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라의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


    프로이트가 도라를 다그칠 때 억장이 무너졌다. 도라가 당당하게 맞설 때조차 그녀의 어깨가 쪼글아들어 있었을 걸 생각하면 목울대를 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언어가 '가능성' 을 불러내는 행위라고 하면 그 순간 프로이트는 도라의 적이었다. 프로이트가 자주 비판받던 주제 중 하나가 성차별적 진단인데,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분석자 프로이트가 도라 위에 군림하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


도라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프로이트에게 분석치료를 받게 되었다. 발작적인 기침과 실신, 우울증, 그리고 주기적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던 도라에게서 프로이트는 (여성) 히스테리를 포착해 낸다. 이후 도라의 '억압된 욕망의 기원'을 읽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당시 18세였던 도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속에 있었다. 도라는 어머니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아버지와는 가까운 편이었고, 이웃인 K부인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도라의 아버지는 K부인과 불륜 관계였는데, K씨는 도라에게 성적 접근을 했고, 도라는 이를 거부했다.


도라가 프로이트에게 전한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아버지와 K부인이 자신을 K씨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고 느꼈다. ~ 도라의 아버지는 K씨의 즐거움을 위해 도라를 내줄 의향이 있었다는 그런 의미다. 도라가 14세에서 16세 사이에 이 모든 사건을 겪었다는 점을 들자면… 굉장히 지저분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프로이트의 기록에는 도라가 프로이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여러 순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예로 간주되는 것은, 프로이트가 도라에게 실제로 K씨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히스테리는 부분적으로 K씨를 향한 바로 이 억압된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을 때이다. 도라는 최종적으로 프로이트의 해석에 굴복하고 말았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그의 해석을 부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는데, 치료 과정의 대부분이 프로이트와 도라의 의지 싸움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프로이트 콤플렉스』)


도라는 K씨의 강제 키스가 혐오스러웠다고 말하지만 프로이트는 그렇게 느끼는 일이 “이미 전적으로 완벽하게 히스테릭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도라가 자신의 욕망에 불안을 느껴 정반대로 반응했다는 말이다. 도라가 돌연 치료거부를 선언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치료에 실패한다. 그런데 이 실패는 상담치료의 실패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피분석자 도라의 저항을 통해서 '전이'라는 정신분석의 중요 개념이 창발되었기 때문이다.


도라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도라는 말하고 있었다. 신경증은 신체에 머무른다. 그리고 신체는 움직이는 말을 생산해잰다. 도라의 말은 프로이트의 의식을 지나쳐 무의식을 통과해서 다시 도라에게로 이른다. 프로이트는 다만 의식에 머무르는 말로 도라를 분석한 것은 아니었을까.) 도라가 무의식의 욕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했을까는 여전한 의문이다. 프로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도라의 가장 깊은 분노는 아버지가 그것을 믿어주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도라의 아버지는 호숫가에서의 장면을 도라의 상상력의 산물로 곧바로 간주해버렸는데, 그의 행동들 중 이것만큼 도라를 실망시킨 것은 없었다. 도라가 그때 어떤 일을 그저 상상했을 뿐이라고 아버지가 생각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고 그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프로이트 콤플렉스』)


프로이트가 수행한 분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또다른 열네 살 소녀가 앓고 있는 복통을 시끄러운 히스테리 증상으로 진단하는 바람에 두 달 후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떠올리자면, 정신분석은 뭔가 추악한 짓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도라의 선언은 그냥 나온 거라기 보다는 프로이트를 통과해서 나온 '움직이는 말'이었으니까.


(도라)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여기 온 걸 아세요?”

(프로이트) “그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해 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라) “그래요, 난 새해가 될 때까지 참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라고 해도 이제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요.”

(프로이트)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면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치료를 계속해 보도록 하죠. 언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까?”

(도라) “ 2주 전쯤이었어요.”

(프로이트) “ 2주 전의 통지였군요. 내가 마치 하녀나 가정교사가 된 것 같습니다.”(『프로이트 콤플렉스』)



2. 애거서 크리스티의 움직이는 몸


근대 유럽의 탈주술적 세계로의 진입에 걸맞는 옷이었을 정신분석이, 동양인 여성에게도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렇게 시작했던 글이 있었다. 1) 오래 전 일이지만 그 당시의 문제 의식을 조금 끌어와서 미스 마플과2) 미니멀리즘을 잠시 생각해본다.


프로이트는 주술적 신비에 머물면서도 탈주술적 세계를 배반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사드, 나르시스 등은 문학과 신화에서 차용되어온 판타지인데 전통과 맞서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심화시킨다. … 또 현실 원칙은 훌륭한 자기관리서로 손색이 없다. 동양적 사유의 특색이 흔들리지 않는 인격 수양에서 시작되는 서사인데 프로이트의 출발선과도 잘 어울린다.


반대편에서 볼 때도 프로이트는 꽤 매력적이다.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던 인간 정신의 구조가 프로이트의 지도로 안정감을 찾았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만든 억압에 주목하게 하면서 기껏 만들어 놓은 현실 원칙을 불안하게 할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의식이 아니라 알 수도 없는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왕관을 우습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 과학은 예측 불가능한 뇌-마음의 영역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려고 기를 쓴다.


인간을 향한 회색의 시선을 유지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어떻게 일상생활의 시선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자료다. 애거서의 많은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거나 “본능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향한 육체의 강력한 충동”이라는 프로이트의 명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도라의 사례와 비교하며 『0시를 향하여』를 읽어본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네빌, 오드리 … 등으로 배틀 총경의 딸 실비아나 앰프리 교장은 배경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베틀 총경은 교장 앰프리로부터 딸 실비아가 도난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는 편지를 받는다. 앰프리 여사는 성공한 교육자이고 '자기 결정'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교육에 적용하고 있었다. 먼저 앰프리 교장의 입장을 들어보자.


중요한 것은 말이지요, 올바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아이 자신입니다, 배틀 총경님. 실비아 자신이란 말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실비아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라는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알아내야 하는 건 실비아가 이런 짓을 하게끔 만든 배후의 이유입니다. 그건 아마도 열등감이 아닐까요? 총경님도 아시겠지만, 실비아는 운동을 잘 못합니다. 다른 영역에서 자신을 돋보이고 싶은 막연한 욕구, 자신의 자아를 주장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우선 총경님을 혼자서만 뵙자고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0시를 향하여』)


이제 실비아의 얘기를 들어보자. 키가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에 비쩍 마른 아이가 우울한 얼굴에 눈물 자국이 그대로 인 채로 머뭇거리며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마비된 것 같았어요. 저는 틀린 단어를 답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어들, 그러니까 다람쥐나 꽃 같은 단어를 생각해 내려고 애썼는데, 앰프리 선생님은 거기 서서 그 나사 송곳 같은 두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아빠도 아실 거예요. 그 파고드는 듯한 눈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점점 더 긴장했어요. 그러고는 며칠 후 앰프리 선생님이 저에게 아주 상냥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정말로 잘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건네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제가 그랬다고 말했어요. , 아빠,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몰라요!”(0시를 향하여』)


배틀 총경은 딸 실비아의 무죄를 밝혀낸 구원자이다. 앰프리 선생은 비언어적, 암시, 연상 등의 심리학적 수사로 실비아를 검거했다고 주장하지만, 날카로운 배틀 총경의 정확한 진단은 진실을 관통한다. 앰프리 교장이 자랑스럽게 검거 과정을 적발했을 때 배틀 총경은 침착하게 얼굴엔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게 “고맙습니다. 선생님.”하며 “선생님이 괜찮으시다면 이제 제 딸을 보고 싶군요.” 라고 답한다. 그리고 실비아에게도 “마음 고생이 심했겠구나, 그렇지? … 네가 어떤 아이인지 아빠는 줄곧 알고 있었어. … 너는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거야. 그것도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긴 하다만.” 그렇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배틀 총경은 『0시를 향하여』의 탐정 역할을 맡은 경찰로서, 증거도 없는 사건의 해결을 위해, '아주 이상한 방식'을 이용해 범인 네빌의 자백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할 일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배틀 총경의 다음 말에 주목해 보자. “이 학교에서 네가 훔친 건 아무것도 없단다. … 너는 아주 드문 유형의 거짓말쟁이일 뿐이지.” 실비아가 자식이라서 물불가리지 않고 믿어준 것은 아니라는 말이고, 그 아주 이상한 방식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냉정한 분석가의 진단이다. 바로 프로이트와 같은 분석가의 태도다. 배틀 총경은 시종일관 '네 아빠라서가 아니라 도둑이 어떤 인간들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딸의 무죄를 확신했다는 말이다.


앰프리 교장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범인을 검거했다.


저는 학생 전원을 소집하고 이 사태에 대해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저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지요. 실비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전 알 수 있었습니다. 죄책감이 어린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어요. 바로 그 순간에 저는 누가 범인인 줄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저는 실비아를 불러다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실비아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한 테스트를 실비아에게 해보았습니다. 단어 연상 테스트였지요.”(0시를 향하여』)



3. 미니멀리즘으로 실뜨기하기


결정적인 열쇠가 하나 있다. 실비아는 앰프리 여사가 파악하지 못하는 엉뚱한 유형이었다. 애거서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상황이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장소로 총집결되는 최정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배틀 총경이 분석가의 위치를 차지하는 듯 보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가 반영한 그 시대의 프로이트는 포와로다. 탐정들은 모두 신경증을 앓고 있다. 홈즈가 중독자이며 포와로도 그렇게 표현되는데,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남성) 신경증의 전형적인 인물들과 유사하다.


울프맨과 래트맨 연구는 모두 프로이트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사례 연구들이다. 울프맨과 래트맨을 괴롭혔던 신경증적 문제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같은 염려와 동정심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이 병에 맞서면서 보여 준 창조력과 끈기에 감탄을 표하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남성 환자들의 고통스럽지만 창조적인 질병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콤플렉스』)


그러나 미스 마플은 좀 다르다. 홈즈가 근대과학의 최신 정보에 능통하고 포와로가 명망 있는 다국적 탐정인 반면 마플은 소설을 읽고 뜨개질을 한다. 세인트 메리미드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별로 없는 평범한 할머니다. 평범이라고 표현했지만,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나이 많은 여성은 여러 가지 악덕을 갖게 되고, 마플이 그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미스 마플은 애거서 크리스티와 가장 닮았다. 애거서는 셜록 홈즈를 즐겨 읽었지만, 포와로를 탄생시켜 전세계에서 두번 째로 많이 읽힌 작가가 되었다. 포와로는 프로이트가 탄생한 시공간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에 가깝다. 그런 포와로를 역전시켜 놓을 인물로 미스 마플이 등장했다고 말하면 어색한가. 미스 마플은 여성 신경증, 히스테리가 없는 탐정이다. 탐정이 아닌 탐정이다.


탐정에 열광하는 일은 말 그대로 미니멀리즘을 맛보는 일과 흡사하다. (미술 음악 문학 … 암것도 모르지만 회색 뇌세포를 사용해서 추측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떤 시간, 모종의 공간이 하나로 모아질 때 놓치지 않고 따라오는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을 읽어내고 진단해서 엉킨 실타래를 말끔하게 풀어내는 일을 탐정이 한다. 미니멀리즘은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최소한의 표현, 최대한의 일치로 본질을 표현한다. 단조로움은 담백함이다. 도라의 일상은 길고 긴 싸움이었고 추적이었고 긴장이었지만, 히스테리라는 진단 앞에서는 투명해지고 미니멀리즘해진다.


나는 가끔 마플이 하는 말을 따라한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를 가도 대체로 거기서 거기에요,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하고 나면 행복해져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전부 그대로 믿어선 안되죠. 전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보이면 아무도 믿지 않아요! , 저는 늘 스스로 증명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본성을 잘 안다고 자만하는 탐정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게는 … 자신을 믿고 자신을 딛고 그리고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최소한의 겸손을 가진, 탐정의 실뜨기로 들린다.


*나는 어제 아팠다. 지금도 아프다, 아마 내일도 아프겠지만, 굳이 내 자신에게 왜 나아지지 않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라는 내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도라의 말은 내게 들어와 있다. 말하지 않아도 말이 움직인다. 머물러야 하는 말은 없다.


1완성하지 못한 글쓰기 주제가 여럿이다. 그 중 하나가 <황금율의 역사 – 누가 왜 프로이트를 강박하는가>인데, “질문하는 자와 응답하는 자”의 관계론이며 대화론이다. 루소의 학술진흥원이라든지 대한민국의 인력개발기관이라든지 누군가 갑자기 정신이 급변해 연구지원금을 투척해준다면 다시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열등하며 이방인으로 자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일에 눈꼽만치도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왜 혈통이나 또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소위 나의 민족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저주받은 운명 속에서도 독립적인 판단을 가진 인간으로 우뚝 서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정신분석에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2며칠 전 곰발님의 포스트에서「미니멀 룩의 정석」을 읽고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포스트는 곰발님이 좋아하는 작가가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을 출간했는데, 그의 글들이 시대의 빈곤을 말하기 좋은 담백하고 건조한 문장이라는 극찬이었다. 사교를 모르는 나는 그때 댓글로 미니멀리즘에 대해 뭔가 끄적여보고 싶었는데, 신간을 축복하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생각을 접었다. 곰발님이 응원하셨으니 그 책은 아마 더 흥하게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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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6-15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글 제가 알라딘에서 3년 내에 읽었던 글 중 가장 탁월합니다.. ㅎㅎㅎ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한자 한 자..
포와로를 역전시킨 인물이 미스 마풀이라는 지적에 무릎 탁, 쳤습니다..ㅎㅎ




그런데 도라가 나중에 자살했나요 ? 전 왜 기억에 없는 거죠 ?


초원 2018-06-20 13:06   좋아요 0 | URL
지난 이틀 동안 ˝질서로 복원되는 청소과정˝이라는 곰발님 의견에 골똘했습니다.
그런데 별 진척이 되지 않는군요.

처음 읽었을 때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요. 곰발님은 에너지로 혹은 정보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고, 그 부분이 여전히 어색한데, 뭔가 다른 갈래의 생각들을 촉진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글로 한번 써보고 싶군요.)

범인은 이미 있었던 것이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일을 탐정이 합니다. 하지만 진상이 드러나는 중에 발생하는 어긋남들, 그리고 범인이 확정된 후, 그러니까 죄인에 대한 처벌이나 사건으로 뒤틀린 균열들에 대한 후속 처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요. 공동체의 비극은 그렇게 다시 시작됩니다.

탐정의 일도, 작가의 의무도 아닌, 피해자와 관련자(독자까지 포함된)들의 몫이 되는 고통의 순환구조에서 오는 무력감을 썼습니다.

이런 논리는 자유연상을 분석하고 꿈을 해석하는 정신분석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는 생각에서, 전경과 배경이 역치될 수 있는 순간들을 상상했습니다. 실뜨기라는 희망사항을 덧붙였지만 여전히 의문부호입니다.

이어지는 글이 있는데 언젠가 곰발님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늘 싱싱한 투쟁력으로 알라딘 왕좌를 놓치지 않는 분이신데. 제게 따뜻한 말씀을 나눠주셔서 다시 또 고맙습니다.

(참, 뱃 속의 악성종양으로 인한 통증을 히스테리 증상으로 오진해서 두 달후 사망에 이르게 한 열네 살 소녀는 도라가 아닙니다. 도라는, 다시 찾아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기억으로는 k부인의 자녀가 사망한 후에 그 부인에게 위로를 전했다는 후일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잘 지냈다는 말이겠지요. 도라는 타고난 투쟁력을 가진 여성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15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탐정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주장합니다.

추리소설의 핵심은 엔트로피(무질서)를 네트로피(질서)로 복원시키는 과정 아닙니까.
무질서해서 뒤죽박죽인 사건을 청결한 네트로피로 되돌려놓는 것. 일종의 추리소설은 청소하는 과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원 2018-06-18 12:5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곰발님...
제가 출연료도 드리지 않고 글 속에 출현시켜드렸네요.

잘 지내시죠?
가끔 알라딘에 들리게 될 때마다 곰발님 댁은 찾아뵙거든요.
여전한 모습 뵐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웃게 되지요.
늘 좋은 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증거기반의학의 철학>에 관심이 갔습니다.
탐정의 방법론이 의사나 철학가, 사회과학자와 다르겠지만
어떻게 데이터, 자료, 사실, 증상 ...등을 분류, 해석, 진단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말다 하다보면 뭔가 통계청 직원이 된 듯도 하더이다.

곰발님 댁에 ‘새빨간 활‘이라고 명패가 있던데 무슨 뜻일까 궁금했습니다.
선주민들의 사회에서는 활이 여성이고 화살이 남성이던데요.
그런 의미는 아닐 것 같고
새빨간 펜이라거나 붉은 망토가 연상되었답니다.
저처럼 여성임에도 추리 능력이 꽝인 탐정불능도 있답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clavis 2018-06-16 1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원님 무지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나요?^^글 잘 읽고 갑니다 무지 멋있어요ㅎㅎ

초원 2018-06-18 13:17   좋아요 1 | URL
와~~ 클라비스님, 오우~ 클라비스님.
너무 반갑습니다.
제가 아파서 좋았던 일도 있는데요.
그 하나가 클라비스님이나 곰발님과 같은 좋은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클라비스님
침착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담백하고 청아하게
잘 이겨내셨길 빌었습니다.

들리지 않아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어떤 말은 영원히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저 혼자 하는 기도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클라비스님 댁 포스트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읽으면서
잘 되실거라고...믿었습니다.

어떤 길 위에서든 클라비스님만의 리듬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들려지기를...

물과 비타민 많이 드시고
혹여 지치더라도 금방 펄쩍 뛰어오르시길...바래봅니다.

2018-06-18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19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수 이상은의 노래 제목입니다. 새빨간활이라고... 노래 끝내줍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2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원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길어서 아예 포스팅했습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가만 생각한다. 여름이라 빨래는 금방 마를 것이다. 조금 덜 마른 상태라면 드라이기로 말려도 되고 그냥 입고 나가도 무방하다. T는 이 멍청한 일을 반복하는 날 보며 급기야 화를 내기도 했었다. 몇 년 전부터인지 기억도 가물한데, 한 계절에 한 벌로 생활한다. 다른 어려움은 없는데 세탁이 문제다. 여름이면 땀냄새로 일주일에 2~3번은 해야 해서 불편하고, 겨울은 1번이면 충분하지만, 잘 마르지 않아서 문제였다. 탈수 강도를 가장 세게 해놓고서, 쪼그려 앉아 구경한다. 셔츠와 잠바가 뒤섞여 돌아간다.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2년 정도 세탁기 없이 살았었다. 비누칠하고 비비는 일보다 힘겨운 단계는 짜는 일이었는데, 헹굼 횟수를 줄이려면 최대한, 그러니까 얼굴의 근육까지 긁어모아 용을 써야 했다. 손빨래는 생각보다 골치였다. 겨울 옷은 짜는 일이 만만치 않다보니 헹굼 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고, 찬물에 손이 시려워서 더운 물을 쓰게 될 때도 있었고, 더러는 마른 후에 비눗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다. 세탁기는 지구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꼬오옥 필요해, 그때마다 중얼거리곤 했었다.


좋은 세상이다. 누군가 준비해준 편의들이 방을 메우고 있고, 집 밖을 나가도 잘 짜여져 있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맘만 먹으면 준비된 세상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요가 하러 가는 건물은 음식점, PC, 피부관리실이 … 빼꼭하게 들어서 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열려 있다. 가끔 열린 뒷문 사이로 음식점 부엌을 들여다 보는데,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 대파를 다듬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저 부엌에도 에어컨이 돌아가고 식기세척기가 윙윙 작동되며 편한 의자 하나 놓아두고, 아 편한 세상이다를 중얼거리게 해주세요.


이런 한탄들은 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상이다. 가끔 한방병원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거 안 좋아져요. 평생 가요. 그는 온갖 통계를 인용하며 날 납득시키려 했다.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환자에게 적절한 말은 아니었지만, 꼭 들려줘야만 했던 말이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공황장애가 오기 전부터 나는 병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벌로 생활하면서도 어떤 결핍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편안했다. 바지 하나 더 사라는 T의 압력에 못이겨 막상 사려고 하면 굉장히 피곤했다. 가게까지 가서도 여러 차례 돌아오기도 했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내가 사서 입는 옷이 만 원 안팎이었으니 살려면 못 살 일도 아니었다. 불필요한 소비를 하고 싶지 않아하고 변명했다. 한 벌 더 사서 입으면서 누군가를 향한 고마움를 더 많이 느꼈어야 했다.


지금 맹렬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며 내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다. 이 좋은 세상을 왜 긍정하지 못하는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실재 세상이 아니다. 내 생각 속의 세상일 뿐이다. 저마다의 세계를 이 작은 머리로 비평할 일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모든 기반에는 누군가의 삶과 노동이 스며들어와 있다. 내가 뭐라도 된 듯이, 이 세상에 슬픔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가. 또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덧씌우려 하는가. 부정이 내 머리를 장악한다고 무슨 득이 있겠는가.


라캉의 시각은 환자가 치료를 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환자에게 증상이 나타나고 그가 증상에 빠져 있다면, 이는 그 증상 속에 많은 양의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현재의 증상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양의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는 증상을 통해, 프로이트의 표현대로라면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으며, 따라서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환자들은 분석가를 찾아와서 하루빨리 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환자는 증상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족>이란 용어는 증상이 제공하는 쾌락을 기술하기엔 너무 단순하다. 현실적으로 불만족을 불평하면서도 끝내 분석가를 찾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불만족과 불평으로부터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타인들을 비난하면서 만족감을 얻는다.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으면서도 엄청난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프랑스어에는 이러한 고통 속의 쾌락을, 불만족 속의 만족감을 지칭할 만한 적절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다. 주이상스는 자기 처벌이나 고통스러운 일에서 느끼는 흥분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기 증상에서 만족감이나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늘 그들이 증상을 즐기며 단순히 만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이상스>라는 용어에는 주체가 어떤 수단으로든지 쾌락을 즐긴다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1증상이 가져다주는 만족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주체는 그게 만족인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불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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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 변증법적이라고 한다면, 언어론적 전회로 구축된 이 세계도 조만간 역변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파괴하게 될 것인지 예측하는 일은 부질없고 부적절하다. 그렇더라도 그 기미를 읽어내는 일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전문가 학자들이다.


어떤 학자들은 역사적 인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전히 '끝없는 단두대' 준비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은 인간 너머를, 경험 너머를 사고하고 있다. 내 편견에서 말하자면 변화는 늘 무언가가 버무려져 있을 때 온다. 집중이 동력이라고, 그래야 거대한 혁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만, 내 이론으로는 그 반대 양상에서 펼쳐진다.


2.

『숲은 생각한다』가 출간되었다. 작년부터 기다리던 책이다. 온갖 공동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그 답답한 시야에 빛이 될 수도 있겠다. 에두아르도 콘이 소개하는 세계에서는 언어라는 고차적인 상징 질서가 아니더라도 복합적인 의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의 전회는 ≪인간의 위치≫를 조정하는 큰 일에 뛰어들었다. 물리학, 유전자 공학, 생물학 등을 결합한 인류학적 탐색은 마치 만화경 같다.


3.

사회과학의 위기라는 의견들이 있다. 문화적 현상을 해설하는 역할만 하다가는 유행을 확대시키거나 금지를 생산하는 일만 하게 됨을 걱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었는가. 사회적 얽개를 짜거나 새로운 사유를 펼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회과학자의 ''바른 이상에 대한 집착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끝났다는 의견들이 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국가는 살아 남았음은 그들에게 큰 근거가 된다. 경험적으로만 생각해도 혼동되는 부분이다. 죽어서야 사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살아있음이 치욕인 일도 얼마나 많은가.


4.

칼럼「프랑스 현대철학 써먹기」를 읽었다. 

 http://hankookilbo.com/v/436c28f5c02244bc89aefded8ae0e5b5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뭐가 끄적거린다.


산울림을 부릅니다, 아니 벌써.

사랑과 평화가 한동안 뜸하군요.

모스크바 공산당에게는 5,000명의 록커가 있어요.

비틀즈의 노래는 어쩌다가 삐라를 타고 말았나요.

체 게바라의 턱수염은 뽀샵기계로 박대당하지 않아요.


꾸덕꾸덕한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애써 놓친 맥락을 찾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냉기만 흐른다. 냉소는 오만 속에서 나오는구나 싶다. 이럴 때는「혁명에 대한 실용적 지침들」혹은「냉소를 활용한 요리팁」정도는 써야 할텐데 내게 그런 열정은 없구나. 팥빙수의 계절이다. 수염과 노래 • 기계 • 철학의 열정과 냉소를 버무리면 팥빙수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사람은 사회적 독서를 통해 무엇을 말했을까? 말하고자 했을까가 아니고.


4.

국립현대미술관 5월의 행사를 소개한다.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수직에서 수평으로: 예술 생산의 변화된 조건들


미 이종간의 결합과 해체는 상식적인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술 텍스트들은 구체적인 것들에 점점 더 관여한다. 그것들은 단순히 사회 또는 문학에 집중하기보다는 “산, 과일, 대기 효과, 핵 탄두, 샌드위치, 자동차,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유물”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사물의 이런 맹습의 주창자들은 다양한 이름 아래 자신의 동지들을 결집시켰는데, “생기적 유물론”과 “새로운 자연주의”는 “객체 지향 존재로”과 “사변적 실재론”과 친근하다. 그렇지만 이런 유형의 사유에 대한 기억하기 쉬운 가장 포괄적인 이름은 “새로운 유물론”인 듯 보인다.

(이언 로우리 서평,onto-cartography』)

출처: 사물의 풍경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YJHp

5.

들뢰즈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분법적 통설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카오스적인 정념을 강조한다. 들뢰즈가 더 정밀한 세계로 들어가서 광범위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자 했을 때, 그러니까 “수학을 매개로 한 자연-신체-정념의 해명”을 시도했을 때, 정언의 세계로 직진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들뢰즈가 그 자신의 의도 내에 아직도 있다면, 바로 『BTS와 예술혁명』 같은 연구서들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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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슨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에 대해 말하고 설명하고 정의를 내리고 평가하려는 욕구를 뛰어넘어야 하며,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올슨은 아무리 견고한 지배체계 내에 있다 하더라고 신뢰와 욕망의 흐름 속에서 이미 운동과 변형이 발생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 부분만 놓고 보자면 올슨의 “귀를 기울인다”는 실천철학이나 품행론의 평범한 격언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미시정치학은 상투적인 것, 규칙들, 관습들과 독단적이고 원칙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밖으로 밀어낸다. 살아 있는 체험, 즉 아이들이 보여주는 비인칭적, 단수적 생성들은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달라서 그러한 것을 참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다. 바로 이럴 때는 폭력적이다. 그 위험성에 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이들의 잠재성을 인정하고 교실에서 생성이 일어나도록 하고자 한다면 어려움에 직면해야 하고 폭력에 민감해야 한다. 푸코가 이야기했듯이 모든 것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시작했던 많은 교사들은 시작한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유아교육 읽기』, 리세콧 마리엣 올슨)


그리고 나서 들뢰즈의 질문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들뢰즈는 이 질문에 사로잡혔다. 들뢰즈는 푸코가 빈번하게 타자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했던 푸코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타자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아이들의 연령이 어릴수록 우리는 아이들을 대변한다. 어린아이들이 미성숙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표현하고 다룬다. (같은 책)


몇 달 전 이 책을 읽고 난 후 들뢰즈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속의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이 무엇은 재인의 대상이 아니라 근원적인 마주침이다.” 이 구절은 마치 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 같더군요. 2010년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필사했었지만 페이퍼는 만들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들뢰즈에 대한 특별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들뢰즈 독자도 유아교육 전공자도 아니지만 이러한 실험 자체가 주는 매력에 이끌려 다시 들뢰즈를 보게 되었습니다. 속도는 느립니다


  '귀 기울이기'와 '타자를 대변하기' 의 차이, 그리고 비인칭적 , 단수적 생성의 폭력 가능성 .... ... 


BTS와 예술혁명』이 출간되었습니다. 바로 도서관 희망도서에 신청하고, 저자의 강연회에 참석했지요.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만들어가는 예술혁명이라니요, 『문화과학』2018년 봄호에서「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의 접근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더구나 연구자는 상당히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화과학』을 통해 방탄소년단을 알게 되었을 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혐오 담론 7년」,「역진의 정치성」에 시선이 갔었지요. 이규탁 씨의 이 글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들뢰즈를 중심에 둔 사유 실험으로서 두 권의 책을 펼쳐 놓고 마주치게 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BTS와 예술혁명』이 중심입니다만, 뭘 알아서 논하려는 것보다, 이 책들을 둘러싼 흐름, 그러니까 '실험적 경험론'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유아교육 읽기』가 『BTS와 예술혁명』에서 하는 말을 듣고 응하는 것이지요, 그 역도 가능하구요.


저자 강연회에서 연구자(이렇게 부르고 싶군요)는 매우 상기되어 있었고 부정적인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다고 말하는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질의 응답시간을 듣지 못했지만,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을 겁니다. (강연 자료 없이 진행된 행사라 기억에만 의지해서 쓰고 있음을 참고하세요.)


「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규탁)에 따르면, 방탄소년단은 3세대 아이돌에 속합니다. 메이저 3대 기획사가 아닌 중소기획사 소속으로, 2013년에 데뷔하고 바로 멜론 뮤직 어워드 신인상 및 골든디스크 신인상을 수상하며 10대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서 유별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아미>들은 유튜브 댓글 및 커버댄스, 반응 동영상 등을 통해 글로벌한 마케팅을 활발하게 시작했으며 곧 케이팝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이후 20179월 발매한 <Love Yourself 'Her'>가 빌보드 7위를 기록하며 정상에 서게 되었는데, 특히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기 어려운 이국적인 이미지, 격렬한 안무와 퍼포먼스, 훌륭한 라이브까지 소화하는 실력으로, 2017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 '톱 소셜 아티스트' 에서 축하 공연 무대까지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국내 어떤 가수도 해내지 못한 일을 방탄소년단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갱신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규탁 씨의 논의를 요약해서 보자면,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다른 남성 아이돌 그룹처럼 팬들의 수용 및 창작 행위로 만든 다양한 커버댄스 영상, UCC 수용자가 만든 콘텐츠가 큰 역할을 했답니다. 이 마케팅은 2007년 원더걸스 'Tell Me' 열풍 이후 활용된 직캠, 반응 동영상 등으로 유튜브를 통해 업로드되고 다시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공유되므로, 해외 팬들의 수용 및 창작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3세대 아이돌의 경우에는 음악 제작 과정, 안무 연습 과정 같은 평소 생활,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콘텐츠가 포함된 음악 외적인 콘텐츠를 직접 제작해 수용자들에게 활발히 제공한다고 하는데요,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브이앱은 “대한민국 최고 스타들의 각본 없는 실시간 방속이 시작된다” 라는 약속으로, 물리적인 거리와 시장 여건의 미성숙으로 관련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운 해외 팬들에게 패션, 사생활 등을 활용하는 360도 마케팅. 모든 각도에서 스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노출시키는 매체가 되고 있답니다.


자신들 만의 '서사(敍事)를 만들어낸 것이 가장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서사'에는 중소기획사 소속으로 대형 기획사의 거대한 힘을 등에 업은 다른 그룹 및 그들의 팬들과의 경쟁, 굉장한 미남이나 교포 혹은 외국인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능력 있고 의욕적이며 더불어 소탈한 한국 청년들의 성장기( 『방탄소년단이 '떡밥'들로 만든 세계』, 강명석) , 때로는 전형적인 '2' 감성처럼 느껴지지만 그만큼 10대들의 감수성을 솔직히 담아낼 수 있기에 그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가사 등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규탁)


연구자가 방탄소년단을 만난 건 2017년 초반이었기에 '늦덕'이라고 합니다. 방탄소년단에는 팬클럽인 <아미>가 있는데, 말그대로 군대처럼 조직되어 운영되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연구자도 <아미>였기에, 강연의 절반은 “얘네는 다르다 … 어린애들이 어떻게 이런 말을 … 진정성 있는 아이돌 …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는게 고맙다 …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다른 버전을 보여준 … 방탄소년단에 대한 찬가를 (뮤직비디오를 통한 미학적 시선으로)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정신분석학적 '부친 살해'를 통해 수직적 위계구조를 무너뜨리는 「I need you」를 해설했으며, 「봄날」을 통해 그려낸 세월호와 관련된 사회적 메시지에 주목했고, 「피땀 눈물」에서 이카루스의 추락과 피에타, 데미안 등의 연결구조와 <아미>들의 해석본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이미지가 형성되는 지점을 짚어주었습니다.


연구자의 관심은 시종일관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만들어내는 “예술 형식”에 있어 보였습니다. <아미>는 단순히 방탄소년단이 만든 곡을 듣고 소비하는 세력이 아니고, 수많은 해석본을 만들어내는 동반자라는 것입니다. <아미>들은 뮤직 비디오의 많은 쇼트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속 • 반복 • 연작으로 의미를 생산하고, 전체 서사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하나의 곡이 발표되면 즉시 무수한 해석본이 생성되는 것이지요. 이 작업을 위해서 <아미>들은 니체를 읽고 데미안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도 테마에 따른 기승전결에 의해 구성되며, 각각의 에피도 기승전결을 갖는 구조이므로, 전체적인 서사를 이해하는 선지식이 없으면 자발적 조력자가 되기도 어렵게 되고, <아미>들은 연관된 생산물을 제공하는 조력자가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연구자는 <아미>의 충성도는 전지구적 연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예로 <아미 캠페인>을 통해 무슬림의 날을 만들고 폭력을 끝내자 • 히잡 쓴 여성을 보호하자는 공동 선언을 하는 것이죠. 미국 내 10개의 <아미> 지부가 있고, 중위가 지휘자로 있으면서, 방탄소년단을 알리기 위해 방송에 희망곡을 신청하는데 … 라디오를 뚫기 위해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계속 전화하고, 상처받으면서도 노력해서 결국 … 라디오를 통해서도 방탄소년단의 메시지를 공유해나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연구자는 '방탄현상'의 몇몇 지점에서, '최대한의 변경'을 자발적으로 행하는 <아미>문화에서, 문단과 문단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일관성'으로 엮여가는 서사에서 들뢰즈를 떠올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따로 놀던 한 줄 한 줄이 나중에는 모두 다 한곳에서 만나고 있음을 느낄 때, 그리고 각각의 철학자에 대해 독특하고 개별적인 해석이 궁긍적으로 하나의 흐름에로 귀속되고 있음을 느낄 때, 바로 그 순간이 독자가 들뢰즈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요, 또 그의 사유를 맛보는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될 것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근본적이고 글로벌한 무의식을 통한 연대 … 세계는 변화할 필요가 있고 더 큰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에 감응한 … “ 방탄소년단과 <아미> 현상은 『BTS와 예술혁명』에서 들뢰즈의 리좀적 혁명 상황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이규탁 씨는 “연중무휴 감시 체제”로 감정노동으로 사적인 영역을 잃어버린 3세대 아이돌에 대해 방탄소년단이 보낸 메시지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는 회로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아이돌'이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과 업무를 마치고 '퇴근'한 이후 자연인으로서의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희미해짐을 의미하며, 더불어 케이팝의 세계화가 심화되는 요즘이라면 극단적으로 낮과 밤의 구분 없이 매일 24시간을 아이돌로서 살게 됨을 뜻한다.

특히 케이팝 아이돌은 남녀을 불문하고 음악적인 역량 외에 훌륭한 인성, 즉 “팬에 대한 겸손과 헌신, 그리고 팬들의 요구에 응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 지 오래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그들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부과된 감정노동을 거의 극한까지 수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음악콘텐츠 자체의 매출보다 오히려 비음악콘텐츠의 매출과 중요성을 확장했다. (「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규탁)


모든 아이들이 방탄소년단이 된다면 아니면 아미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외치겠지요.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Everybody say No.

나는 꼭두각시 인생이 아니라고,

남의 꿈에 갇혀 살지 않을거라고.

3포세대 5포세대

그럼 난 육포가 좋으니까 6포세대

이런 게 방탄 스타일 난 좀 쩔어


연구자는 연구자이면서 <아미>로서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어쩌면 연구자의 욕망 자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그 자체로 혁명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후속 연구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이 시도가 제게는 들뢰즈를 이용하는 여러 갈래로서 의미가 있습니다만, 또 무엇이 세계를 억압하고 있는가, 어떻게 억압당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단절, 외로움을 근간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매개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탄소년단과 <아미>는 수평적 관계가 되고 있다 → 아미 없이 영광도 없다는 전개가 수목구조를 탈피하는 것인지도 더 고민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BTS와 예술혁명』에 이어서 '방탄현상'을 바라보는 해석본들이 줄을 이어 나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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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4-23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사한 텍스트가 차이와 반복이었다니.. 감탄하게 됩니다.. ㅎㅎㅎㅎ
저도 미시정치학에 관심이 많아서 푸코와 미시사를 다룬 책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정치지리학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지리학... 재미있더라고요..
방탄소년단 혁명.. 요거 함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초원 2018-04-24 19:27   좋아요 0 | URL
곰발님, 잘 지내시죠? 글쎄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A4 150장 정도인 걸 보면 모두 다 쓰진 못했나봐요. 너무 어려워서 천천히 읽어 도움되라고 썼는데 …
근데 베낀다고 해서 뭘 더 알게 되진 않더라구요.

도시가 좋긴 하군요. 지금 창밖에선 나무들이 몸부림을 치는데 저는 구경할 뿐이니 … 정치지리학이 그렇게 재미납니까? 저도 찾아봐야겠네요.

포스트잇 2018-04-24 0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주제네요. 예술혁명...까지는 모르겠고, ‘감정노동‘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같은 형태의 아이돌 산업은.. 어느 단계가 지나면 우리나라에서는 사양산업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경제면이나 사회적으로 어느 국면이 지나면 더이상 할 수 없는 산업이지 않을까..생각합니다만,,,,
...잌;;;;; 여기저기서 돌 날라오는 소리가...;;;;

초원 2018-04-24 19:26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님,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아니 이 분은 누구신가요? 고전소설 속 탐정 분위기가 물씬 풍기네요.
요즘은 뭘 조사하고 계신가요? 탐정은 그림자가 되어야 하는군요. 귀는 보이는데, 다른 부위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 있어요. 돌이 날아오거든 얼른 저 커다란 모자 밑으로 숨으셔도 되겠어요.


혁명이라는 말을 선언으로 읽지 않고, 연구로 보니까 뭔가 새롭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에휴.

지난 주말부터 긴장상태가 심해서 회피나 우회의 수단으로 쓰다보니 더 두서가 없었는데 …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알라딘을 통해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다녀왔다. 어떻게든 외부와 통신하려는 노력이었다. 지난 주 목요일 『길 위의 독서』와 금요일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연달아 가게 되었는데, 날씨가 안 좋았던 첫날은 까탈스런 참새가 되어 작은 자극에도 파르르 떨며 푸드덕 날아갔다. 성남에서 서강도서관까지 편도 2시간여 거리가 힘들기도 했고.


1.

10대는 꿈이 없고 20대는 답이 없고 … 60대는 낙이 없다는 말로 ≪길 위의 독서를 통해 만난 공부≫가 시작됐다. 메모를 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어렵다. 작가는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 모든 세대가 어떤문제를 안고 불안과 불행이 뒤섞인 시대를 걷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던지면서,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얻은 희망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듯) 했다. 여러 자료를 통해 현재 사회구조가 작동되는 형태를 (흐릿하게나마) 제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과거 포드 시대와 달리 터보 자본주의로 들어선 이후, 노동자이며 소비자인 대다수는 더이상 권리 투쟁 에너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백화점 쇼핑몰의 80% 이상의 매출을 5~10% 정도의 우수 고객이 올려주기 때문에, 기업의 타겟 마케팅 자체가 대중적일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는 점과 자율 주행 자동차의 약진 등의 미래 기술로 인해 대량 노동이 불필요한 구조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투쟁이나 소비자 투쟁이 폐기되어질 위험에서 시민권 마저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고로 자발적 복종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고민해야 하며 시민권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물론 노동 운동가 전태일과 용산 참사 등의 굵직한 서사를 통해 기억해야 할 사건, 맞서야 할 장소를 짚어내고, 진보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짊어질 책무를 차분하게 전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대출하며 1시간을 읽었고, 강연회 전날 2시간 남짓 더 읽어 4/3정도 읽고 참여했었다. 목차와 출판사 제공 문자를 읽고 기대들이 몰려왔었다. 그런데 … 책 소개를 보며 연상했던 지점들이 책읽기에서 어긋남을 느꼈고, 강연회에서 낙담했다. 도서관 3층에서 작가는 진지하게 사회적 문제로서 '주체'에 대해 성찰하는 질문을 조리있게 제시했지만, 몹시 피로했다. 길 위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맥락일까를 맴맴 돌며 찾았다.


어색해서 삐딱해졌다. 몇 십년을 통과하며 읽은 책들이라고 했지만, 스물에 읽었을 책과 마흔에 읽는 책의 결이 비슷해서 모두 어제 읽은 책들 같다. 또 작가가 다독가인 줄은 알겠는데, 머리말조차 여러 작가의 한 마디를 증거로 끼워넣은 일은 어색했다. 그래서 삐딱해지기로 했나보다.

길 위에 있는 “길손, 구도자에서 행려”에 이르는 사람들의 육성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방황해야 했던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중년작가의 고언 姑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또한 가슴을 적실 수 있는 일이지만, 고군분투하며 낚아올린 독서 경험으로 자아의 무게를 견딜 사랑의 힘을 역설하고, 세상을 견디는 방법을 예시하는 글들은, 내게는 여백이나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뭘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몇 가지는 계속 마음에 걸린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1부 「자기성장의 길」에서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아가며 생활하던 집창촌에서 만났던 여성이 떠오른다. 작가는 그녀가 중학교 시절에 두 차례나 낙태를 해야 했고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불운한 여성이였음을 배경삼아 서술했지만, 맥락은 『떠돌이 개』의 예처럼 절망보다 문제가 되는 체념을 이기고, 희망 없는 사랑을 하라였다. 나는 그 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녀가 남겼던 한 마디나 사소한 흔적, 혹은 그녀를 통과했던 시선이이라거나 그녀에게 보내는 무력하지만 연대 넘치는 응원 한 마디가 없어서 아쉽고 … 한없이 슬펐다.


작가는 왜 자꾸 자신을 아직도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세상에 편입되지 못하는 사람들, 탈락되거나 자진해서 잊혀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나보다. 나같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무려 23년을 근무했으니까 길 위의 인생을 많이 만났을 거라고 믿었나 보다. 길이 아니라 책 위에서 만난 이들을 싫어하지 않지만, 길과 책을 같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나는 그날 서울역에서 환승하며 광장을 걸었다. 여러 종교의 전도자들이 쩌렁쩌렁 말씀을 낭독하고 있었고, 수십에서 백여 명은 됨직한 노숙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봉사단체 밥차도 있었고, 술냄새가 진동하는 무리들도 꽤 되었으며 아직 대낮인데도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기도 했다. 당황스러웠는데 당연한 듯 지나쳤다.


작가 자신이 개척해 나가는 인생이 길이고, 그 새로운 길을 만드는 공부라는 의미일까.


2.

두 번째 책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은 부제가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 역사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이다. 말과 활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아직 읽지 못하고 참여했다. 인상에 의지해 서투르고 빈약한 글을 쓰는 이유는 알라딘 이벤트 당첨에 대한 응하기의 일부이며 끝없는 움직임, 버둥거림으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다.


'역사적 사건의 해석으로서의 정치'라는 소제목으로 무료 강연을 진행하고, 유료 강좌를 통해 책 내용을 세밀하게 해설한다고 한다. 활력 넘치게 강의를 들었다.

우선 저자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을 단서로 제시했다. 2012년 대선처럼 박빙인 정치 상황이 없었다고 한다. 두 후보는 과거의 누군가를 소환했는데, 마치 유언 집행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정치 차원에서 과거 인물을 소환하는 일은 유권자에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환기시키고, 일종의 죄책감을 유발해서, 미래를 정해진 축으로 설정하는 일과 연결된다. 모든 고통이 도래할 메시아로 인해 일시에 제거되는 사건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과거의 고통과 희생이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앙겔루스 노부스, 그림 속 천사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이 신新천사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고,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가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를 모으고 싶다고 말하는 벤야민의 해석을 길게 들려줬다.


하지만 한줄기 난폭한 바람이 천국으로 불어와 그의 날개에 와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 없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 (벤야민)


저자는 세속화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을 유지한 듯 보였다. 아니 모르겠다. 역사의 종점 • 구원을 역사 내로 끌어들이는 세속화는 계몽으로 진행되었고 자본주의라는 종교적 원칙으로 변신했다. 미래에 완성될 유토피아, 천국 … 미래를 그리는 시선은 마치 미래라는 정념으로 휩쓸려 떠밀려 가는 주체를 생각하게 했고, 그 시선의 방향을 돌리는 신천사가 나타난다. 과거를 응시하라, 폐허를 응시하라.


그렇지만 저자는 과거의 기억 • 고통 • 희생을 초월적 혹은 초감각적 세계로 이끄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과거를 향하는 시선이 어때야 하는지를 따져묻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의 불의와 어떠한 communio를 이루고 있는지, 신성시된 권력을 어떻게 '세속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해 왔는지 정규 강좌를 통해 들려주고 싶어했다.


빼앗겼다는 정념이 지배하면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하다고도 했고, 평전을 통해 만났던 운동가 전태일은 폭풍에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직시하는 힘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고통과 구원이 만나는 연결고리가 없다면, 초월하는 것들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고통이라고 단정하게 될까. 빼앗김을 사유할 합리적 대화가 구원이라는 정념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래에 다가올 축복을 예찬하는 진보낙관주의보다 미래를 그리지 말라는 유대교의 말씀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해 준 강의였다. 『길 위의 독서』작가와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의 저자는 희망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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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3-1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초원 2018-03-20 11:42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또 고맙습니다.

‘그장소‘가 무슨 뜻일까 궁금해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초록이 발등을 왜 부끄러워할까 궁금했어요.
아마 제가 무턱대고 찾아가서 그런가 봐요.

[그장소] 2018-03-20 22:41   좋아요 0 | URL
아하핫~ 모든 의미가 다 되는 그런 장소니까요 . 여기 저기라는 의미도 되고 약속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 누군가를 떠올리는 풍경이기도 한 ... ㅎㅎㅎ
리뷰가 좋았어요 . 저는 .. 개인도 잘 보이고 생각도 보이고 책도 동시에 보여서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