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운 영어가 신기해서, 마냥 신나서, 뭐든 반복해서 쪽지에 적고, 응용하고, 혼자 묻고 답하곤 했다. 이런 식의 것들 ; 여자가 she인 이유 - 남자 he는 아들, 엄마는 여자이므로 hes(son)를 품고 있는 것, 이다. 그러던 중,  문법을 배웠던 어느 수업시간, 쪽지를 들춰 질문을 했다.


선생님, 명사와 명사 사이에는 소유격이 와야 하는데, '선데이 서울'은 이상해요! 일요일 서울이잖아요. 선데이 오브 서울이나 서울 오브 선데이 해야 맞는 거지요?”


여기서 '선데이 서울'은 터미널 가판대 등에서 팔곤 했던 유명한 성인 잡지였다. 진지하게 선생님의 답을 기다렸었는데, 약간의 칭찬을 기대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발견을 한 기분이었으니까.

, , 지금 뭐라 했어? 이게 어디서 이상한 걸 묻고 난리냐.”

정확한 말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위협적인 제스처와 난색을 표하던 영어선생님이 생각난다


맨스플레인을 놓고 (격하게) 대립하는 칼럼을 보며, 엉뚱하게도 '선데이 서울'이 생각났다. 그 잡지를 읽어 보지 못했지만, 표지 사진이라야 지금 보면 너무 흔한 수영복 사진들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그렇게 금기시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선생에게 나는 까진 학생, 불량이었을 거라는 것을 나중에 짐작만 하게 되었다. 나의 접근은 순수-학문적이었지만, 性적 뉘앙스가 듬뿍 담긴 단어를 교실에서 발설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금기가 발생하고 작동되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지 싶다.


레베카 솔닛의 책이 한참 인기를 얻었을 때, 제목을 보고, 책소개를 읽고, 또 리뷰를 읽고, 다시 제목을 들여다 봤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 책의 소용돌이는 시대 감각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경제적 지위, 문화적 향유에서도, 정치적 동조에서도, 지략은 막강한 경쟁력의 원천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가르침을 받겠는가, 작가가 독자에게 배우길 원하겠는가. 애인의 훈계질과 대장노릇은 이별원인이 될 뿐이다. 누군가 '스승을 품지 못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저마다 해법(解法)들이 있으므로, 동조자나 추종자가 필요할 뿐이다. 연출가가 되거나 재판관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연출자이며, 네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규.' 솔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게 솔닛의 책 제목은 못마땅하다. '남자들은'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가. 가부장적 권위주의나 성차별이 금지된 사회를 열망하는 운동가에게 어울리는 처방이기는 하다. 여성들이 노예 아닌 노예 관계를 맺어야 한다든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행한 삶 위에 있다면 솔닛과 같은 선언이 도움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가르치려 드는 남자로 인해 괴로운 어느 상황을 잠시 상상해 보자. 일상의 장()은 이미 여러 겹의 층위를 구성하고 있는데, 상대 남자의 사고방식과 행위를 '거부'하고 '금지'시키는 것에 주력하는 것은 생활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일상적 폭력을 문제 삼을 때는 여건-상황 변화의 실마리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사회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금지의 선언을 보내는 것은 이미 시작됐다. 맨스플레인이 작동되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을 무수히 찾아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성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된 행동이다. 고소해야 할까. 아니면 결별해야 할까.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면, 즉각적으로 사회는 반응해야 한다. 강제력으로 분리시키고 피해자를 보호하며, 폭력의 중단을 조치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당연한 명제를 세밀하게 일상에도 적용시키자면, 우리가 결국 집중하게 되는 것은 '법의 힘'이 될 것이다. 소외와 차별을 금지하고자 불러오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내가 『구글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한다면 어떨까. 구글이 스승이 되는 것은 저항없이 수용하는 시대를 비판하며, 차라리 지식의 경계/위계를 지우는 일을 하자고 한다면 어떨까. 나는 내가 아니다. 셀 수 없는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다. 쉴 새 없이 가르침을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 복합체다.  지식이 지략이 지성이 무력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굳이 남자가 가르치려 드는 것을 분석해서 차별을 금지하고 싶다면, 예컨대 보드리야르의 유혹 전략을 쓰고 싶다. 좀 길지만『유혹에 대하여』 서문 중에서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지울 수 없는 어떤 운명이 유혹을 짓누른다.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유혹은, 그것이 교묘한 것이든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든, 악마의 전략이었다. 유혹은 늘 악의 유혹이다. 아니 사람들의 유혹이다. ~ 유혹은 본능의 차원에 속하지 않고 기교의 차원에 속한다. 즉 유혹은 에너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와 의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생산과 해석의 모든 중요한 체계들이 유혹을 개념의 장에서 배제시킨 이유이다-다행히도 유혹 그 자체를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유혹은 외부로부터, 절대 고독의 심연으로부터 이 체계들을 사로잡고서는 무너뜨리겠다고 계속 위협하기 때문이다. 유혹은 늘 신의 질서를 파괴하려고 한다-설사 그것이 생산의 질서나 욕망의 질서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모든 정통성의 입장에서 보면, 유혹은 언제나 마법이고 기교이다. 그것은 모든 진리를 왜곡하는 마법이고 기호의 주술이며, 기호를 불길하게 사용하면서 기호를 고양시키는 간계이다. ~ 여자로서, 그리고 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여자는 이 시기의 최후의 화신이 된다. 그것은 유혹의 최후이다. 혹은 부드러운 유혹의 승리이다. 즉 무기력한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솔직히 그리고 에로틱하게 표현하고 여성화한다.

아니 오히려 여전히 이 모든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유혹을 파괴하는 질서조차도, 유혹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동화의 원본에서 잔혹한 비극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어린이에게 선사했다고, 세계가 그렇게 변했는가? 극단적이고 이중적인 섬뜩한 원본 동화를 어린이에게 가르친다고, 세계가 그렇게 변할까. 어떤 버전의 동화가 더 안전할까? 차별을 예방하고 남녀에게 평등한 위치를 예정할 수 있는 가르침은 없는가.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유혹은 유혹적이다.


나는 생존방식으로서의 노동이 복원되지 않는 혁명을 믿지 않는다. 그런 편향 때문에 맨스플레인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보드리야르의 이 서문을 읽고 또 읽었지만, 그만큼 좋아하는 구절이지만, 또 읽고나면 어김없이 그에게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드리야르 싫다 싫어, 이런다.


내가 멍청이 짓을 많이 하고 다닌 것을 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선생님이, 노인들이, 국가가 수없이 내게 가르침을 주지만, 나는 멍청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실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변화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명백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멍청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댈 뿐이다. 솔닛의 가르침에 왜 어떤 남자들은 저항하고 또 다른 남자들은 열광하는가, 이러면서 말이다

맨스플레인은 위기에서 더 강해지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여성을 각인시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헐리웃 영화와 지상파 아침드라마의 주된 모티브도 그렇다.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해, 친근했던 주변의 배신으로 막을 올린다. 주인공은 모진 실패와 고난 속에서, 갈등과 방황을 하더라도 도덕성을 유지하며, 그리고 주체적으로 일어나, 모종의 복수를 완수하며, 위계적인 화해를 하사한다. 주인공은 마마보이, 신데렐라, 재벌, 범죄자, 뱀파이어, 좀비 등 누구도 될 수 있지만, 메시지는 간결하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사람들이 파괴되거나 분열되는 시점이 비슷하다. '무시 당해서', '열 받아서', '억울해서', '제대로 못하는 놈 가르칠려고' 등의 직설적인 대사로 드러내는 사고방식에서 두려움과 저항을 읽게 된다.


우주 영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그래비티」, 미국 100대 영화에 속한다는 「쇼생크 탈출」를 음미하면서, 아침 드라마를 연결짓는 것은 어색하다. 동일한 <대중문화> 카테고리지만, 수용되는 양상은 전혀 다르다고 할까. 그 지점이 이 세계의 정당화를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각인된 이미지와 그 힘의 지배력을 설명하는데, 형식과 내용을 본질과 구분하며 위계를 만드는 것은 '두려움과 저항'의 모습을 혼탁하게 한다.


먼저 그래비티를 되짚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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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 아기, 아일란(Aylan Shenu)은 죽음으로 정의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일란은 '이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런 경우 종교적 심성이 꿈틀대는 것을 느낍니다. 삶의 무력함이, 그 약함이, 슬픔이, 힘으로 전환되는 혁명의 순간을 희망하게 됩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시리아 내전 상황이 심각해져 감을, 여러 채널을 통해 접했습니다. 몇 년에 걸친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양상이 이슬람국가(ISIS)의 개입으로 더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그 초점은 IS의 확대 가능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일란의 가족이 터전을 버리게 되는 상황에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일란의 아버지는 터키 난민 캠프에서 벗어나 캐나다, 스페인 등에 정착하려 했던 의지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난민이 되어 떠돌아야 하는 시리아 난민이 4백만이 되었다지요, 폐허가 되어가는 시리아에 남겨진 사람들, 떠밀려 간 그들 모두가 원하는 것은 일상의 회복일 것입니다.


인간의 자격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지나칠 때, 배고파 쓰러지는 사람을 방치할 때, 치료제가 있음에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것을 모른체 할 때 등등…이 지점들의 전제는 인간이라면 (생존의) 고통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도 역사성도 필요치 않는 이 보편적 감정들은 찰나이며 불가능한 지점에 머무를지라도, 응답하기를 통해 인간적 감정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응답하기'는 참으로 편의적으로 집행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차단된 시간에, 생존의 고통이 집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쉽게 간과되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미래라는 손익을 계산하는 와중에 '이 단순한 본능'은 좌절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결과로서만 현시되는 응답하기는 점점 폭력과 법적 질서 속에서 변질됩니다. 전쟁 중에도 적십자를 가동하고,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 협약을 강제하는 것은 (핵폭탄을 투하 하더라도) 인간적이길 원하는 이중성 때문일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제국주의를 반성하지 않고도, 여전히 평화 유지군의 이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연합은 독일을 중심으로 난민 수용의사를 밝히고 있지만, 이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상황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전망은 어둡습니다. '난민의 비참한 현실'이 자극하는 반대면은 '터전 상실의 불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내전과 분열이 강대국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주변국들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것도 부당한 일입니다. 난민의 거취 문제에만 집중할 경우, 자국 보호심리는 강해질 것이며, 그만큼 깊어지는 소외와 불화로 현실은 더 척박해져 갈 것 같습니다.


종교의 이름을 앞세웠지만. 세계는 어떤 의미의 제3차 세계대전을, 약체 국가와 민족중심으로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기아와 폭식이 가난의 한 양상이듯이, 국가화된 (일종의) 계급전쟁이 대리전의 양상으로 치뤄지고 있습니다. 이념전쟁이고 종교전쟁이며 경제전쟁입니다.


법의 너머에서

'아일란'의 정의는 어디에, 어떻게 있게 될까요. '아일란'이 시리아의 법적 지위를 포기해야 했을 때, 난민 협약,유럽연합의 법 위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난민 캠프는 또다른 고난의 연장이었고, 그 곳마저 버리게 됩니다. '아일란'의 안정과 행복을 브로커에게만 의존하며, 법 너머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국경이 조금더 열리게 되었습니다. 법 너머의 사람들이 난민 지위를 얻을 심사대상이 되어, 그 판결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유럽연합은 시리아, 에리트리아, 이라크의 난민 인정률은 75%이상이지만, 그 외 아프키니스탄, 이란, 소말리아, 수단, 특히 나이지리아, 방글라데시, 감비아 등의 다수는 난민 지위 획득에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버린 법과 편입하고 싶은 법, 그 어디에서 속하지 못한, 법 너머의 존재들이 가게될 곳과 하게 될 일들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데리다 다시 만나기

폭력은 다른 생명을 위협하는 힘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지만, 초월하고자 하는 보편감정 또한 갖고 있습니다. 법 너머를 왜 사유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법으로 정의를 구현하고 있습니까?


종교적 심성을 확장하는 것도, 인간의 자격을 논하는 것도 제가 원하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심성과 자격에 골몰하는 것과 결별해야 합니다. 새로울 것이 없다는 세상이지만 새로운 계기와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결의가 무색하게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글을 끄적이고 몇 권의 책을 다시 펴는 일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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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부유하게 산 적이 없는데, 왜 부자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단언했을까? 그 생활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잖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으면서 왜 그랬을까?


지난 3~4년 동안 일곱 번 정도 이사를 했어. 많지? 신체적으로는 힘들지 않았어. 박스 몇 개만 준비하면 끝나는 이사였거든. 어떤 때는 방 보러 온 사람이 바로 이사할 수 있냐고 해서 한 나절만 시간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지. 형편상 몇 주 동안 지내다 옮기기도 했고. 경험이 쌓일수록 짐은 간단해지고 의심병은 깊어지더라고.


이사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한 집주인은 이런 말을 했어. 성인이면 책임질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아주 점잖게 말하면서 다음날 식품을 조금 문밖에 두고 가셨지. 뭔가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어. 돌려주러 갔는데 집이 비었더라. 꼭대기 층이 주인분 거처였거든. 편지를 써서 도움 주신 마음만 받겠다 하고 사양했어. 주변 시세보다 비싸서 다른 세입자가 오지 않는다는 부동산 말을 다시 한번 전했고. 주인이 다시 들고 내려와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나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어. 종교단체에서 불우이웃 돕기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 잘 말해서 가져온 거라고, 다시 돌려줄 의지조차 내지 못하고 그냥 받았지.


계약대로만 해주길 원했을 뿐인데. 한 부동산 중개인은 그 나이가 되도록 원룸 알아보러 다니는 주제에 잘난 척을 한다고, 상식도 없이 그렇게 우기기만 하니까 평생 그렇게 사는 거라고 비난하기도 했지. 불쌍해서 싼걸로 구해줬는데, 어디서 큰소리냐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소유했는지도 나열하면서.

모든 행위 뒤에는 자기 서사가 깔려 있어. 서사를 만들지 못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거나,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 돼 버린 시대야. 난 실제로 소리만 질렀어. 무슨 말이냐구, 적반하장이라구, 왜 욕까지 하냐구. 내 서사를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가끔 그런 생각을 해. 한번도 집주인으로, 사장으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의 상식을 모르는 건 아닐까. 그들 말에 논리가 없다고 볼 수는 없잖아. 감정을 실어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 같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한 틀을 터득하고 체화해서 말하는 거지. 세상을 둘러보면 그런 충고는 널려 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성공담도 눈에 들어와. '모든 게 마음먹기'라는 원효의 해골바가지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담론임을 부인 못해.


갈비와 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었어. 냉면만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주차장과 연결되는 곳에 마련된 자리에 앉히더라. 식당이 텅텅 비어 있음에도 언제라도 테이블 구매단가를 높여줄 고객을 위해 영업전략을 구사하는 거지. 대접은 어찌보면 인정이론의 기초야. 중화요리집에서 짜장, 짬뽕 외에 요리를 시켜볼 엄두를 못내고 살아가는 건, 어느 정도의 푸대접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니.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니? 그건 그냥 '대접하는 말'인것 같아. 나는 대접받길 원하는 것일까. 


세상을 긍정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것도 싫고, 자본의 요구에 무력하게 끌려 다니지 말라는 이론가들의 각성 메시지도 달갑지 않아. 말의 줄기는 다르지만 흐르는 정동을 보라구.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약자를 시스템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정치가들의 입바른 소리도 허망하구 말이야.


주어진 환경에 대응해 살다보면 한 측면만 보고 살아지겠지. 미래에 돈이 많이 생겨도 부유한 삶을 즐기지는 못할거 같아.  난 약자도 아니고 열등한 사람도 아니야. 내게 많은 게 있다면 죄책감이야. 아니 난 약자고 열등해. 그런 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물질적으로 없어서, 문화적으로 빈곤해서, 담론의 흐름이 되지 못하는, 연대의 대상이 되기만 하는 그런 상황을 거부할 뿐이야. 너와 나는 평등하니? 어떤 면에서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얘기를 하고 싶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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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만으로 세계가 선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하고자 하는 의욕마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보십시오. (선한) '세계'를 향한 열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노고를 잊지 않는 것은, 지금 이순간 절실하게 요청되는, 사회적 의무입니다. 선善을 말하며 사회적인 것을 내세우니 짓궂은 거머리가 된 기분이 듭니다.


선이 개인의 의식 차원에서 발생했다 사라지는 감각에 한정된다면 자족적인 처세술에 그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선을 언급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면, 행위의 발생과 관련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 나오는 (의식/무의식적) 실천에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선한 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도덕과 규범 교육을 강조하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선하고 싶다는 것이 '사회적인 것' 을 향한 출발이 될 수 있지만, 종착지는 선한 세계가 아닐 것입니다.

















<사회적인 것의 종말이라도 온 것일까요>


복잡한 현실이 전개될수록 의심하고 부정하는 맥락이 기존 시스템으로 편입되어 갑니다. 유명 기업은 광고를 통해 '현명한 모순'을 제안합니다. 유명 지식인이 현 상황을 파국적이라고 비판해도 누구도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부도덕과 비리, 범죄가 밝혀져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벌의 수위만을 의심합니다. 고발과 저항이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됩니다. 정치적 권리와 이해관계 속에 모든 것이 잠식되어 보입니다.


저항 담론이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고 억압된 것들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 결과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시대적 고통을 위로했던 분노와 자기희생들을 담론의 효과와 엮는 일은 부적절합니다.) 저항 담론의 문제는 내용과 방향성에 있지 않고, 발생 주체와 유통 매개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정치경제는 민주주의라는 대의제 체제에서 (담론의) 집행 영역에 위치해 있지만 담론의 유일한 발생지점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치경제는 이미 구축된 질서로 개인에게 구속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실체를 인식하고 저항을 명령했던 주체성 담론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담론의 효과로 새로운 자유주의적 질서가 탄생했다고 비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퍼지식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체성이 발현될 공간, '사회적인 것'의 소멸이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 현재로 제도와 정책이고 절차와 방식을 의미합니다. 사회적인 것은 행위이고, 지향이고 의욕이며, 관계에 의해서, 상황에 의해서, 유동적으로 발현됩니다. 사회적 행위가 발생하는 곳에는 나뿐만 아니라 너도 있고 절차와 방식의 조정도 있어야 합니다. 주체성이 작용한다는 것은 개인이 사회와 세계에 의견을 갖고 거부의사를 밝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회적 영역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것인데, 주체성의 발현은 드물고, 그 담론의 유통만 넘칩니다.


'사회적인 것'의 강조는 명사화 작업도 아니고 역사화시키는 담론도 아닙니다. 가족을 비롯한 사회적 관계의 현재 장면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되는 '사회적인 것'이 세계와 격돌하게 될 때를 그려 봅니다. 정체성과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결사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담론 영역을 원합니다. '사회적인 것'으로서 담론의 공간은 혁명의 선행조건입니다. 사회적인 것을 성립시키는 것, 담론의 생산이 학자와 정치인, 문화예술인으로부터 나오고, 소비라는 선택이 개인의 역할로 축소되는 현상부터 해체되어야 합니다. 사회적인 것은 그 과정이고 실체입니다.



<금융화가 세계를 총체화하는 힘인가>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의 근원을 꼽으라고 한다면 '금융화'라는 본질적인 논리를 제외할 수 없습니다. 금융화는 경제적 현상이면서 가치와 쾌락의 체제이기도 하므로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합니다. 자본주의가 산업형의 상품 생산에서, 문화상품으로, 금융상품으로 그 중심 생산력-가치발생원을 이동시킴에 따라 세계는 더 불안정해져 갑니다.


그렇다고 불안정성을 자극하며 기생하는 금융 상품이 안정성을 상징하지도 않습니다. 선물옵션은 풋과 콜이라는 양방향성을 갖는 변동성 상품이지만, 주식시장의 위험성을 분산하려는 합리적 성격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래 (발생할) 가치를 현실의 힘으로 끌어다 쓴다는 점이 마냥 허황된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금융상품을 위험관리와 안전을 위해 동원하지 않고, 상품의 소스와 구성 자체를 복잡한 그물망 구조로 만들어 해석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통제받지 않는 가치 증식체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경제지표를 관리하고, 부실 신용을 정리하고, 새로운 담보 가치를 확정해 주는 힘이 금융화 원동력입니다. (생산물이든, 문화든, 금융이든) 가치를 부여하고 뺏는 권력, 정설을 만드는 힘, 실체를 가상으로, 가상을 실체로 둔갑시키는 논리력 말입니다.


적대 관계가 없더라도 착취적 성격이 번성하며, 착취 관계가 곧 적대적 관계이지도 않습니다. 가상이 힘을 갖는 것보다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도식적이고 복잡해져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체/이론은 선한 것이지만,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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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망설임>


항아리, 풍파, ... 이 단어를 여러 번 웅얼거린다. 소리내 말해보려 했는데 입술만 움찔거렸다. 이 반복의 실상은 회색이다. 답을 모르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특정한 개인을 언급하면서 만들어지는 담론틀에 개인의 역할이 있을까,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불행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당당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뭔가를 묻게 될 때마다 민낯이 투명해지기보다는 상대적인 논리가 자주 튀어나오는 걸 막지 못한다. '아무개의 형편없고 파렴치한' 인생보다 자신의 삶이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욕망은 널려 있지만 정작 그 성공은 드물다. 성공의 정점은 지속이라는 불가능한 과제를 부여안기 쉽기 때문에 불투명을 선호하고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갱신인데 경신인듯) 표절을 배척한다. 자주 말하게 되지만 표절이 나쁜 것인가. 인간으로서 삶이란 표절과 비슷하거나 같은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표절에 분노하는 정서는 부당한 분배와 갈채에 집중되어 있다. 비정한 사회에서, 겨우 마련한 한 조각의 소유권에 집착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그 불편부당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 표절이 큰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 되짚어야 할 것은 표절 자체가 아니다. 표절 작품이 조목조목 격파될수록 원작의 창조성은 더 확고해진다. 그러니 표절과 문학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무용한 일이다.


신경숙 씨의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세계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고, 자기 서사라는 변명도 애처러운 일일뿐 부지기수로 일어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가 두 번에 걸쳐 쏟아낸 주장들을 통과해서 드러낸 세계는 ……거부감을 넘어선 이질감에 망설이듯 중얼거리게 했다. 항아리, 풍파, . 이 단어들은 신경숙 씨가 선택한 조합이었는데, 정작 그 말의 무게는 김정욱 씨의 얼마 전 인터뷰를 떠올리게 했다. 굴뚝, 자기와의 싸움, 삶의 공동체.


* 김정욱 씨의 인터뷰

 "나는 굴뚝 위에서 망가졌다……비참하게 내려왔다", 한겨레 2015. 6. 1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5798.html


* 신경숙 씨의 인터뷰

 "문학이란 땅에서 넘어졌으니까 그 땅을 짚고 일어나겠다", 경향신문 2015. 6. 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230600035&code=960100


<아름다운 표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신경숙 씨는 논란이 일어나자 "해당 작품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길 바랄뿐"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신경숙 자신이며, 미안한 대상을 독자로 한정하고, (진실한 자를 음해하는) 소란이라고 상황을 해석했다. "나를 믿어주길" 바란다고 독자(자신)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결백한 일이니 대응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대상은 대중과 사회라는 점에서 말과 행위가 어긋남이 도드라진다.


그 후 표절 사태가 출판사와 평론가, 문단 전반까지 불러내자, 좀더 자세한 속내를 강조해줄 메신저로서 작가라는 존재를 부각시켰다. 실제 논란은 작품 외적-사회상황에서 발화가 되고 있는데, 그가 선택한 어휘와 일화들은 하나같이 작가 정신으로 한정시켰다. 이런 흐름은 검찰 고발로 수사팀이 배정되었다는 뉴스에 대한 문학계의 반발과도 연관되어 있다. 법적인 잣대로 문학을 심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주체와 문학의 세계는 어떤 초월적인 위치에 있다는 믿음들이 보인다.

수도원에서 지내던 신경숙 씨의 인터뷰에서 그 모순은 자기 세계에 빠진 채, 사회적 비판에 무감각하고 일방적이다 못해 독자 마저 내친다.


"내 소설이 착하기만 하고 현실을 수용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어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름답다는 것을 내 문장으로 증거하고 싶었고, 내가 느끼는 온기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 내 독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를 '내 느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생각한다는 고백은 불쌍하고 간지럽다. 인간을 아름다운 존재로 보고 싶다는 점을 결백의 증거로 내밀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문장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내 소설, 나는 그럼에도, 내 문장, 내가 느끼는 온기, 내 독자! 두 개의 문장에 ''5번 나온다.


다른 시 제목을 그대로 베껴 쓴 것도 "서로 흐뭇하게 양해한 일"이니 별 일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한편, 논란을 일으킨 소설 <전설>을 빗대어 비수를 꽂는 자식이라며 "이제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가슴에 묻어야 할 것 같아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질문으로 남겠죠"라고 말한다. 어떤 질문을 하겠다는 것일까.

'내 문장은 삶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이해이므로 그 맥락에서 보자면 아름다운 표절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잔혹함을 말하는가>


그가 선택한 항아리, 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해명도 사과문도 아닌) "입장 표명"의 인터뷰에서 절필 권유에 대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비난을 받고 자꾸 자기검열을 하면서 앞으로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절필은 못할 것 같아요.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이 작가에게는 모국어가 조국이에요. 나는 모국어를 떠나서 살 수 없어요. 내 땅이 문학이기 때문에 땅에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앞뒤 없이 이 단락만 분리해서 읽게 되면, 모국어를 빼앗긴 작가의 슬픔과 상처에 공감하며 그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무엇을 빼앗았는가. 그는 무엇을 뺏겼는가?

소설 분량을 걱정하며 계속 쓰겠다고 말하면서,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단어는 항아리였다. "밖에 나가지 않고 내 책상으로 돌아가겠어요. 발표하지 않고 항아리에 넣어 두더라도." 확실히 그는 감성을 움직이는 단어의 조합을 잘 알고 있는듯하다. 항아리는 쌀독, 장독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섭생, 생존이다. 생존수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진 작가가 모진 풍파에도 불구하고 땅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왜 원고를 항아리에 넣겠다는 것인지, 그의 멋을 낸 비유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김정욱 씨는 연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위에서는 막 몸부림치고 있는데 아래 내려다보면 평온해 보이고" 불쑥불쑥 화나고 서운했다고 한다. 그리고 비참하게 내려왔다고 고백한다. 고공농성을 선택한 노동 운동은 어쩌면 극단의 길 위에 있는 듯하다. 실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징투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미터 망루에서 며칠 째'라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생존수단을 빼앗긴 절박함을 읽었다. 연대를 하고 협상을 해야하는데, 왜 바람만 드나드는 망루로 올랐을까, 질문이 남는다. 쌍용자 해고자 김정욱은 굴뚝 위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으면서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데도 타자가 그림자처럼 함께 한다.


자신의 상황, 억울함,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점점 잔혹해지고 있다. 한때는 틀림을 다름으로 교정하는 것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고 편집한다. 신경숙 씨가 이 변화를 읽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인간이 겪는 일들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데, 같은 이야기라도 내가 쓰면 어떻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내 글쓰기였어요."


다름과 틀림을 분리하는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항아리와 굴뚝이 아주-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것은 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인 듯 고민하며 글을 쓰는 것은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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