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운 영어가 신기해서,
마냥 신나서,
뭐든 반복해서 쪽지에 적고,
응용하고,
혼자 묻고 답하곤 했다.
이런 식의 것들 ;
여자가 she인
이유 - 남자
he는
아들, 엄마는
여자이므로 he에
s(son)를
품고 있는 것,
이다. 그러던 중, 문법을 배웠던 어느 수업시간,
쪽지를 들춰 질문을 했다.
“선생님,
명사와 명사 사이에는 소유격이
와야 하는데,
'선데이 서울'은
이상해요!
일요일 서울이잖아요.
선데이 오브 서울이나 서울 오브
선데이 해야 맞는 거지요?”
여기서
'선데이
서울'은
터미널 가판대 등에서 팔곤 했던 유명한 성인
잡지였다.
진지하게 선생님의 답을 기다렸었는데,
약간의 칭찬을 기대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발견을 한 기분이었으니까.
“야,
너,
지금 뭐라 했어?
이게 어디서 이상한 걸 묻고
난리냐.”
정확한
말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위협적인 제스처와 난색을
표하던 영어선생님이 생각난다.
맨스플레인을
놓고 (격하게)
대립하는 칼럼을 보며,
엉뚱하게도 '선데이
서울'이
생각났다.
그 잡지를 읽어 보지 못했지만,
표지 사진이라야 지금 보면 너무
흔한 수영복 사진들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그렇게 금기시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선생에게 나는 까진 학생,
불량이었을 거라는 것을 나중에
짐작만 하게 되었다.
나의 접근은 순수-학문적이었지만,
性적 뉘앙스가 듬뿍 담긴 단어를
교실에서 발설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금기가 발생하고 작동되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지 싶다.
레베카
솔닛의 책이 한참 인기를 얻었을 때,
제목을 보고,
책소개를 읽고,
또 리뷰를 읽고,
다시 제목을 들여다 봤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 책의 소용돌이는
시대 감각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경제적 지위,
문화적 향유에서도,
정치적 동조에서도,
지략은 막강한
경쟁력의 원천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가르침을 받겠는가,
작가가 독자에게
배우길 원하겠는가.
애인의 훈계질과
대장노릇은 이별원인이 될 뿐이다.
누군가 '스승을
품지 못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저마다 해법(解法)들이
있으므로,
동조자나 추종자가
필요할 뿐이다.
연출가가 되거나
재판관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연출자이며,
네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규.'
솔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게
솔닛의 책 제목은 못마땅하다.
왜 '남자들은'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가.
가부장적 권위주의나
성차별이 금지된 사회를 열망하는 운동가에게 어울리는
처방이기는 하다.
여성들이 노예 아닌
노예 관계를 맺어야 한다든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행한 삶 위에 있다면 솔닛과 같은 선언이
도움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가르치려 드는 남자로 인해 괴로운 어느 상황을 잠시 상상해
보자.
일상의 장(場)은
이미 여러 겹의 층위를 구성하고 있는데,
상대 남자의 사고방식과
행위를 '거부'하고
'금지'시키는
것에 주력하는 것은 생활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일상적 폭력을 문제
삼을 때는 여건-상황 변화의 실마리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사회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금지의 선언을 보내는 것은 이미 시작됐다.
맨스플레인이
작동되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을 무수히 찾아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성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된 행동이다. 고소해야 할까. 아니면 결별해야 할까.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면, 즉각적으로 사회는 반응해야 한다. 강제력으로 분리시키고 피해자를 보호하며, 폭력의 중단을 조치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당연한 명제를 세밀하게 일상에도 적용시키자면, 우리가 결국 집중하게 되는 것은 '법의 힘'이 될 것이다. 소외와 차별을 금지하고자 불러오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내가
『구글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한다면 어떨까.
구글이 스승이 되는
것은 저항없이 수용하는 시대를 비판하며,
차라리 지식의
경계/위계를 지우는 일을 하자고 한다면 어떨까.
나는 내가 아니다.
셀 수 없는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다.
쉴 새 없이 가르침을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 복합체다. 지식이 지략이 지성이 무력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굳이 남자가 가르치려 드는 것을 분석해서
차별을 금지하고 싶다면,
예컨대 보드리야르의
유혹 전략을 쓰고 싶다.
좀 길지만『유혹에
대하여』 서문 중에서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지울 수 없는 어떤 운명이
유혹을 짓누른다.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유혹은,
그것이 교묘한
것이든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든,
악마의 전략이었다.
유혹은 늘 악의
유혹이다.
아니 사람들의
유혹이다.
~ 유혹은 본능의
차원에 속하지 않고 기교의 차원에 속한다.
즉 유혹은 에너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와 의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생산과 해석의
모든 중요한 체계들이 유혹을 개념의 장에서 배제시킨
이유이다-다행히도
유혹 그 자체를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유혹은
외부로부터,
절대 고독의
심연으로부터 이 체계들을 사로잡고서는 무너뜨리겠다고
계속 위협하기 때문이다.
유혹은 늘 신의
질서를 파괴하려고 한다-설사
그것이 생산의 질서나 욕망의 질서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모든 정통성의
입장에서 보면,
유혹은 언제나
마법이고 기교이다.
그것은 모든 진리를
왜곡하는 마법이고 기호의 주술이며,
기호를 불길하게
사용하면서 기호를 고양시키는 간계이다.
~ 여자로서,
그리고 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여자는 이 시기의 최후의 화신이
된다.
그것은 유혹의
최후이다.
혹은 부드러운
유혹의 승리이다.
즉 무기력한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솔직히 그리고 에로틱하게 표현하고
여성화한다.
아니 오히려 여전히 이 모든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유혹을 파괴하는
질서조차도,
유혹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동화의
원본에서 잔혹한 비극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어린이에게 선사했다고,
세계가 그렇게
변했는가?
극단적이고 이중적인
섬뜩한 원본 동화를 어린이에게 가르친다고,
세계가 그렇게
변할까.
어떤 버전의 동화가
더 안전할까?
차별을 예방하고
남녀에게 평등한 위치를 예정할 수 있는 가르침은
없는가.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유혹은 유혹적이다.
나는
생존방식으로서의 노동이 복원되지 않는 혁명을 믿지
않는다.
그런 편향 때문에
맨스플레인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보드리야르의 이
서문을 읽고 또 읽었지만,
그만큼 좋아하는
구절이지만,
또 읽고나면 어김없이
그에게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드리야르 싫다
싫어,
이런다.
내가
멍청이 짓을 많이 하고 다닌 것을 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선생님이,
노인들이,
국가가 수없이 내게
가르침을 주지만,
나는 멍청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실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변화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명백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멍청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댈 뿐이다.
솔닛의 가르침에
왜 어떤 남자들은 저항하고 또 다른 남자들은 열광하는가,
이러면서 말이다.
맨스플레인은
위기에서 더 강해지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여성을
각인시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헐리웃
영화와 지상파 아침드라마의 주된 모티브도 그렇다.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해,
친근했던 주변의
배신으로 막을 올린다.
주인공은 모진
실패와 고난 속에서,
갈등과 방황을
하더라도 도덕성을 유지하며,
그리고 주체적으로
일어나,
모종의 복수를
완수하며,
위계적인 화해를
하사한다.
주인공은 마마보이,
신데렐라,
재벌,
범죄자,
뱀파이어,
좀비 등 누구도 될
수 있지만,
메시지는 간결하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사람들이 파괴되거나 분열되는 시점이
비슷하다.
'무시 당해서',
'열 받아서',
'억울해서',
'제대로 못하는 놈
가르칠려고'
등의 직설적인
대사로 드러내는 사고방식에서 두려움과 저항을 읽게
된다.
우주
영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그래비티」,
미국 100대
영화에 속한다는 「쇼생크 탈출」를 음미하면서,
아침 드라마를
연결짓는 것은 어색하다.
동일한 <대중문화>
카테고리지만,
수용되는 양상은
전혀 다르다고 할까. 그 지점이 이 세계의
정당화를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각인된 이미지와
그 힘의 지배력을 설명하는데,
형식과 내용을
본질과 구분하며 위계를 만드는 것은 '두려움과
저항'의
모습을 혼탁하게 한다.
먼저
그래비티를 되짚어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