맑고 따뜻한 물과 같습니다. 하루를 다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저는 이 말씀을 보석처럼 꺼내 생각합니다. 해가 질 때까지 오늘의 분을 다 풀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품고 잠자리에 들었는지 생각합니다. 만일 오늘 하루의 분을 다 풀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면 지금이라도 분을 풀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그날 하루의 분이 다소 풀립니다. 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1년이 모여 인생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분을 푼다면 제 인생 전체에 쌓일 분노의 양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p.75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그때 문득 봄이 오면 왜 꽃샘바람이 꼭 불어오는지, 나뭇가지가 왜 바람에 잔잔하게 부러져 거리에 나뒹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까치와 같은 작은 새들로 하여금 집을 지을때 그런 나뭇가지로 지으라고 그런 것입니다. 만일 꽃샘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또 떨어진 나뭇가지가 마냥 크고 굵기만 하다면 새들이 그 연약한 부리로 어떻게 나뭇가지를 옮길 수 있겠습니까.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습니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나뭇가지가 꺾였지 새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p.91 펜을 바꾼다고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펜이라는 도구를 바꾸어야 하는게 아니라 제 글씨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원고가 잘 써지지 않아 노트북을 바꾼 적도 있습니다. 노트북이 너무 구형이라 인터넷 속도가 느린데다 무엇보다도 자판을 쳤을 때 손가락 끝에 전달되는 느낌이 갈수록 거칠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간 쓸 수 있는 글도 제대로 못 쓰겠다 싶어 새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노트북을 바꾸었다고 해서 원고가 잘 써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나무라는 것과 같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본질에 있었습니다. 제 글씨체가 문제이지 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속이 변해야 겉이 변할 수 있고, 본질이 변해야 현상이 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본질의 변화에는 무관심한 채 외양의 변화만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자신은 변하지 않고 남이 변하기만을 바라는, 자신은 탓하지 않고 남만 탓하기를 즐기는 삶의 부정적 태도 입니다.

 

 

p.422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제 책상 서랍 속에도 손목시계가 몇 개 있습니다. 기념품이나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직접 산 것도 있습니다. 예전엔 시계 하나 지니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사용하지도 않는 시계가 몇 개나 됩니다. 시계가 많다고 해서 시간이 많아지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시계 속에 시간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시계는 시간이 아닙니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인지할 수 있는 물건일 뿐 그 속에 제 인생의 시간은 없습니다. 저는 시간 안에 사는 존재이지 시계 안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은 소멸돼가는 본성을 지녔지만 시계는 하나의 물체 그대로 존재합니다.

 

 

p.298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이는 고통의 상황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변모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통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느냐, 고통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면 고통뿐이지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 있는 고통은 있어도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p.217 흰 구름도 짜면 비가 된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구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없다면 하늘 자신조차 심심하고 지루할 것입니다. 하늘은 구름을 통하여 자신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줍니다.

구름 중에서 비를 내리는 구름은 먹구름입니다. 그런데 ‘흰 구름도 짜면 비가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비록 흰 구름일지라도 빨래 짜듯 힘껏 짜면 비를 오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가능성이 내포된 말입니다.

저는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보면 이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언제 어디에서 알게 된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 말을 안 지 참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맞아, 내 인생의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도 짜면 비가 올 수 있는 거야!’하고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p.183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는다.

 

 

봄날에 피는 꽃을 한번 보십시오.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삽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습니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책에 담긴 말씀들은 모두 제 인생에 용기를 준 영혼의 양식들입니다. 저는 지금 그 말씀의 양식을 오병이어(五餠二魚)처럼 나눠 먹고 싶습니다. 바구니에 담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예수에게 건네준 소년의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다.

과연 그 말처럼, 작가가 오랜 성찰 끝에 써낸 글들은 잠언처럼 묵직하게 마음 속으로 파고 듭니다. 각박해 진 삶 속에서 주변에 꼭 권해주고 싶은 구절들이 만재해 있는 이 책은, 인생에 순간 순간마다 펼쳐서 되새기고 싶을 만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추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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