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유무: 이 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채 읽고 싶다면, 이 글을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이 독후감은 거의 스포일링을 하지 않도록 조심을 거듭하여 쓴 글입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은 2종류의 서평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한 서평과 그렇지 않은 서평. 이것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고, 이 책의 작법(이것은 널리 알려진 것)과 전반적인 분위기만을 다뤘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책커버에 벚꽃이 나오는 책들.. 가노 도모코의 [손안의 작은새], 혼다 다카요시의 [체인 포이즌],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 (이건 신간) 등이 떠오르지만, 역시 가장 기억남는 것은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다. (제목부터가..ㅋㅋ)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었는데 옆집의 아들이 훔쳐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옆집 아들의 걸음걸이를 보아도 꼭 도끼를 훔쳐간 것 같이 보였고, 얼굴색을 보아도 도끼를 훔쳐간 것 같았으며 말하는 태도와 동작 등 모든 것이 도끼를 훔쳐간 사람의 행동같았다. 그 뒤 얼마되지 않아서 골짜기를 거닐다가 잃어버렸던 도끼를 찾았다.그 다음 날 그 옆집 아들을 보니 동작이나 태도가 도끼를 훔쳐갈 만한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열자(列子) 설부(說符)편

 

주변에 벚꽃이 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제목에 이끌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재독하게 되었다. 다시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위에 인용한) 열자(列子)에 나오는 '잃어버린 도끼'에 대한 대목이었다. 도둑으로 보이냐, 그렇지 않냐는 것은 모두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간명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이야기. 이 책을 일독한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책을 다시 읽게 되면 처음 읽을 때의 색깔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로 내용과 인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타노 쇼고는 선입견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여, 한 방향만으로 독자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술의 트릭이 공개된 후엔 고정관념이 벗겨지면서 다른 각도로 인물과 사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마치 옆집 아들이 도끼를 훔쳐갈만한 아이가 아니라 순진한 아이로 보이듯이.

 

내가 글을 구체적이지 않고, 다소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밖에 쓸 수 없는 이유는 작가의 트릭을 공개할 수 없음에 기인한다. 다른 여타 작품과는 달리 트릭의 해답이 전체적인 주제와도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개되면 모든 재미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을 발설하여, 읽지 않은 독자의 흥을 앗아갈수 있다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진 매력을 중요한 부분을 누설하지 않고 말하고 싶다는 욕구 사이의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나는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어놓은 어떤 선이상은 넘어가지 않기로 다짐했으니.

 

 

레드 헤링 (Red Herring). 붉은 색을 띠는 훈제 청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독특한 비린내를 풍기기때문에 사냥개의 후각을 교란시키기 위해 탈출한 죄수들이 자기 몸에 레드헤링을 비볐다고 한다. 지금은 " 진짜 사실로 부터 사람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려 혼란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에 대한 영미권 리뷰를 읽다보면 이 "레드 헤링"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장르소설에는 작가가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기 위해, 거짓강조나 묘사적인 속임수를 통해 진짜 범인인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 인물이 꼭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레드 헤링으로 사용된)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작품 중간에 갑자기 살해당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몇년 전 이 책을 읽고 나고 나는 레드 헤링(훈제 청어) 냄새에 이끌려 여우 사냥에 실패한 한 마리의 사냥개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물론 '레드 헤링'이란 말은 좀 더 구체적이고 작은 범위에서 사용되는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 전체에서 사용된 큰 트릭이 결국은 레드 헤링의 냄새를 풍긴다고 느꼈다. 우타노 쇼고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보부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해서 독자의 집중력을 다른 방향으로 내몰아간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영미권에서 소위 '신빙성 없는 이야기꾼(unreliable narrator)'이라 부르는 소설 진행방식의 한 갈래인 "독자를 속이는 이야기꾼"의 전범(典範)일 듯 싶다. 우리에겐 '독자를 속이는 이야기꾼'보다는 '서술 트릭'이라는 용어로 더 익숙하다. 이 기법을 처음 맛보는 독자는 둔중한 충격으로 멍해지며, 다시 책의 첫장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내가 그랬다.) [살육에 이르는 병]을 통해, 서술트릭의 아이콘이 된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서술 트릭에 대해 "세계가 붕괴하는 듯한 착각을 가져다 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 "낭패감에 가까운 허탈감"을 느낀 것만은 분명했다.

 

뭔가 어떤 목표물을 향해 한 방향으로 죽도록 내달렸는데, 거기에 전혀 다른 결과물이 놓여 있었을 때의 충격. 작가는 그 충격을 주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웬만해선 눈치채기 힘들다. 이런 면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서 '서술 트릭'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갖고 있는 독자들도 꽤 있다. 실제로 '신빙성 없는 이야기꾼'의 대표작으로 알려져있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비평가들과 독자로부터 공정/비공정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이 소설적 재미를 갖고 있는한 '서술 트릭'에 대해 특별한 편견은 없다.

 

이 책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는 '서술 트릭'하나가 책 전체의 하중을 떠받치고 있는 얄팍한 소설이 아니다. 서술 트릭이라는 구조를 지우고, 내용만으로도 강력한 응집력을 가진 작품이이기에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서술트릭이라는 틀 자체가 너무 큰 인상을 주고 있기에 그 거대한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이야기는 주인공 나루세가 사기조직의 뒤를 캐는 현시점과 야쿠자 조직원이자 탐정이었던 과거 시점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이야기 모두 일본사회의 병폐와 맞물려 사회성도 있고 흥미롭게 전개되어 매우 빠르게 읽힌다. 개인적으론 '야쿠자 탐정시절의 나루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꼈는데, 단편에도 강점을 보이는 작가의 필력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여담인데, 작가의 다른 작품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은 굳이 분류하자면 견실한 직장인이 아니라 야쿠자 카테고리에 들어가니까.(p.21)'라는 말과 이 소제목이 겹쳐져서 웃음이 났다. 다만 '야쿠자 탐정'부분은 책의 전체 흐름으로 보아서 조금 이질적이라 매우 독립적인 하나의 다른 작품 같은 느낌이다. 회상으로 처리했지만, 액자소설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두가지 사건의 트릭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욕심에서 비롯된 듯 싶다. 작가의 [시체를 사는 남자]에선 소설의 내부 개연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액자소설 방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밀실 살인게임]은 여러 트릭의 진실을 열거법으로 나열하는 구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야기 전개에 있어 작가 스스로도 서술트릭이라는 부자연스러운 구조로 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몇몇 부분에선 개연성보다는 무리수를 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는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밝힐수는 없지만, 무리수란 서술 트릭 자체가 갖는 필연적인 숙명일 듯 싶다. 하지만 그러한 무리수를 너그러히 보아준다면, 추하고 어두운 부분을 감추고 심미화하려 하지 않고, 그악스런 생존경쟁이 일상화된 사회의 암부를 있는 그대로 까발리는 방식으로 이 작품은 보답할 것이다. 사회의 이슈를 내보이고 조명하려는 작풍을 사회파 미스터리로 규정할때, 이 작품은 그것에 부합되어 일부분은 사회파 추리소설로 읽힐 수 있을 듯 싶지만, 배경자체를 정중하게 다룬것이 아니고, 사회 문제를 전면화했다기 보다는 곁가지 소재로 다룬 경향이 있어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라 부르기엔 다소 어려울 듯 싶다. (첨예하게 파고들었다는 느낌보다는 전반적으로 약간은 가벼운 분위기가 책 전반에 지배적이라 그런 생각이 든다.)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기껏해야 나뭇잎이 파란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 있어. 지금도 짙은 녹색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지.빨간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어. 단풍나무나 은행나무처럼 선명하진 않고, 약간 은은한 빛을 띠고 있지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아, 다들 그냥 지나치는지도 모르지.하지만 꽃구경하던 때를 생각해봐.전국에 벚나무가 얼마나 많아. 그걸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어. 그러면서 꽃이 지면 다들 무시하지.색이 칙칙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야. 대부분은 단풍이 드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좀 심한거 아닌가? (p.506~507)

 

 

이 인용구에 작가의 목소리가 오롯이 담겨있다. 제목이 주는 상징성도 이 글을 읽으면 이해가 된다.(읽지 않은 독자는 알기 힘들기에 스포일러는 아니다.) 벚꽃은 아주 짧은 기간 피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거나, (일본의 경우) 전장에서 벚꽃처럼 스러지는 사무라이 정신을 표상하는데, 이 책에서 벚꽃은 또다른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인생은 짧지 않은가.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한다.(p.42)"라는 어찌보면 진부하지만, 강한 울림이 있는 이 말의 우회적 표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우타노 쇼고는 주인공들을 내몬 상황의 부조리성을 전복적 사유와 계산된 작풍을 이용하여 자신의 만들어 낼수 있는 최대치의 작품을 구현해낸 듯 보인다. 이 작품 이후, 우타노 쇼고의 뛰어난 작품들이 앞다투어 국내상륙을 했지만, 이 작품이 준 충격을 희석시킬 정도의 작품은 아직 없었기에 작가의 대표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벚꽃 지는 계절에 인생이란 아무리 오래 산다해도 결국은 찰나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책을 덮는다.'그대'가 그립지 않도록 가열차게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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