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거짓말에 대한 킬러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탄환의 심판], 전편인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에도 찾아보면 거짓말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봐, 내가 하는 일의 절반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누가 더 거짓말을 잘 하는지 알아내는 거라고. (링컨차 p.126)

"나한테 거짓말한다는 게 문제야. 모친이나 세실한테야 아무 상관없다. 원한다면 목사와 경찰한테라도 거짓말을하라고. 하지만 내가 물어볼때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마. 나는 자네가 사실을 말했다는 것을 전제로 움직일 테니까.(링컨차 p.149))

 

 

 

 

 

 

 

(어떻게 보자면, 진실과 거짓도 양면의 동전처럼 함께 공존한다. 비록 그것이 불안정한 동거이긴 하지만. 진실과 거짓은 깊은 상호관계가 있다. 거짓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잘 확립된 참말의 체계가 먼저 있어야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거짓과 진실은 서로 살을 맞대고 있는 실존의 양상이다.)

 

 

[탄환의 심판]을 읽다.

 

작가들은 첫문장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첫문장 몇 줄만 읽고 별 감흥을 못느껴, 책을 던져버릴 성급한 독자들이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만남에 좋은 인상을 보이려고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는 여인처럼, 작가들이 서두에 들이는 노력은 각별하다. 나는 오랫동안, 스티븐 킹이 [톰고든을 사랑한 소녀]에서 썼던 [세상이란 놈은 이빨이 있어서 그놈이 원할때면 언제라도 너를 물어뜯을 수 있다]라는 문장을 소설 서두에 대한 빼어난 예로 꼽아 왔었다. 이말이 인생에 대해 지극히 공감가는 문장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분위기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완벽한 문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또하나의 서두부분의 모범적인 예가 될만 한 소설이 있다. 소위 킬러 오프닝(killer opening)이라고 부르는 것의 완벽한 예...

 

마이클 코넬리의 [탄환의 심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 그들은 법원 건물 안에 들어설 때 부터 앞으로 거짓말을 듣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이 정해진 자리에 앉은 것은 거짓말을 듣겠다는 동의와 같다.]

 

이렇게 말하며 이 책의 주인공인 미키할러 변호사는 '모두 거짓말을 하는 곳에서 진실이 되는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밝힌다.

누군가는 소설의 서두를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첫 4개의 음표에 비유했는데, 새삼 그말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이클 코넬리가 첫문장으로 선택한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메시지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혈류처럼 관통하고 있다.

이 구절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의 첫소절만큼 인상적이라서, 세월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을만큼 강력하다. 즉각적으로 독자는 전체 이야기의 톤을 알아차릴 수 있고, 다양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단순한 그 한 문장 안에서, 나는 악의에 찬 거짓말부터 우리가 매일매일하는 자기 기만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 만연한 거짓말을 본다. 그안에 두뇌발달과 더불어 거짓말을 하도록 진화한 존재인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그 인간들 사이에 과장, 꾸밈, 유언비어, 속임수, 위선, 허위, 날조, 기만, 사기, 배반, 궤변, 허풍, 사칭, 위증..등 본질은 같지만 각기 다르게 부르는 거짓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그 안에 반유대주의에 휘둘린 드레퓌스 재판이 있고, 나치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재판이 있고, 유전무죄의 상징이 된 OJ 심슨 판결이 있고, 돈과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는 현재의 검찰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서두를 읽으면서,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미키 할러가 이야기했던,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고,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없이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p.35)이라는 냉소적인 말을 떠올렸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서두를 여는 이 짧지만, 강렬한 문장과 함께 우리는 [탄환의 심판]이르는 문지방을 건넌다.

 

 

 

두남자의 만남 -동전의 양면

 

 

이번 작품 [탄환의 심판]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속편 격이라는 점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두 주인공의 만남이라 하겠다.

미키 할러 변호사와 해리 보슈 형사의 조우. 코넬리의 팬이라면 한번쯤 꿈꿔 보았을 그런 장면일텐데, 이 작품에서 드디어 둘은 같은 페이지에 등장하게 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팬들은, 포아로와 미스 마플이 함께 등장한다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을 것이며,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가가 교이치로 형사와 유가와 마나부가 같은 작품에서 만나는 장면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 주인공이 함께 등장한다면, 조금은 이야기가 산만해 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며, 책을 읽었나갔는데, 결과는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코넬리는 두 주인공에 50: 50의 균등한 힘을 배분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엄연히 할러의 책이고, 보슈는 할러를 떠받치는 캐릭터이다. 읽어본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보슈가 보조역할이긴 하지만 그 존재감은 상당하다. 물론 코넬리가 성공한 전작에 대한 부담과 같은 패턴의 반복으로 인한 상투화에 대한 걱정으로 보슈를 등장시켰다고, 비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비슷한 강도에는 타성화되고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근육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선 점차적으로 무게를 올려 부하가 더 걸리게 만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코넬리는 그저 더 무거운 추로 보슈를 이용한 것일까?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코넬리는 속편 작품에 좀 더 강한 양념을 써서 책을 팔아보자는 심산으로 보슈를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마이클 코넬리는 이 두남자가 등장하는 부분을 독자들만큼이나 고대했고, 즐거워했던 모양이다. '둘이 함께 있는 페이지를 쓸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할 정도로 작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니, 이 대목에서 책의 호흡이 어떠한지 눈여겨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두 남자는 왜 만났는가?

 

 

코넬리가 이 둘을 대면하게 한 이유는 우선 해리 보슈가 미키 할러의 이복형이라는 설정이 예전 작품 (블랙아이스(1993))부터 있어왔기 때문이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나이차이는, 해리 보슈가 1950년생이고, 미키할러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것이 1971년에서 72년 사이라고 할때, 이때 미키 할러의 나이가 다섯살에서 여섯살이 정도였으니, 둘의 나이 차이는 최소한 15살차이 이상이다.) 작가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두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면서 부성(fatherhood)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일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둘의 만남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키 할러와 해리 보슈가 정의(正義)라는 방정식의 다른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미키 할러는 '변호사'쪽, 해리 보슈는 '경찰'쪽, 즉 똑같은 사법시스템을 다르게 바라보고 경험하는 사람들인 셈이다. 할러와 보슈가 각각 로스엔젤레스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할리우드에 살고 있는 것 ('여기서는 선셋 대로가 보이고, 우리집에서는 유니버설이 보이는 군'(탄환의 심판, p.535))도 같은 맥락이고, 후반부에서 '산의 양편'에 대한 비유 역시 ('그와 내가 산의 양편을 하나식 차지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 같은 느낌'(탄환의 심판,p.545), '우리 집에서도 비슷한 전망을 볼 수 있소, 반대편이라는게 다를 뿐(탄환의 심판,p.533)) 이러한 바탕에서 연유한다. 똑같은 장소에 대한 다른 두개의 풍경을 보고 있는 두 남자.

전통적으로 경찰과 변호사는 서로를 배척하는 집단이다. 한쪽은 범인을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하고, 한쪽은 빼내려고 하니, 그들의 반목은 1+1=2만큼이나 자명한 결과이다. 경찰과 변호사는 마치 몽구스와 코브라처럼 천적관계인 셈이다. 이러한 상호간의 증오는 '경찰인 당신이 변호사한테 피를 주겠다고 자신해서 나서다니. 경찰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다시 한 패거리로 끼워주지 않았을 거요.'(탄환의 심판, p.543) 라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코넬리는 그러한 변호사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검사들에게도 만연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검사들 중에는 변호사를 그가 변호하는 범죄자와 겨우 한 끗밖에 차이나지 않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라 준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사법 체계라는 톱니바퀴 속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존재로. 대부분의 경찰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똑같이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신경에 거슬렸다.(탄환의 심판, 277)"

 

 

실제로 코넬리는 이러한 경찰과 변호사 사이에 존재하는 뿌리깊은 반목의 분위기를 책에 담고자 많은 시간을 경찰들, 변호사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때로는 양쪽과 동시에 함께 있었는데 양쪽의 살벌한 분위기때문에 정말 신경이 곤두서는 시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런 깊은 감정의 골때문일까, 이 두 주인공의 첫만남은 신경전으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상호작용에 타들어가는 도화선을 바라보듯 마음을 조리며 바라보게 된다.

 

 

 (미키할러와 보슈는 동전의 양면같은 존재다. )

 

 

 

결국 이 책에서 작가는 소설 밖의 독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할러와 보슈는 동전의 양면같은 존재라는 것.("우린 동전의 양면이에요. 난 그저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이오.(탄환의 심판, p.210)" 그것은 결국 변호사와 경찰은 동전의 양면처럼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며 엄연히 존재하는 집단이라는 말이다. 유죄이긴 하지만, 극단적으로 악(惡)한 인간은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을 변호하여 그들의 죄를 중화시키고 희석시키는 미키 할러. 그리고 도덕관념이 소거된 인물들을 감옥으로 보내 단죄하고, 악을 뿌리뽑는 임무를 가진 해리 보슈. 그들은 각각 거대한 법의 시스템 아래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코넬리에 따르면, 이번 책에 해리보슈를 등장시킨 또 다른 이유는, 보슈를 미키 할러의 눈을 통해서만 보이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독자는 오로지 미키할러의 관점을 매개로만 보슈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13권의 책에(이 책의 출간기준) 등장한 해리 보슈는 3인칭 혹은 1인칭 시점으로 그려졌기에, 독자는 그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이 그를 아프게 하는지, 어떤 것이 그를 치유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이번 [탄환의 심판]에 이르러 처음으로 독자는 해리 보슈의 생각을 알지못하게 된 셈이다. 그의 누그러뜨린 내면을 일절 볼수 없기에 보슈는 더욱 단단한 외관의 남자로 보인다. 작가는 이 신선한 느낌을 독자가 받기를 원했고, 그 시도는 상당히 성공적인 듯 싶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해리 보슈가 달라진것은 아닐터인데, 다른 작품보다 유독 더 고독해 보였다. 밤 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처럼 그는 쓸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할까. 시점의 선택방법으로 독자에게 이런 새로운 맛을 선사하는 작가에게 감탄하게 된다. 그 맛은 착시처럼 신기하고 유쾌하다. 마치 크기가 변하지 않는 달이, 머리 위에 있을 때 보다 지평선 근처에 있을 때 더 커보이는 착시현상처럼 말이다.

 

 

 

 (동전의 양면, 혹은 산의 양편.)

 

 

접점 : 프랭크 모건

 

 

이 작품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미키 할러와 해리 보슈가 세번째로 만나는 장면이었는데, 이 장면에서 둘 사이에 접점이 있음을 확인한다. 그 접점이란 바로 재즈 색소폰 연주자 '프랭크 모건(Frank Morgan)'이다. 미키 할러는 프랭크 모건의 음악을 듣고 있는 해리 보슈에게 모건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자신의 아버지가 프랭크 모건의 변호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해리 보슈는 그말에 깜짝 놀란다.

이 장면은 표식을 가진 자들끼리 서로 알아보는 부분이고, 궁극적으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부분이다. 타자(他者)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장면이자, 내안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장면..이 장면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 나는 졸업식 사진을 찍기전에 여학생이 거울을 잇달아 들여다 보듯, 이 장면을 수차례 들춰보았음을 고백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자신과 해리 보슈는 매우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재즈(Jazz)팬인 점만큼은 똑같다고 말하며, 자신이 듣는 곡이 곧바로 보슈의 음악선곡 리스트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코넬리는 글을 쓸 때 재즈를 즐겨 듣는데, 그 이유는 가사를 지닌 음악처럼 방해를 하지 않고, 재즈가 갖는 즉흥성이라는 본질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넬리는 이 작품을 쓸 당시, 프랭크 모건을 집중적으로 들었고, 따라서 작품 내에서 보슈 역시 프랭크 모건을 듣는다. 코넬리는 자신의 주인공인 보슈가 프랭크 모건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삶과 포개지길 바랬던 것이다. 마이클 코넬리는 [탄환의 심판] 바로 전에 썼던 Overlook(2007)에도 해리보슈가 어둠 속에서 전화가 울리길 기다리며, 프랭크 모건의 2004년 앨범인 [City Nights]를 듣는 장면을 첫페이지에 넣을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왔다.

코넬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음악의 뒷편에 있는 이야기로 부터 영감을 얻는다. 프랭크 모건은 소리를 내기 위해 힘겹게 싸워야했다. 그는 중독과 싸웠으며 몇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변화를 주기 위해 살아남았다. 프랭크 모건과 함께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 대학에서 그와 공동 강연을 했던 것은 가장 충족감을 주었던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우리는 학생들에게 음악과 글쓰기의 창조적인 상호작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 한 며칠은 매우 만족감을 준 대단한 시간이었다. 그는 좋은 이야기꾼이었다. 안타깝게도 모건은 2007년 12월에 타계했다. [탄환의 심판]은 그에게 헌정된 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이 프랭크 모건에게 헌정된 작품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코넬리는 프랭크 모건처럼, 미키 할러도 중독에서 회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경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미키 할러와 연인이 될 뻔했던, 재활원 집단 치료 회복 기간에 만난 '레이니 로스'도 같은 맥락에서 책에 등장한다. 그렇게 본다면, 코넬리가 왜 1편인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운전사로 나왔던 '얼'대신, 옥시코돈 (진통제) 중독자였던 '패트릭 핸슨'을 운전사로 기용했는가하는 의문도 풀리게 된다. 미키 할러는, 중독자였던 그에게 유달리 연민의 감정을 보이는데, 그것은 할러 자신도 약물 중독이라는 긴 터널을 헤쳐나왔기에 그에게 동지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우리 둘 중 한명이 유혹을 느낄 때 다른 한명이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야.(탄환의 심판, p.285)) 그는 패트릭을 돕는것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 믿으며, 계약금대신 지불한 패트릭의 서핑보드를 되찾아주기도 하는데, 여기서 서핑보드가 상징하는 것은 '역경'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게 해주는 도구를 우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약이 줄수 있는 포근한 세계로 가고 싶은 유혹의 파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에 다름아니다. 할러가 패트릭을 돕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자, 약자에 대한 따스한 베풂을 통한 '속죄'의 다른 이름이다. 전작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자신을 스스로 '교활한 천사'라고 불렀던 할러는 이제 달라지려하고 있다.

 

 

 

양심의 위기 그리고 변화

 

1편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에 나왔던 미키 할러는 변호사와 범죄자 사이를 나누는 유치장 철망 어느쪽에 서 있는지 모호함을 느끼는,(링컨차 1권 p.24) 조금 더 속물에 가까운 어두운 느낌의 변호사였다. (하지만, 부패와 발효가 같으면서도 다르듯이, 미키 할러는 그저 돈만 밝히고, 형량거래를 하는 타락한 변호사는 아니었다. ) 그런데, 2편인 본작 [탄환의 심판]에서 미키할러는 그때와는 조금 색깔이 다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소위 '양심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가 믿는 법제도와 현실 사이의 아찔한 낙차에 울렁증을 겪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준열한 의식을 갖게되면서, 그는 흔들린다. 물론 그 도정에는 약물중독으로 인해 전처와 사랑하는 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유도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많은 변호사들을 알고 있지만, 그들중 누구도 밤잠을 설치거나, 자신들의 영혼을 팔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에 나는 소설을 썼다."라고.

하므로 이 작품에서 딸 헤일리의 입을 통해 나온 "아빠는 항상 나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 같다"(탄환의 심판, p.199)라는 말은, 결국은 할러 자신이 회의감에 휩싸여 자신에게 던진 뼈아픈 질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한 쓰디쓴 자각 속에서 미키 할로가 지향하는 세계는 다음과 같은 말에 녹아들어가 있다.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아빠 같은 변호사한테 도움을 받아서 사실을 설명하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어. 법이 아주 복잡해서 증거니 뭐니 하는 것들과 관련된 규칙을 전부 알지 못하는 사람이 혼자 변호를 하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아빠가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그렇다고 아빠가 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동의하는 건 아니야. 혹시 그 사람들이 범인이라면 말이지. 아빠가 하는 일도 제도의 일부야. 그리고 아주 중요해."

 

 

그러나 미키 할러는, 검사와 변호사가 하는일이 이제는 불균형스럽게 돼버렸음을 알기에 그의 말은 공허하게 공중분해 되어버림을 깨닫는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깊게 패인 손금처럼 명백한 사실이다. 회의감이 든 할러는 후반부에 "보슈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자신이 변호사가 아니라 경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보슈에게 변호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알린다. 이 부분은 그의 딸 헤일리가 언급한 "아빠도 엄마처럼 나쁜 사람들을 감옥에 넣으면 안돼요?(p.199)"라는 말과 더불어 앞으로 미키 할러의 행보를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변모의 징후를 담고 있는 장면이랄까. 할러가 자신도 어쩌면 경찰(혹은 검사)이 될 수 있지 않겠냐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 것은, 자신이 투신해온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실망의 반작용임과 동시에 새로운 방향성을 통한 '구원'의 모색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다음 작품인 'Reversal(2010)'에서 미키 할러는 변호사 역할에 염증을 느끼고, 검사로 직업을 전환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영민하게도 검사로의 극적인 존재변이를 위해 이 작품에 씨앗을 이처럼 미리 심어 놓았던 것이다. 할러는 동전을 뒤집듯이, 이제 방향을 바꿔 법의 다른 편에 서서 사물을 바라보게 될것이다.

 

 

 

 

 

 (THE BRASS VERDICT..제목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탄환(구리 금속외피)에 의해 길거리에서 집행되는 정의에 대한 경찰 속어다.)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작품의 얼개도 뛰어날 뿐만아니라, 세부적인 면에서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코넬리는 비록 법률가 출신은 아니지만, 많은 법조계 지인들의 도움으로 원체험에 밀착해 있는 사실성을 획득해냈다. 법정에서 오가는 설전이라든가, 배심원 선택의 피말리는 신경전, 재판중 이루어지는 배심원의 표정관찰,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 행해지는 세심한 전술들을 현실감 넘치게 보여준다. 조율잘된 악기처럼 문장 하나 하나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온다. 독자는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임장감을 느끼게 된다. 미키 할리의 말에 법정에 있는 배심원들이 사로잡혀 그와 함께 리듬을 타고 있을 때, 독자인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많은 코넬리의 소설처럼, 이 작품의 플롯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큰 뼈대는 코넬리가 아는 변호사에게 실제로 일었났던 일이라고 한다.코넬리는 이 작품이 창조적 천재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충실한 보도에 가깝다며 겸양을 보이지만, 그가 가공해낸 이야기를 감탄하며 읽고 있자면, 그가 법조인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무화된다. 그럼에도 코넬리는, 이야기의 속도감을 법정 바깥쪽에 두려고 노력한 듯 보인다. 그리고 실제 법정 배경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가능한한 적게 배치하려했다고 털어놓는다.

작가 스스로가 그것이 안전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은 변호사가 아니기 때문이고, 그의 책들이 의심할 여지 없지 실제 법조계의 일을 했던 법률가들에 의해 쓰인 법정 스릴러와 비교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코넬리는 자신의 장기인 형사 크라임 스릴러와 법정 드라마를 오버랩 시켰다. 그래서 오히려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의 힘을 갖춘 법정 스릴러'라는 독특한 색채의 소설이 탄생해서 아찔한 매력을 뽐내게 된것이다. 미키 할러가 주인공인 이 시리즈는 현재까지 두편 (Reversal(2010), The Fifth Witness(2011))이 더 나와있어 번역을 기다리는 국내 독자들을 설레게하고 있다.

 

본작은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와 친연성이 물론 높지만, 둘의 근연관계를 몰라도 충분한 재미를 보장한다. 작가가 새로운 인물을 많이 등장시킨데다가, 기존 인물에 대해서는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재미'라는 초대형 트럭을 몰고 '지루함'을 납작하게 뭉개 버리는 책.

그런 작품을 찾는 사람에게 선뜻 추천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바로 본작 [탄환의 심판]이 아닐까. 아마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반론을 펼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독자'라는 '냉정한 배심원'들도 만장일치로 이 말에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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