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 전에 책방 문을 닫으면서『서점은 죽지 않는다』를
보게 되었다.
왜 죽지 않을까.
죽지 않는 것이 있을까.
내가 열었던 책방은 죽었다.
아니.
혹시 어딘가 다른 형태로 살아
있나.
살다-죽다.
태어나다-죽다.
살다와 태어나다는 같은 위치에
있는 말인가?
살다-죽다는
단선적이며 내부의 문제이며 개체라 할 수 있는데,
태어나다-죽다는
태어나다-죽다-태어나다-죽다-태어나다
… 다수성을 가질 수 있으며 외부적이며 능동과 피동의
사이를 오가는 문제라서 얼마든지 교차와 복선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죽다-죽다는
같은 위치에 있다.
(내맘대로 사전,
12)
책방에는
여러 손님들이 오갔다.
그들에게는 사연이 있었으며,
웃음 뒤켠에 서글픔이물들어
나직하게 흘러나오곤 했었다.
그들은 책방 문을 열듯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 용기까지 갖고 있었다.
세상을 대하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던 사람들은,
병들어 있는 내게 여러 요령들을
일러 주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어렵지 않았고 때로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내 이야기를 묻는 시선에는 도통
익숙해질 수 없었다. 책방은 사적인 원환(圓環)을
발견 • 극복하는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책방의
모습은 사적인 원환을 다시 쓰고 직면하는 공간(空間)이었을
것이다.
서점 손실이 누적되고 내 병은 정체될 무렵,
한 손님이 서점을 흥하게 할 수
없어도 망하게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내던졌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신경
써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분은 활기차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였으며, 서점이 성공할 수 있도록 청소년
대상 강좌를 열어보라는 제안을 하는 등의 사업전략을
적극적으로 제안해주셨던 분이었기에 어떤 행간도
읽지 못한 채 그저 고마움만을 내보였었다.
그러다 다른 손님까지 그 말을
인용하며 사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확실히 하라고
했을 때도 감사함의 인사를 반복했으며,
운영상의 어려움을 내외없이
내뱉었던 내 실수에 영향을 받은 덕담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꽤 여러 명이 모인 모임에서 그분은 다시 그 이야기의
확장판을 웃으며 들려줬는데,
모임이 끝나고 내가 처했던 상황을
조금 더 파악할 수 있는 말을 가까운 지인을 통해
들었다.
망하게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는 어렵다며,
“그분은 진심같던데 …”라는
물음표를 훅 던져 주었던 것이다.
이미
그 손님에게 책방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죽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 손님과의 마지막 만남은 좋지
않았고, 나는
그 말에 전염되어 망해가는 서점,
죽어가는 책방을 느끼고 있었다.
망할 것이야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죽는다는 것은 염두에 없었다.
당연히 죽어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에게 책방은 내 원환의 체계가
어떤 모습인지 다시 직면하게 해주었다.
그분과
또다른 손님에게는 명확하게 보이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한방병원에서 만났던 아주머니와의
만남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던거다.
그 아주머니는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인생을 긴 시간 동안 성의껏 들려주었었다.
연간 천만 원 이상의 기부자
대열에 설 수 있도록 만들었던 원동력으로 끈기와
근성을 잃지 않았던 점을 강조했었다.
몸에 남은 흉터와 수술 자국도
확인시켜줬고,
자긍심 어린 눈빛도 보여주었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은 한가하고
게으르며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거라고,
내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목록을 일러줬었다.
그 당시 내게 그 강의는 옳고그름의
선상에 있지 않았고,
살려고 붙들어야 하는 '정상성'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었다.
야물지
못한 일처리와 탐탁치 않은 독서모임의 내용 등 … 그
손님에게는 거친 덕담을 건넸던 한방병원 아주머니처럼
격한 심랑이 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떨림이 멈추지 않고,
무섭기만 하던 때였기에 그 거침은
내게 부드러움 자체였지만,
그런 상황들은 맥없이 현실 곳곳에
반복되곤 했다.
여러 사적 체계들이 섞이지 못하고
교차한 부분도 없이 허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허공이 내 사적 원환에 진동을
준다.
인과적인
분석만큼 원한 감정도 싫어한다.
불쾌했던 순간을 재연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유쾌했던 순간을 지속하는 것도 껄끄럽다.
망한 서점이 무엇/누구
때문이라거나,
병든 내 신체가 불행한 과거
경험때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내 촉은 현재이며 내 감각은 현실이고
내 사유는 세계라는 그것들을 다 담고 있다.
공포와 고통만 느껴지게 하던 내
병증은 내 촉과 감각을 의심하게 했다.
사적 요인들에 떠밀려 쾌락/불쾌의
장면을 강박적 충동적으로 재연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주체적,
창의적으로 연기하거나 일매지게
계획하는 능력은 인간의 생산적 활동에 동원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코드다.(66쪽,
『집중과 영혼』)
이런
구절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거부감이 들고 의문의
또아리가 커졌었는데, 같은 문맥의 그 손님과 아주머니에게는 말없이 고맙다고 연신 말하며 경청했다. 이제 … '정상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며 애써 찾아본다.
아뿔사, 고깝게 멀어지게 하던 차가움을
다시 확인한다. 정말 죽음으로만 끝낼 수 있는
원환의 체계가 있을까봐 무서워진다.
당연하지,
그렇지만 너의 촉과 감각은 허공을 느끼라고 하잖아,
이 멍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