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기생충》을 텍스트로 접근한 후기입니다.
세 가족이 2자
관계를 벗어나길 거부하며 만들어낸 반전의 공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글입니다.
온갖 영화적 설정에 대한 해석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영화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진부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요령껏 대처하길
바랍니다.]
근대국가의
명운은 전문가 양성체계에 얼마나 힘을 쏟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과학주의에 근거한 이론이 미래가
되고, 실천이
이론의 과거가 되는 청사진에 의해 조정되고 강제되었다.
시간 당 노동량을 측정했고,
학교와 공장에도 속도는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었다.
사회적 압력이 절실히 요청되던
시대였다.
그 와중에서도 인간은 감각을 통해
예외를 발견하고,
삶에서 놓쳐버린 그 밖의 것들을
상상할 여지를 만들어내곤 했다.
알려지지 않는 현실에 조명을
켜기도 하면서,
뭔지 허구로 보이지만 실체인
것들을 전경화시켜 예술로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예술처럼
발원하며,
스스로를 밝히고는 이내 사라지고
했다.
어느날
고개를 들어보니 전문가로서의 예술가 집단이 등장하고,
예술은 이론적 배경 없이 이해하기
힘든, 지적
작업이 필수적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고급 예술은 미술관,
예술의 전당에 있고,
대중 오락은 텔레비전,
만화책에 있다.
비율과 조화의 예술은 예리한
비평가의 견해가 첨부된 보증서에 의해 마침표를
찍었다.
미학이 멀어질수록 예술은 모호해지고
더 가치가 치솟는다.
예술인들은 기묘한 처지가 된 듯
싶다. 예술가
냄새란 말하자면 편견을 편견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이지 싶다.
지난
주 내내 온라인 어디로 도망다녀도 이 영화 얘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다른 때라면 방콕하던 습속으로
상관없이 지나갈 수 있었겠지만,
요즘 관심사인 대너리스,
화이트워커,
아리아를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이었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달리,
상영이 끝난 후에야 결합하는
관객까지를 포함시킨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영화《기생충》은 시작점에 있다고 하겠다.
감독 스스로 반전에 경악할 관객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
각본 • 미술 • 음악 • 배우 등
여러 제작자가 참여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
수많은 설정 장치 들이 미리 주어져야
가능하다는 점 등으로 보자면 그렇게 무리한 생각도
아니다.
관람객들의
후기가 웅변하는 대상은 영화적 설정이고 배역의
현실성이며,
감독의 세계관이었는데 마치 미학을
가슴에 품고,
비평가를 등에 지고,
관객-자본을
문 밖에 둔 채,
작은 노트 패드로 세계를 이해하는
감독의 쌍둥이 형제들 같아 보였다.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
형성되는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절묘한 반전에 소름끼쳐하고,
디테일한 설정에 설득 당한 채
흥분을 쏟아내는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서걱거리는 현실 한 자락을 그대로
꺼내 주는 배우들의 연기로,
눈동자 가득 눈물을 채웠을 관객들의
동력은 너무나 인간적인 현상이지 않은가.
그들이 폭넓게 참여하며 형성한
말들이 모래사장에 새겨놓은 얼굴(하트
heart)처럼
밀려오는 물살에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인간이다.
감독이나 배우에게,
닿지도 않을,
응원과 도발을 끊임없이 보내는
어리석음이 있기에 한없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
혹은 마케터 • 평론가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독도 여지없이 이 인간적인 행렬에 함께 할 것이다.
하지만 상품은 사용자와 제작자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문가는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전문가 아래 연구자들이 있고 그
아래 연구자 지망생이 있다.
그리고 대중이 있다.
마지막으로 쪼그라들어 대중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헤매는 나같은 방랑자가 있다.
(이런 지형학적 도식은 얼마나
진부한가.)
진부한
것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성차별적 현실과는 별개로 언제까지라도
모성애는 죽지 않을 것이며,
정치적 현실은 늘 대의라고 포장하는
수사적 힘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몸부림치며 찾아다니는
'포스트휴먼'은
그 진부함들에 대한 문학적 상상으로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 한계의 영원성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는
내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인간적인
것들, 진부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은,
세계가 세계화될수록 개인이 겪는
'세계라는
문제'는
미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도 9.11이라는
커다란 비극 이후 비인간적이고 냉혹하게 보복을
감행하며 미국민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테러에 대한 불안은 상시적인
대응체제를 요구했고,
그 대책은 바로 일상 속에서도
진행되어야 했다.
테러의 냄새는 바로 미국 내에서
미국민들 사이 어디에서도 출현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감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구 정반대 쪽 거리를 몇 초 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는 광범위해졌지만,
정작 이 첨단문명 장치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먹고 놀고 시험 공부하고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일이다.
(아이고,
자꾸 샛길로 빠져나가
는데)
여하튼 비교적 쉽게 경제적 분할과
계급적 배치가 수직적 적층 구조로 드러나던 근대와
달리, 현대는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여러 문제들이 횡적인 분할
속에서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수직적 계급 현실이 엄연함에도
그 문제 영역들은 진부해 보인다.
다시 요약해 보자면,
횡적인 분할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이고,
상징과 상상의 엉겨붙음이고,
가치의 교란이다.
최근 80~90년대를
회고하는 많은 영화가 그렸던 풍경이 레트로 문화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면서 유행을 이끌어었던 것도,
횡적 분할에 대한 위로이며 결코
세계라는 문제와 대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떠나가버린 세대를 안전하게 대면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잠시 커피 한 잔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어떤 균열을 시간의 힘으로,
눈물의 동의로 밀어버렸기에,
추억영화가 던지기 쉬운 진부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를 빈곤의
장소화로 묘사하고,
언덕 위 저택을 부딪힘이 발생하는
권력의 공간으로 정형화했을 뿐만 아니라,
80년대 운동권 서사까지 끌고들어와
억압적 장치로 배치했다.
영화에 짙게 깔린 구조적 결핍이나
판에 박힌 인과론적 형식이 관객에게 케케묵은 답답함을
안겨줬을텐데,
관객은 진부함을 느끼지 않는듯
보인다. 왜
그럴까.
《기생충》에서 두드러진 단어인 '기생충'과
'냄새'는
손쉬운 전이가 가능한 개념이다.
주홍글씨가 되어 어디에든 기생할
수 있다.
비난의 은유로 사용하는 벌레
충蟲의 대상은 너나없이 누구도 될 수 있지만,
모순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더
빈번하게 발견되곤 한다.
그렇다면 주홍글씨는 사실 내용이
없는 말이다.
이 내용없는 말에 '냄새'라는
자연적인 사실성을 덧대어 응축시킨 덕분에 《기생충》은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솔직히 이 영화의 광고를 보고 먼저 떠오른
짐작으로는,
그레고리 잠자처럼 인간 정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뒤집어써야할 존재의 껍데기와
그것을 벗게 되었을 때야 드러날 역설적 상황을 그리지
않았을까 했었다.
하지만 텍스트로 알게 된 이 드라마의
뼈대는 이렇다.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몰락한 80년대
운동권이 지하실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열정만 가득해 여러 사업을 전전하다
끝내 몰락한 사업가는 스스럼없이 지상에서 반지하로
급기야 지하실로 침잠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유일하게
문광(의
선택)에만
허용되고,
나머지는 수학문제를 풀어가듯
정해진 순서대로 조립되길 기다리며 대기중인 레고
인형들이다.
없는
데 있는 듯 속임수를 써서 환기시키려는《기생충》의
기생충은 유령인가.
누가 기생충인가.
어떤 꾸밈말에 지나지 않는가.
흘러다니는 오해로 빚은 말이라면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환기가 되었는가.
'오해를 심화시키려고 얹어놓은
'냄새'는
비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지점에서 어떤 충격을 받아야
할까. '냄새'는
인종문제에서부터 슬럼가 사회문제로 더구나 문화자본으로서
취향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실체들을 담고 있다.
향초,
향수,
방향제,
섬유유연제,
아로마향이 담배 냄새,
노인 냄새,
땀냄새,
입냄새 등과 대척점에서 갈등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실에서,
새삼스레 가난 냄새와 사랑 냄새는
숨길 수 없다는 주장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너무 사실적이어서 그런가.
구조의 진부함이 냄새라는 환상적
적대와 뭉쳐 사라져 버렸다.
이미
말한 바 다시 강조하자면 반칙은 반갑지 않다.
냄새나는 지형적 위치로 끌려가
되살려낸 가부장적 질서가《기생충》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세 가족의 지탱점으로 작용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다양한 양상으로 이 범죄 드라마를
더 모호하게 하며 진부함을 가린다.
노사갈등이 노노갈등으로 이동하더니,
노노갈등의 양상이 노노적대까지
오고 있는 듯하다.
냄새 자본은 경제적,
문화적 분할을 상징하는 기표가
되었지만,
범죄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을 섣불리 묶지
않고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가난해서 냄새가 나고 무시당해서
폭주하는 기생충이라니.
이런 작위적 연결이 마치 그럴듯한
예술로 둔갑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계급에
전형적 인물을 인쇄하는 일이 계급현실을 직시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짧은 글을 쓰면서,
열 번도 넘게 자조어린 반성을
했다. 누가
염치 없는 사람인가.
누가 부당 이득을 원하는 사람인가.
누가 단물을 빨아먹는가를 분석하고
색출해내는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 쓸데없는 자기해석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덤으로 얻은 신경증일 것이다.
계산에 밝고 교양이 있어 적당히
이익을 나눌 줄 아는 시민이 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싶지도 않다.
더구나
계급을 동물화하거나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매개로
'냄새'라는
감각을 이용해 빈곤계급과 구시대 운동권과 실패한
자영업자를 엮어내는 기술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기생충들의 접전을 묘사한 이
영화는 욕심을 초과하는 농담이거나 문화자본가의
전략 상품이다.
"유령은 항상 그 거기에 있다. 비록 그것들이 실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록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록 그것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입을 열자마자, "거기에"를 다시 사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