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책도 들여다 보지 않았다. 글귀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이 메말라 어떤 진공상태에 빠져 버렸다. 일상은 그냥 강탈이었다. '모든 삶이 강탈'이려니 하면서, 그 무료함이 곧 내 존재의 무가치를 웅변하도록 버려두었다.


그러다 8월 석회건염에 걸리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수면이 부족해지고 입맛을 잃어갔다. 약을 먹어야 하다보니 서너 숟갈이라도 밥을 꼭 챙겨먹었지만, 점점 위가 아프고 밥만 보면 거부감이 일어 한두 숟갈을 겨우 먹곤 했다. 어찌어찌 치료가 끝나 다행이었지만 9월부터 기관지와 부비동에 염증이 생겨 낫질 않았다. 다시 약을 한 봉지씩 지어다 먹어야 했는데, 밥을 먹지 못하게 되면서 힘든 시간이 왔다. 10월에 들어서자 영양제를 3병이나 정맥으로 흘려보냈지만 좀처럼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목구멍을 가로막는 혼탁한 염증덩어리들이 호흡도 방해하고,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자 이제는 정신이 흔들렸다. 더이상 살 수 없을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발밑으로 무너지듯 무서워졌다가, 이제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단호함이 교차했다. 쓸모없었던 생이 가래와 영양부족으로 무너지는구나 싶어 무척 울적했다. 


코와 목구멍이 건조해서 낫지 않는다는 말에 물을 한모금씩 종일 마시다보니 어지럼증이 더 심해졌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밥을 몇 숟갈 먹으면서 반찬이 거의 없었던데다 몇 달동안 소금을 거의 먹지 않았구나 싶었다. 소변이 투명해지고 어지러움이 심한 것이 아마 나트륨이 적어서라 믿고 보니, 짠 것만 먹으면 나아질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처음으로 생겼다. 억지로 젓갈을 먹고 김치를 먹고, 소금을 그대로 집어먹기도 했다. 소화가 안되고 속이 쓰리더라도 최소 50번 이상 야무지게 씹어 삼켰다.


그리고 걸었다. 처음에는 15분 정도 걷는 것도 무리였다. 저 옛날 연탄가스 마셨던 날처럼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허공에 발을 딛는 것 같아 무섭고 끔찍한 기분이 들곤 했다. 간절하게 걷고 싶지 않았지만, 신체를 통해 이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하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30분, 1시간, 2시간 하다가 어제는 3시간을 넘게 걸었다. 도중에 그만 걷고 싶고, 병원이나 약국에 뛰어들어가 나 좀 도와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억누르고, 동요를 불렀다.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라, 맑고 푸른 하늘... 진심이라곤 먼지만큼도 없는 기분이었지만, 동요를 잇몸 사이로 내보내면서 생기를 끌어모을 수 있기를 빌었다.


이렇게 쓰다보니 중병을 앓은 것처럼 과장을 한 것 같지만, 필요한 만큼 먹지 못하고, 물과 소금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이미 큰일이다. 아직 낫지 않은 채로 약을 끊었더니 힘이 들어 오늘은 1시간도 채 걷지 못하고 들어왔는데, 속이 너무 쓰리고 아픈데다 목구멍 부근에 걸린 끈적한 물질이 숨쉬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자, 다시 무서워지려고 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 있다. 걷기가 안 되면 쓰기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인간 존재를 인식하려 할 때 정신이 우위에 있도록 조종하는 문화에 익숙해져버렸다. 그래서 신체의 위치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과에 몰입하다 보면, 모든 병은 못난 정신에서 온다고 오해할 수도 있게 만든다. 

글을 쓰고 있는 내내 반복불가능성이 떠오른 것은 미련한 투병기에 유일한 변명이다. 아마 데리다가 이 반복불가능성을 말했지 싶은데, 내게 이 개념은 재현이나 지속 같은 인식론적 성찰과 연결되지 않는다. 


더우면 땀을 흘리고 열을 내보낸다. 소금이 과다해지면 소변을 통해 배출시키려고 갈증을 유발시킨다. 평형 상태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신체는, 다시 기능이 회복되도록 무의식적으로 대응한다. 

현재를 보며 과거를 소환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정신은 의지를 주무르고 동기를 부여한다. 끝없이 반복될 것 같던 정신도 신체도 소멸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반복불가능성은 한번 뿐인 인생이라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금도 더 진해지지 않고 열도 더 높아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은 그것으로 끝이다. 소멸이 언제나 온다. 내가 그리워한 일상이 강탈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할지라도, 내가 겪는 실재 관계는 늘 소멸의 과정을 갖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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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선 유세 중인 힐러리 씨가 “May the force be with you.”라고 말하는 영상을 보았다. 또 한동안 대형마트는 광선검에서 구르는 신형 알투(새로운 로봇인데 이름을 모르겠다), 츄바카까지 스타워즈 캐릭터 상품들을 열 맞춰 판매했다. 그리고 나는 스타워즈 재방송을, 1부터 6까지 날새도록 봤다. 마지막 『제다이의 귀환』이 끝났을 때, “왜 다스베이더를 심판하지 않지?”라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우리는, 루크의 심정을 따라 영화를 읽어 가기 때문에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다스베이더의 마지막 숨소리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악의 화신인 황제를 제거하고. 제다이의 선과 정의를 귀환시킨 영웅의 얼굴이 검은 마스크 밑에서 드러났을 때, 다스베이더의 실체(아나킨 스카이워커)를 확인할 수 있어서, 안도했을 수도 있다. 포스가 함께 하길 소망하며, 광속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미래를 그리면서, 주제곡을 흥얼거렸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작은 만족의 순간을 깨는 의문을 던지고 나서 나는 뭔가 겸연쩍었다. 모난 성질이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인가. 두려움과 의문이 과다한 내 뇌에는, 애초에 제다이의 싹이 있을 수 없었던 거로구나. 며칠 후 또다시 재방송을 할 때는, 다른 감상이 나오길 고대하며 재시청에 열을 올렸다. 4-6편을 연결해서 다시보기 한 후 기어코 말하고야 말았다. “요다처럼 900년을 살면 뭐해. 그 긴 시간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권좌를 버리지 못하는 공범일 뿐인데 … 여느 인간들처럼.”


루크 스카이워커가 새로운 희망으로, 제다이의 시대를 다시 열 수 있을까? 제다이의 시대는 제국보다 더 공정할 수 있는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끝 장면에서, 요다, 오비완과 함께 '포스의 영'의 세계에 합류한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봤을 때, 이 영화가 믿길 강요하는 지점을 확인했다. 시스로 인한 악의 축, 검은 주범들을 우주공화국에서 제거하고 나면 이전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 말이다.


잘려진 팔이 기계손으로 대체되고, 탄소냉동이 생명을 정지시켰다가 되살리기도 하는 과학의 시대에도 제다이의 포스는 대체불가능한 힘, 유전으로 정통성을 유지한다. 운명과 '아버지 자리'는 선의 영역에도 악의 영역에도 강력한 마법이 되기 때문에 '정의'의 세계로 복귀도 어렵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아나킨은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으로 악의 길을 선택하고, 아들의 죽음을 마주할 수 없어 선의 길로 복귀한다는 면에서 포스의 에너지는 '아버지' 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낙관이나 예언들은 친숙한 함정이다. 다스베이더와 다스 시디어스가 죽었다고, 학살과 잔인한 전쟁이 그쳤다고, 이전 세계는 오지 않는다. 없었던 일로 망각해도, 관대하게 용서해도 '이전'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후'는 그 모든 것을 변형시킬지언정, 제거되지 않고 낱낱이 재생산되어지기 때문이다. 설령 강력하게 원흉을 처단한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다스베이더의 심판 양태는 시스의 잔혹함이 어떤 모습으로 어느 장소에서 머물게 될 것인지를 예상하는 지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가. 다스베이더를 엄벌하더라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비관하면서 무얼 바라는가. 그것은 내가 루소의 질문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는 왜, 실체와 외관의 부조리를 말하면서, 자유인에 대해 가정법을 사용했을까. 인간은 원래 이렇게 자유로운 주체였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왜 '가정'의 영역이라고 소심하게 덧붙였을까. 나는 몇 개월 동안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베버처럼 객관과 합리라는 '안전'영역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루소가 몹시 비겁해 보이기도 했다. 루소의 책은 제멋대로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는데, 그 내력이 이해되기도 했다. 양의성을 품고 있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을 수 있어. 그래서 자유로운 주체는 가능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이건 가정을 넘어 상상의 영역으로 이전시키고 있는거 아냐? … .


그러다가 스타워즈의 한 장면을 만났다. “내 진짜 눈으로 너를 보구 싶구나”라고 다스베이더가 말한다. 생명 장치였던 다스베이더의 마스크가 가짜라는 말이다. 생명을 연장시켜 준 마스크는 무엇이란 말인가. 실체를 가로막는 '속임수'였을까. 영웅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매개'였을까.


펠퍼틴 의원이 다스 시디어스가 되고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가 되듯이, 악은 실체를 잃은 상태를 말하고 있다. 반대로 요다와 오비완 등의 '제다이'라는 포스는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 단언한다. 단순하게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길 원한다. 우리의 실체를 훼손하는 악을 경멸한다. 외부에서 오는 위험이 내부를 잠식시킨다고 믿고 있다. 선한 실체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만 세계에 발을 담그려고 해도 어둠의 힘이 조여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외치게 된다. “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실체와 외관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못한다. 실체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분노의 힘으로 강해진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도 끝까지 믿어야 한다. “어둠의 힘에 네 자신을 맡겨라. 그 길만이 네 동료를 구하는 길이지.”


루소의 자유인이 가정의 영역에 머물러서 좋은 이유는, 이런 함정의 연쇄고리를 벗어날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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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와 외관이 전혀 다른 것에서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하는 루소의 얼굴은 창백합니다. 사실 창백했던 것은 내 얼굴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이중성과 위선'에 대한 질타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소를 읽다보면 덕의 지배와 자유를 원하는 열망과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 자기 안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예속되는 사회인에 대한 비판의 맥락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간 정도의 사람들도 그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동족이 자신의 운명에 관심을 갖도록, 실질적으로나 표면상으로 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이라 생각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위적이고 냉혹하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없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기에게 그다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들을 속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10)


'욕망이나 정념이 불평등을 만든다'고 비판적 시각을 들이미는 루소는 정작 문제의 본질을 소유권으로 향하게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읽고쓰기를 중단하고 세상의 절망을 부추기는 '인문'을 저주했습니다. 시민 아카데미에 참여하려다 봉변을 당한 뒤, 구역질 나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중화시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개인()에 대한 집중은 전제주의만큼이나 위험한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중성을 보란듯이 시전하고, 위선을 치장하는 세태에 저항하는 길은 사회적 요인과 언어적 요소에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가정해 봅니다.


쓰고도 남을 재산을 움켜쥐고도 더 가지려 애쓰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건전한 시민을 촉구하는 계몽주의자로 루소를 이해하는 흐름과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소유권, 사유재산제도에서 찾고 이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로 루소를 바라보는 흐름 사이에는 독자의 오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단절이 있습니다. 장자크 루소는 1712년 출생입니다. 루소를 이해하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당시 시대 상황을 파악하고, 동시대 지식인들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루소 연구자도 아니고 루소의 정통성을 밝힐 문헌의 계보를 엮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주의가 일궈 온 예속의 정당성을 가뿐히 제껴버리고, 인간의 자연권을 근거로 정치적 승리를 희망했던 루소를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세계를 인식하는 단절이 존재합니다. 고통과 참상을 해석하는 퇴행적 시선들은 극적 갈등 상황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불안과 악덕을 장려합니다. 인민(people, 人民 ; 혹은 시민, 노동자, 비관적으로 국민)이 예속을 벗어나, 주권자의 위치를 회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비관론이 휘몰아칩니다. 루소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이 멸시하는 저 자유라는 유일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쾌락과 안식, 부와 권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자유롭게 태어난 동물이 감금 상태를 몹시 싫어하여 감옥의 쇠창살에 머리를 찧어대는 모습을 볼 때, 또한 벌거벗은 수많은 미개인들이 유럽인의 향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독립을 지켜나가려고 굶주림과 불, 칼과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자유에 대한 논의는 노예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22)


인민이 평화와 안식을 찬양하며 누리고 있는 쾌락과 안식에 대한 루소의 반감은 노예와 쇠사슬이라는 비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노예가 된 인민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자유와 독립이 무엇인지 더 짚어볼 문제입니다. 다음 글에서 첫 번째 회의 문제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루소에 따르자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의 증거입니다. 전제정치가 실행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자연법만이 지배하던 인류에게 사회가 형성되고, 소유 재산이 확대되면서 부자들은 적대자들을 자신들의 방어자로 만들려는 의지를 '법과 소유권'의 탄생으로 현실화 했다고 합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법이라는 공정한 영역이 탄생하면서 중재된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법률이 발달하고 행정 제도가 세밀하게 완성되어 갈수록 강자와 약자의 거리는 더 멀고 깊어지게 할 뿐이었다고 진단합니다. 합법적인 권력이 아닌,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된 세계에는 주인과 노예만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주인 한 사람의 의지가 현실이 되는 가혹한 세계 말입니다.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분열의 씨가 뿌려질 수 있다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상호간에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어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문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국가 République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혼란과 재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된다. 이 순간부터는 풍습이나 미덕이 문제되지 않는다. “정직한 것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전제군주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전제 군주 외의 다른 어떤 지배자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135)


그런데 요상한 것은 이 불평등 최후의 단계, 전제군주제라는 폐허를 바라보는 루소의 또다른 시선입니다. 오직 한 통치자, 지배자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또다른 완성 가능성에 대한 내포라는 것입니다. 본질적 특성을 바꿔 개선하는 변화의 역사를 말하는 루소의 말이 '어둠이 짙을수록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만 깊어진다'는 외침을 덮을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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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유독 말이 적었던 T, 세상 모든 것이 다 의미 없어졌다고, 응시할 곳을 잃어버리고 빈 껍질만 남은 표정을 짓곤 하더니, 나지막이 읊조린 말은, “억울함을 항변할 수단조차 갖지 못했는데” 였다. 그리고는 다음 말이 없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일들의 무게로, 그 의미를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의 일이다.


짜글이 김치찌개, 뼈다귀 해장국, 마늘 스테이크, 제육볶음을 즐겨 먹었던 그가 불시에 '고기'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왜라는 물음이 먼저 튀어 나왔지만, 묻지 못했다. 슬며시 잊혀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가족 관계로부터 오는 피할 수 없었던 고통과 상처, 상실이, '고기'를 향해, 특별히 공장식 축산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이어졌을까. 그리고 일시에 그 중단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 다시 물었다. “가끔 생각나지 않아?” 잠시 찡그리더니, “아니.” 한다. 말은 줄고, 의미는 제거되고, 세계는 열린다.


그의 육식 거부는 말하자면 '양심적' 행위이다. 여기서 양심은 소극적 저항이고, 자신을 세계와 연결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먹고 입는 것과 관련된 일상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가.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을지 삼각김밥으로 때울지 구내식당에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두고, 내 맘대로 입고 먹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조금 더 나가면, 내가 노력해서 번 돈으로, 내 음식을 사고, 내 신체를 가꾸며, 내 외모라는 소유자본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세계 질서에 순응하며 그 질서를 안착시킨다. 그러면 이게 어디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생활은 내맘대로의 다른 말인가>

잊혀질 권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정보 침해와 마녀 사냥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부끄러운 과거 흔적들은 말끔히 사라져야 하고, 원하는 기억과 정보는 영원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사생활 자기결정권이 혼합되어 있다우려와 달리, 정보만료일의 법제화 추진이나 권리침해 신고는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나, 자기검열에 의한 개인의 자유가 위축되는 것 같지는 않다. 더불어 집단 정체성을 온라인에서 찾아 편입하려는 외로운 노력들도 늘고 있다. 온오프의 기묘한 동거는 사생활의 위기로도 이어진다. 함부로 취급되고 거래되는 사생활 정보(인권)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은 넘치는데, 뭔가 부정의 방향성이 혼란스럽다.

 

 취업 면접에서 지망생의 SNS를 점검하고, 어느 기업에서는 '온라인 평판관리'라는 상품도 시판 중이라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잊혀질 권리와 관계된 여러 측면이 현실 사회의 지배적 질서와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부작용이 대면관계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흐르지는 못하고 있다


이쯤되면 사생활이 무언가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라고 뭘 잘 알겠는가. 사생활을 정립하고, 그 과정에서 세계를 발견하고, 타자를 인정하는 마력을 펼쳐 보이는 능력이 나에게 있겠는가. 그저 사생활이라고 역설하며, 개인을 더 철저하게 현실 논리에 가두는 몇 가지 규칙들을 조잘거릴 수 있을 뿐이다.


하나, 사생활은 사회적 결속이나 기원을 따지는 진술과 다른 말이다. , 오직 자신의 기술(記述)만으로 드러날 수 있다(내가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 외연으로만 진술될 수 있다). , 사생활은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규칙들이 내재된 속에서만 존재하므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다(과학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설명하는 리오타르의 정리에서 빗대었다).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내면 세계, 친밀성이 발휘되는 영역, 소유권을 즐기는 공간, 그 모든 인공(사생활)에 깃든 비밀 권력을 발견하려면, 우연으로 말하는 본능에 더 귀를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육식 거부에 대한 사생활 일람표>

내 경우에는 육식 거부 정착 역사가 좀 길다. 10여 년 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결심했다가, 다시 먹고, 더 크게 다짐했다가, 일부를 허용하고, 자책하기를 반복했는데, 집착이 가장 끊어내기 어려운 과제였었다. 간단하게 정리해도 이렇다.

육식 거부에 대한 사생활 일람표

작동

회로


머릿속 양상

실제 반응

처음

오감을 이용해 상상하며, 왜 그래야 하는지, 정당성 계속 환기시킴. 주로 시각적 상상에 의존해 '고기'의 아픈 과거사를 상기함.

-일상에서 자꾸 잊게 되고 자신에게 실망함.

-타인과의 식사에서 별스런 취급을 받음으로 무안함.

-결국 자연스럽게 한끼를 먹은 후, 포기상태에 이름

-사회문화를 비판함.

인식-논리

중간

여러 차례의 초기 상태 반복하다가, 어느날부터 '고기'의 피냄새와 비린내, 물컹한 질감이 견딜 수 없어짐.

-인간도 생명이니 하는 논리로 타협점을 찾기 시작.

-건강한 축산에 관심 많았으나, 구매로 연결 안됨.

(뒷다리살이나 저렴한 부위, 마감 세일로)

-먹는 양과 횟수를 줄이는 것으로 절충함.

-돈까스, 햄버거처럼 '고기'모양을 감춘 음식만 섭취.

-정치경제를 비판함.

감각-사물

무렵

식생활 현실과 만족의 법칙 발견함. 상상이나 오감의 영역을 교차하다 패턴이 생김. 육식거부 기간이 점차 길어짐. 간혹 먹게 되더라도 실망이나 비판 사라짐.

-외식의 경우, '고기'없는 메뉴를 찾지 못해 고생.

-탄수화물 위주 식사를 하게 되면서 체중 급격 증가.

-허기가 빨리 옴. 대처요령과 처방 연구함.

-노동과 생명의 자연스러운 연결점 고민함.

반복-법칙

현재

무엇도 필요치 않음.

그냥 먹지 않게 됨.

-숯불구이 냄새에도 반응 없음.

-타인의 시선에도 관심 없음.

-해물에도 확대적용해야 하는가를 가끔 생각함.

-라면 스프에 들어가는 '고기'를 의식함.

-식생활이 단순해짐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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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7-04-24 0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원님과 T님도 육식을 안하시는군요 (좋네요) 저는 한동안 안하다가 요즘 한 두번씩 KFC 을 먹고 후회하고 그랬거든요. 보충제 따로 섭취 안하고 고기를 끊으니 몸이 힘들더라고요. 저는 다시 고기 안먹는 생활로 돌아가자 다짐 중입니다 ㅎㅎ 슈퍼에 놓인 벌건 살들을 보면 끔찍한데 , 남의 손으로 요리 되서 나오면 별 생각이 없어지니 (어려워요)
 

몇 가지 자명한 것이 있다. 나머지는 그 지점으로 가려는 무한한 시도와 후회다. 요즘 내 심정을 표현할 말을 찾다 보니 결국 두 문장이 되었다. 주절주절 수십 장의 생각들이 순차적으로 쌓였다가, 삭제되고 숨겨지고 밀려나길 반복했다. 이 운동은 존재를 지키려는 무의식이고, 삶에 가해질 위협을 미리 인정하고 보자는 불안정한 의지다. 내게서 나간 숱한 말과 행위들이 파편이 되어 떠돌고 있는데, 그것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이어 붙이고 형태를 만들어 본다. 무엇이 보이는가.


어느 순간 궤도를 이탈했다. 부딪치고 부서져서 엉망이 되더라도, 어느 곳에선가 서 있었는데, 작은 돌멩이 위에서, 꽁지발을 하고서라도 디디고 올라서 있었는데,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생기가 사라지고 있다. 이탈한 자는 문득, '이탈'이라는, 순간의 희열만을 기억할 뿐이다. 합류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은 있는가. 오물에 푹 담겨진 발이 퉁퉁부어올라쳐도 디딤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물이 나인지, 돌인지, 구분하지 쉽지 않다.


평등, 초월성, 이성, 부정성이 모두 궤도 안에 있는 것인 줄, 이제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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