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와 나

젊은 날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창문에 기웃거렸었다. 밖에서 까치발에 높이 뛰기를 해가며 그 안을 들여다보고자 애썼다. 애가 타도록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집채만한 외로움과 함께하던 시절과 맞물려 있어서, 예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들을 다시 펼치면, 조금은 위험해 진다. 봉인되었던 기억들이 다시 비집고 나오기도 하고, 이지러져있던 추억들이 다시 모양새를 잡아가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월이 회한과 함께 속절없이 부우욱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지금은 그렇게 읽으라고 해도 읽을 수 없지만, 옛날의 나에게 있어서 하루키의 말들은 치유와 위안에 다름 아니었다. 하루키의 책들은 그시절, 내안의 틈새로 노도와 같은 기세로 새어 들어오는 현실에 대한 우울함을 막아내는 네덜란드 소년의 팔뚝 역할을 했었다.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온기가 있는 타인을 단단히 껴안게되듯이 그의 책들이 방사하던 따뜻함을 쪼이던 시절이 분명 내겐 있었다. 글이 이렇게 치졸한 감상주의에 빠져 버리는 게 싫지만, (그렇다고 너무 감상을 걷어내버린 글의 질박함도 곤란하다), 하루키의 책을 말할때 누기(漏氣)를 완전히 지우고 메마르게만 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데면데면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책에 대한 절실함이랄까, 강한 애착은 많이 희석되었다. 어떤 종류의 감정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역류해 올라가지 않는 한 말이다. 요컨대, 젊은 날의 뾰족한 감성으로는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루키의 언어표현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열 일곱살때에 느낀 일요일 아침의 분위기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틀림없이 나이를 먹어 온 것이다."(양을둘러싼 모험에 나오는 말) 현재의 감성이 꾸덕꾸덕 말라버린 나는 훨씬 물기있고 말랑말랑하던 감수성을 가진 나로 돌아가 그의 책을 읽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하려다 그만둔다.

 

잡문집의 등장

하루키의 작품을 이젠 여상스레 읽고 그에 대한 애정이 진행형이라기보다는 완료형이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엔 하루키라는 이름 위에 커다란 방점(傍點)이 찍혀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던 중 나는 신간 [잡문집]의 출간 소식을 접했다. 초대형 히트를 기록했던 1Q84가 나온 후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책이기에 아무래도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의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잡문집이라는 책 제목을 듣고, 하루키가 기존에 쓴 수필집을 짜집기 한 책인 줄 알았다. 일반적으로 나는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수필이라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만약 에세이(수필)가 일기장에나 쓸 법한 억지 감정을 쥐어짜는 감상주의로 흐를 경우, 문학적 성취는 고사하고 작가의 이미지가 범속함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 작가에 대한 환상만 바스러질 뿐이다. 그러기에 수필은 붓가는대로 만만하게 쓸 글이 아니고 작가가 위험부담을 안고 신중하게 써야하는 글,이라는 뿌리깊은 편견이 내겐 있었다. 하지만, 하루키의 수필들을 읽어보니, 산뜻한 예외였다. 일상의 이모저모를 차분하게 반추하여, 그가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다른 질감의 진정성을 획득한다고 느껴졌다. 수필의 진맛을 알게 해주어서 였을까, 번역되어진 그의 수필들은 대부분 지금도 내 서고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수필엔 독자와 작가 사이를 가르는 막을 제거해주는 기능이랄까. 개인사가 투영된 그의 글은 아무래도 독자로 하여금 개인적인 만남을 허용하고, 심지어 촉각적인 접촉을 했다는 기분이 들게하는 유사체험을 선사해 왔다.

알아보니, [잡문집]은 대체적으로는 음악이나 인물, 번역등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에 가깝지만, 수상소감이나 인사말, 대담, 짧은 소설들도 집어 넣은 모음집 성격의 책이었다. 기존에 번역되어진 것을 얄팍한 상술로 재구성 한것이 아니었고, 예상 외로 책이 두툼하여 (500페이지) 나는 주먹을 꼭 쥐며, '꼭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빼어나게 멋진 책의 외양

책의 장정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무도 말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지만, 이 이야긴 꼭 해야겠다. 간명하게 말해서 책이 너무 예쁘게 나왔다.

거리를 걸어 갈 때 사람들의 고개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 책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렇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좋다. (하루키의 다른 책들이 보면) 질투가 날 정도로 예쁘다.(책에 눈이 있다면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루키의 많은 책들(대부분의 영문판 포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압도적 존재감이다.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하자면, 함께 야반도주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소유욕을 들끓게 만든다고나 할까?

결국 책의 장정이란 덤일 뿐이고, 중요한것은 내용,이라는 해묵은 표현을 무색하게 할 만큼 출중한 외모이다.

와다 마코토가 그린 회색 쥐와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깜장 토끼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 구멍 안에 있어서, 독자가 그걸 몰래 엿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 컨셉.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가차없이 주문 버튼을 누르지 않고는, 견딜수 없을 정도로 재밌어 보였다. 구매를 거부하기 힘들다.

그리고 한가지 더! 출판사의 혁신적인 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구멍을 뚫어 입체감을 준 것 뿐만아니라, 뒷부분의 100페이지 정도를 다른 질감의 초록색 종이로 만든 점은 상찬받아 마땅하다.(겉표지인 주황색과 보색관계인 초록이 매우 돋보인다.)

책의 장정과 활자, 종이 색깔, 띠지 붙이는 법,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신경쓰고 주문하는 까탈스럽고 깐깐한 하루키조차(일러스트레이션 1984년 2월호, 인터뷰) 분.명. 이 한국판 번역의 결과물에 만족스러워 했을 것 같다.

 

 

메인보컬 하루키 (feat.와다 마코도 & 안자이 미즈마루)

아무튼 책이 쉽게 망가질수도 있다는 결함을 제외하면, 다른 만듦새는 아주 맘에 들었다. 욱씬거리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 원서의 표지도 보았다. 원서에도 와다 마코도씨와 안자이 미즈마루씨가 그린 귀여운 회색쥐와 깜장토끼가 있었다. 출판사측에서 바꿔서 만들수도 있었겠지만, 원서의 이 귀여운 이미지를 살려 국내 표지에도 정한 것은 매우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이 두사람의 존재는 이 책 [잡문집]에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두사람이 이 책의 하중을 떠 받고 있는 두개의 큰 기둥이라고까지 말할 순 없겠지만, 생략해서는 안될 중요한 조력자 같은 존재라는 거.( 이 책을 음반으로 비유하자면, 하루키가 메인 보컬이고, 이 둘은 피처링을 맡았다고나 할까.)

사실 와다 마코도와 안자이 미즈마루..이 두 이름은, 하루키의 책을 쭉 읽어왔던 독자들은 자신의 벨소리만큼이나 친숙한 울림이 있는 이름들이다.

실제로 책 말미에 회색쥐와 깜장 토끼라는 제목이 붙은(해설 대담 안자이 미즈마루 X 와다 마코토)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주 친한 친구들이 나와 하루키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들추는 토크쇼의 만담같다는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이 글을 통해서 꽤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데, 가령, 안자이 미즈마루의 본명이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사실. (몰랐었다.)

와타나베라는 이름은, [노르웨이의 숲]의 남자주인공 이름이기도 하고, [패밀리 어페어]라는 단편에서 여동생의 남자친구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였고, [밤의 원숭이]라는 작품집에 [연필깎이]와 [문어]라는 작품에도 '와타나베 노보루'가 나온다. [태엽감는 새]에서 주인공 아내의 오빠로 나오는 '와타야 노보루'도 이 이름에서 변주되어 진 것이다. 하루키가 집착하고 있는 이 이름이 사실, 안자이 미즈마루의 본명과 그들의 우정에서 연유한다는 점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이밖에도 1Q84의 여자 주인공인 '아오마메'라는 이름의 탄생비화도 이 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을 수가 있는데, 이런 것이야말로 하루키 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이라, 너무 흥미진진했다. 이것은 이 책이 갖고 있는 재미의 한 작은 예일 뿐이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이 책의 재미는 캐내도 캐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재미의 매장량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매장량 수준을 육박한다고나 할까. 나는 수많은 크릴새우 떼속에 뛰어든 혹등고래처럼 신이나서 그 재미를 마구 흡입했다.

 

기존 하루키 팬들에겐 더할나위 없는 선물

이렇듯 신이 나서 이 책을 읽은 것은, 하루키의 작품들은 내 책읽기의 원점이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균형이 일그러지 않도록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골고루 읽었지만, 하루키와 관련된 책이 나오면 주저없이 지갑을 여는 버릇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펭귄의 몸이 추운 남극에 적응하도록 특화되고, 진화되었듯이, 나의 독서방향도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음악들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어 진화되어 갔던 셈이다. 재즈나 스티븐 킹은 하루키를 알기 전부터 원래 좋아했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전집을 읽거나,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샐린저,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찾아 읽은 것은 전적으로 하루키에게 빚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이 책은 더이상 단순한 하루키 세계로 여행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내 안에서 하루키와 나눈 문화적 동질성에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밑줄 긋기 하는 장소로 탈바꿈한다. 다시 말하자면, 평소 하루키를 즐겨읽던 독자들에게 이책은 그의 세계인식과 현실 인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의 조화로운 문학적 성취에 대한 후일담을 만나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겠고, 하루키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편리한 출발점 되어 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나침반 삼아 하루키와 그가 소개하는 작품들로 나아갈 수 있을런지 모른다. (이렇게 쓰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개운치 않다.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을 순 있겠지만, 역시 재미에 대한 손해를 상당부분 감수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여야 겠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깊이와 넓이 만큼으로 밖에는 세상을 바라볼수 없는 법이라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가 이 책의 미덕을 얼마만큼 발견할 수 있을까,하고 쓸데 없는 걱정이 생긴다. 가령, 이 책에 실린 '토니 타키타니를 위한 코멘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인 '토니 타키타니'를 읽은 독자와 읽지 않은 독자가 느끼는 재미의 양과 질은 아무래도 다르지 않을까.

 

 

하루키가 좋아한 작가들 그리고 번역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에서 "[위대한 개츠비] 를 세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나가사와의 말을 빌려 스콧 피츠 제럴드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드러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그간 각종 수필집에서 지칠 줄 모르고 보여주었던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서도 볼 수 있는데, '스콧 피츠제럴드'와 '기량 있는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하루키에게 있어서 피츠 제럴드는 '독자'와 '책'의 만남보다는 '두 사람'의 만남처럼 운명적 해후였다고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는데, 그런 전후 사정을 알기에 그가 이 책에서 그에 대해 들려주는 목소리에는 유달리 힘이 실려있다.

피츠제럴드 뿐 아니라, 그의 책 전반에 편재해 있는 하루키가 사랑한 작가들(J.D.샐린저,레이먼드 챈들러,레이먼드 카버,스티븐 킹,폴 오스터등)에 대해 읽는 것을 나는 즐기는데, 그것은 그 글은 하루키만이 쓸 수 있는 타입의 글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얄팍한 지식에서 나오는 평론과 해설이 아니다. 아주 깊이 들어갔다 나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분명한 관점을 보장해준다. 예전에' 집사재'에서 출판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시리즈를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책의 말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레이먼드 카버의 해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지역을 아주 잘아는 유능한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이 책 [잡문집]의 '번역하는 것, 번역되는 것'에는 예의 하루키의 애정이 짙게 착색된 작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급 번역가로서 그가 번역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수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하루키에게 있어서 명번역이란 '매우 뛰어난 하나의 대응'이라는 의미이며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며 잘라 말하고있다. "고전이란 불릴만한 작품에는 몇가지 대안이 필요하며,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라고 밝히고 있다.

 

 

총평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루키의 글답게 지독하게 공감되는 비유들이 범람한다. 글의 수준도 수상소감이나, 책의 번역문 서문들이라 공들여 써서 고르게 균질성을 성취하고 있다. 예루살렘상 수상 수락에 대해 국내외 비난 여론이 들끌었던 시절 진땀 흘리며 썼을, 어찌보면 자기 방어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예루살렘 수상 인사말' 처럼 하루키의 팬이라면 놓칠수 없는 글들도 내장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조금은 편향적이고 전문적인 [재즈의 초상]이나 [또하나의 재즈 에세이],[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보다는 덜 딱딱하지만, [무라카미 라디오]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류의 가벼운 에세이보다는 덜 부드러운 글들을 담고 있다.

(내심 기대했던) 미수록 단편소설은 아주 짧아서, 단편이라기 보다는 '손바닥 장(掌)'자를 쓰는,장편(掌篇)이라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듯 싶은데, 원래 작품집 [밤의 거미원숭이]에 올려 놓으려다 뺀것이라 그런지 몰라도, 썩 좋지는 않았다. 이런 소설류의 정수는,하루키의 독특한 미니멀리즘이 돋보이는, 짧은 픽션집 [밤의 거미원숭이]내에 더 괜찮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이 글이 하루키의 팬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에 함몰되어 총제적 인식으로부터 멀어진 글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뭐 반박의 여지는 없지만, 적어도 급조된 관심으로 쓴 것이 아니란 사실만은 말하고 싶다.

1979년부터 2010년까지 하루키에게 있어서 나름 중요한 순간에 썼던 글들의 모음집. 작가나 출판사나 정성을 다했다는 느낌이 드는 책.

기존 하루키의 팬들은, 마치 오랫동안 좋아하며 들어왔던 가수의 콘서트장에서 친숙한 노래들을 마음껏 듣는 기분이 들것이다.

이 책의 등장에 가벼운 흥분으로 맥박이 빨라진 하루키의 팬들이 분명 여럿 있었을 것이다.

하루키의 팬이고 아니고를 떠나, 이런 책을 사기위해 줄을 서서 오래도록 기다린다해도 (설마 그런일은 없겠지만) 나는 별로 억울하지 않을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