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감정으로 분칠된, 감정의 과부하가 걸려있는 글은 질색인데,기리노 나쓰오는 일단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수분기를 철저하게 뺀 그녀의 메마른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대표작 [아웃]을 읽은 후, 그녀의 글을 열심히 찾아서 읽게 되었는데, 어느 작품을 들춰보아도, 혹독하고 어두운 세계에 대한 작가의 어둑씬한 응시가 일관되게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것을 불편한 마음으로 읽다보면, 어느새 끝을 알수 없는 깊고 어두운 바다 밑쪽으로 자맥질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그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거기에는 뭐랄까, 불가해한 매력같은 것 이 도사리고 있어서, 두려우면서도 엿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로즈가든]에서 히로오가 미로에게 끌린 이유가 이런 비슷한 느낌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까닭에 꾸준히 그녀의 책을 읽게 되는것 같다. 악의로 가득찬 세계에 대해 섣부른 희망따위는 집어치운채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 이런 세계관과 기리오 나쓰오의 관계는 마치 알콜 중독자와 술처럼 분리해낼 수 없듯이, 표리일체(表裏一體)가 되어 버렸다.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는 이 암울한 세계관이 견디기 힘들다면, 역시 이 작가의 책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세계관을 떠안고, 그 진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면, 역시 읽는 수 밖에 없다. 뼈속까지 얼어붙을 것같은 날씨에 마시는 독한 술같은 그녀의 소설. 나는 기리노 나쓰오의 팬이 되지 않는 것과 팬이 되는 것, 둘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다.

 

 

 

[로즈 가든]을 잘 읽기 위해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다크]를 다시 꺼내 뒤적거리며 읽었다.(그렇다고 뭐 더 잘읽게 되는 것을 반드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장르 소설들은 한번 읽고 나면, 꽝난 복권처럼 두번 다시 쳐다보기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는 듯 싶은데, 내 경우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을 읽게 되는 경우, 이전 작품이나 이후 작품을 다시 읽어 본다. 그러면 -운이 좋다면,-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재발견하게 되는 일이 왕왕 있다.(그렇다고 해서 그 '무엇인가'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ㅎㅎ)

 

 

 

[ 나는 현관 옆 나무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30평 남짓한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나뭇가지도 울창해서 마치 작은 정글 같았다. 미로는 아마 있는지도 모를 테지만, 정원 여기저기에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가 피어 있었다. 시들어버린 장미가 있는가 하면, 지금이 한창때인 양 흐드러지게 핀 것도 있었다.([로즈 가든],p.25/ 최고은 역)]

(인도네시아의 정글 속으로 강을 거스러 올라가는 히로오와 정글처럼 보이는 장미 정원으로 들어가는 고교시절의 히로오가 묘하게 포개진다.)

 

 

 

 

 

 

 

이 단편집 내의 몇개의 작품은, 추리소설의 성향을 띄고 있지만, 작품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추리'보다는 '소설'이다.

 

특히 표제작인 [로즈 가든]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추리소설의 개념에 가닿은 작품이라 부르기 힘들다.

 

 

(정작 기리노 나쓰오는 미스테리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종종 밝히고 있다. 그녀의 소설을 즐기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초기 몇작품 이후 그녀 작품내에서 미스테리적 색채는 휘발되어 버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수수께끼 맞추기에 급급한나머지 이야기는 빠져있어 소설적 매력이 전무한 난삽한 작품들보다는, 그녀처럼 장르적 울타리를 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쪽에 신뢰가 간다. )

 

 

물론 내 경우에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여타 단편들 보다는 작품집으로 묶기 위해 시기상 가장 마지막으로 쓰여진, 표제작 [로즈 가든]에 기리노 나쓰오가 가장 많은 공을 들인것이 느껴진다.

 

이 작품에는 [다크]에서 언급되어진 학창 시절의 미로( "미로는 그 자체가 남자를 조바심 나게 만드는 존재였다. 천진난만한 예쁜 얼굴이면서도 아수라 같은 격렬한 분노를 지니고 있는게 틀림없는 소녀. "[다크],p.169/ 권일영역)가 남편 히로오의 시선에서 그려져 있다.

 

(이 단편집에 묘사된 미로보다, 두 세배 정도의 더 농밀한 어둠에 휩싸인 미로와 만나고 싶다면, [다크]를 읽으시라.)

 

 

미로의 남편 히로오가 인도네시아의 마하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강(江)의 상징성이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로와 얽혀있는 자신의 과거를 향해 기억을 되작이며, 추억의 상류를 향해 나아간다.

 

 

히로오는 미로와 멀어지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정글로 들어가지만, 결국은 미로에 대한 너울거리는 감정에 바투 다가갈 뿐이다.

 

박남철 시인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서울을 만나기 위해 더더욱 부산으로 내려간 셈.

 

그동안 미로 시리즈(장편)에서 덜 입체적으로 그려졌던 히로오의 존재감과 가려져있던 학창시절의 미로의 모습을 메워주는 단편이기에 미로 시리즈에 관심있는 독자로서는 놓칠 수 없는 단편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작품 이 외에도 귀신소동을 다룬 [표류하는 영혼],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혼자 두지 말아요], SM플레이를 소재로 한 [사랑의 터널] 모두 각각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는 단편들이다. 단편소설의 특성상 굵직한 스토리텔링이 중심이 되어버려, [얼굴이 흩날리는비]나 [다크]에서 드러냈던 미로의 헤아릴수 없는 '고독감'이 보여지지 않아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나는 미로가 지문처럼 지니고 있는 이 '고독감'을 어쩔줄 모르고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편 모두, 게이인 도모(도모베)가 주요 인물로 나오는데, 이 인물은 장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다크]에 모두 등장했던 인물이라 어쩐지 반갑기도 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이 작품이 -밤에 읽게 될 경우, 새벽을 하얗게 지새우게 되어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해야하는 소시민의 생활 리듬에 지장을 줄만큼 재미를 보장할 정도-라고 까지는 말 못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밀도 있게 전개해 나가서, 금방 읽어 버렸다. 재밌다. 기리노 나쓰오는 역시 솜씨있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이 있다. 딱히 그녀의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도 (소설의 주인공인 미로를 몰라도) 전체적으로 포진되어 있는 자극적인 소재의 강력한 흡입력으로 인해 나처럼 소설적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기리노 나쓰오의 팬이라면, 이 얇지만 내용적으로 두께감있는 이 소설집을 꼭 읽어보라고 쫓아다니며 닦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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