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요네자와 호노부-[부러진 용골]을 읽다.

 

국내 출간 전부터 장르소설 독자들이 눈독을 들였던 작품이다. 이 책이 금장처럼 두르고 있는 화려한 수상경력이 책의 재미와 수준을 보장하고 가늠하는 잣대는 분명 아니지만, 그것이 아우라처럼 적잖게 시선을 모은 것만은 사실이다.  

 일독 후 느낀 점은, 이제 작가는 이 전과는 다른 레벨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다고 할까. 이 전 작품인 [추상오단장]에서 다섯 편의 리들 스토리를 사용하여 보다 다채로운 인상을 독자에게 넘겨주는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이번 작품은 좀더 진일보하여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다. 기존 작품과는 달리, 낯선 이국의 이야기로 직격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본인의 글에 대해서 자기 확신적인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해석을 허락한다. 게다가 현대가 아닌 과거라는 시제의 소급을 통해 더욱 까다로운 글쓰기가 되고 말았지만, 낯선 것들이 으레 가져오는 이물감은 거의 없었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수월한데, 그가 상정한 중세의 잉글랜드는 작가에게 조차 낯설어서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시공간임에 틀림없다. 작가 스스로도 이 당시 사람들이 시간개념을 분 단위를 의식하고 살지 않았기에 수수께끼 조립이 어려웠다고 토로하고 있다. 세밀한 시간 이야기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기존에 그가 써왔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풍의 작품이었다. 본 작은 작가가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 상투화를 배격하려는 사유와 탐색의 결실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과거 작품을 숙주삼아 비슷비슷한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이 미만해 있는 요즘의 분위기에서 분명 결단 있는 행동이었고, 그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대동소이한 장르문학에서 ‘변별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스타일이라 칭할 수 있는 외피(外皮)의 힘이다. 읽어본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이종 교배하여, 자신만의 색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좀더 다양한 소재에 목말라 있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낸 작가의 눈썰미와 기존의 안온한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온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가 상정한 배경은 마법이 존재하기에 현실과는 다른 패러렐(parallel)월드의 중세 잉글랜드다. (중세 잉글랜드이긴 하지만, 의미(역사)가 소거된 ‘무국적’ 판타지에 가깝다. 일단 소설의 공간인 ‘솔론’섬 자체가 가공의 섬이다.) 아무래도 이런 배경은 기존의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낯설 질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낯설고 생경한 것은 역시 신선함을 동반하는 바,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이국(異國)을 모험하는 기분을 선사하여 평범한 일상사에 함몰되어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작가는 미스터리와 판타지를 솜씨 좋게 교직하여 근사한 하이브리드 작품을 가공해냈다. (조직의 배신자를 쫓는다는 설정은 일면, 모험소설의 틀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비록 이 작품이 마법과 기사, 용병, 유령선, 저주받은 데인인등 판타지적 요소들로 휘감고 있지만, 기본적인 미스터리 장르적 문법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수수께끼를 쫓는다)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이것이 추리 소설임을 부단히 환기시킨다. 그리고 철저하게 ‘비이성(마법)’을 등지고, ‘이성(논리)’적 추론에 의해 사건의 해결에 바투 다가선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공정한 논리적 해명에 전력투구하고 공을 들임으로써, 작품을 주술과 마법을 그린 모험 판타지로 변질시키지 않았다. 작가 스스로 신비한 사건과 마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덜어내어, 작품이 판타지에 잠식되지 않도록 했다고나 할까. 오히려 미스터리라는 기본 바탕 위에 저주받은 데인인과의 전투장면 같은 판타지의 분위기를 덧입혀서 판타지라는 타장르의 독자와 친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미스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유희’를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는 분명 다양한 층위의 독자들을 그의 소설로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데뷔 초에 주로 일상 미스터리를 그려왔던 작가는 이제 상당히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고, 이 작품이 그 변화된 소설쓰기 방향의 정점이라 하겠다. 그의 실험이 너무도 세련되고 참신해서 독자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타진하고 있는 소설의 모험에 기꺼이 동참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가 썼던 작풍과는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뀌어 있기에 작가 스스로도 걱정 반 기대 반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추리와 판타지를 횡단하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용맹한 용병들과 데인족간의 전투씬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오크족과의 전투씬과 견줄 만큼 강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개똥벌레]라는 단편소설을 원형으로, 그의 걸작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탄생시켰듯이, 요네자와 호노부가 11년 전(데뷔 전)에 특수 설정 미스터리에 대한 동경으로 썼던 400자 원고지 250매 분량의 습작소설(검과 마법의 세계에 미스터리를 덧입힌 것)을 전면적으로 개작하여 장편으로 완성한 것이 본 작이다. 그가 십 년 전에 썼던 원형소설의 화자(話者)는 탐정 팔크 피츠존의 종사 ‘니콜라’에 해당하는 인물이였지만, 이번에 다시 쓴 [부러진 용골]에서의 이야기꾼은 마법을 모르는 인간인 영주의 딸 ‘아미나’로 설정했다. 이렇게 작품을 이끌어가는 화자를 머글(마법을 못쓰는 사람)로 설정한 이유는, 책에 등장할 마법을 자연스레 설명하기가 수월한 대상이기 때문일 터이고, 또한 독자들이 감정이입 하기에도 적절한 등장인물인 까닭이다. 여성 화자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서 능숙하게 그려나간 경험이 있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위화감없이 어색하지 않은 목소리를 들려준다. (작가는 화자를 여자로 상정한 이유에 대해 플롯 때문이라고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자를 남성(가령,영주의 아들)로 설정할 경우, 그가 짊어질 임무가 각별히 커지게 된다. 예컨대, 데인족과의 전투가 가까워질 때 영주의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한편, 소설상에서 다채로운 인종의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오고 갈수 있는 교역이 번성한 솔론섬을 무대로 삼은 것도 계산된 작가의 주도 면밀한 마름질인 셈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주제에 효과적으로 상응하는 배경을 선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마법의 안개가 자욱한 12세기 중세는, 작가 자신이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뒤섞어 혼종(hybrid) 장르의 매력을 펼치기에 적절한 배경임에 틀림없다. 이 시기는 뭐랄까, 이성과 비이성이 혼재하는 무대이기에, 미스터리(이성)과 판타지(비이성)의 대결의 장으로는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이 둘을 절묘하게 형질변환시켜 새로운 진경을 독자에게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엘리스 피터스의 [수도사 캐드펠]을 통해 일본 독자들이 중세 유럽 시대에 비교적 친숙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중 하나라고 밝힌다 .)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데인족의 등장은 이 작품에서 매우 흥미로운 요소이다.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적인 존재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법적 세계 이해(산자/ 죽은자로 나누는 세계)를 금가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섬뜩한 얼굴이었다. 턱수염을 기른 불굴의 전사들의 낯빛은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그들의 삶을 말해주듯 핏기 없이 창백했고, 끔직한 살육을 자행하면서도 격앙이나 분노 등 일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p.369)’

 

그들은 보통 인간의 인식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런 불가해한 것에 대해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작가의 첫 번째 노림수 일는지 모른다. 이들의 등장으로 작품은 돌연 긴장감과 공포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는 효과를 얻는다. 개인적으로는 초반부분에 전투의 베테랑인 용병들의 소개를 읽으면서, 그들과 대적할 존재가 강하고 두려운 존재여야만 하겠다고 예상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작가는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력을 갖고 있는 데인인을 창조해 냈다. 목을 베지 않는 한 그들은 괴멸시킬 수는 없다. 작가가 그들을 작품으로 끌어들인 이유를 좀 더 확대해석 한다면, 저주 받은 데인인은 인간의 비이성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지를 절단할지라도 잘려 나간 자리에 붙이면 감쪽 같이 붙는 그들의 특성처럼, 인간의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비이성의 특질은 죽지 않고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광기와 비이성일 수도 있고,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보여주었던 집단적 비이성일 수 도 있다. 그런 비이성이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인류역사와 함께 불사(不死)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저주’라 부를 만 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중세라는 배경은,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의 빛과 어둠이 뒤섞인 시기였다. 저주받은 데인족은 인간 이성이 아직 어둠 속에서 무지와 몽매에 포위된 채 야만성에 휘둘렸던 인간들에 대한 알레고리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팔크 피츠존’과 조수 ‘니콜라’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주체적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라 말 할 수 있다. 분별력과 논리로 무장하여 사건의 진상에 다가서는 데카르트적 인물들은, 근대 과학의 태동을 눈앞에 둔 중세라는 분위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한편, 20년간 철문에 갇혀 있던 데인족의 일원이었던 토르스텐을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로 보아도 무방하다.. (토르스텐과 비슷한 또 다른 존재를 언급해야 마땅하나,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그 부분은 함구해야겠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저주의 사슬을 끊으려 하고, 당연히 데인인들의 저항은 거셀 수 밖에 없다. 독자들 중에는 중세라는 배경임에도 종교적인 면이 부각되지 않은 것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는 요네자와 호노부가 스스로 작품에 종교 색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 한다. 영주와 교회의 권한 다툼까지 그리게 되면, 작품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중세 사람들이 신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종교부분에 관한 묘사는 자제 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국내 출간작들. 가장 이색작이라면, 역시 [부러진 용골]이다. 후속작 계획은 없다고 하니, 그 독특한 재미를 오롯이 이 작품을 통해서만 즐길 수 밖에 없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소설을 쓸 때, 미스터리를 세로축,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가로축으로 해서 두 개의 기틀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즐겨 쓰는데,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방식을 늘 고수한다고 한다.

[부러진 용골]에서 세로축은 누가 영주를 죽였는가?(Who done it?)이고, 가로축은 ‘솔론제도에서 벌어지는 용병과 저주받은 데인인의 대결’이라 하겠다. 이 횡축과 종축의 착지점이 겹쳐지는 부분에 예기치 못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숨은 그림 찾기를 할 때처럼 집중력을 갖고, 책을 읽었지만, 작품의 말미에선 예상치 못한 결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의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눈을 잔뜩 부릅뜨고 보았지만, 마술사의 손동작에 속절없이 속았을 때의 기분을 대부분의 독자가 느낄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결론 부분에서 독자의 반응은 허를 찌르는 반전에 감탄으로 획일화된다. 

그리고 하나 더, 후반부에 부각되는 스승의 사랑을 작가가 과장으로 들뜨지 않고 정제된 문장으로 담담하게 묘사한 부분은 내가 이 책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하는 부분이다. (여러 차례 읽어서 머리에 인이 박혀있을 정도다.) 감동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깊이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면, 내가 느낀 것이 바로 그러했다. 반전의 충격과 감동이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빠르게 마음 속에 차오른다. 이런 흔치 않은 경험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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