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와
외관이 전혀 다른 것에서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하는 루소의 얼굴은 창백합니다.
사실
창백했던 것은 내 얼굴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이중성과
위선'에
대한 질타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소를
읽다보면 덕의 지배와 자유를 원하는 열망과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
자기
안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예속되는 사회인에 대한 비판의
맥락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간 정도의
사람들도 그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동족이 자신의 운명에 관심을 갖도록,
실질적으로나
표면상으로 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이라 생각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위적이고 냉혹하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없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기에게 그다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들을 속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10쪽)
'욕망이나
정념이 불평등을 만든다'고
비판적 시각을 들이미는 루소는 정작 문제의 본질을
소유권으로 향하게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읽고쓰기를 중단하고 세상의 절망을 부추기는
'인문'을
저주했습니다.
시민
아카데미에 참여하려다 봉변을 당한 뒤,
구역질
나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중화시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개인(들)에
대한 집중은 전제주의만큼이나 위험한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중성을
보란듯이 시전하고,
위선을
치장하는 세태에 저항하는 길은 사회적 요인과 언어적
요소에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가정해 봅니다.
쓰고도
남을 재산을 움켜쥐고도 더 가지려 애쓰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건전한
시민을 촉구하는 계몽주의자로 루소를 이해하는 흐름과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소유권,
사유재산제도에서
찾고 이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로 루소를 바라보는 흐름
사이에는 독자의 오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단절이 있습니다.
장자크
루소는 1712년
출생입니다.
루소를
이해하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당시
시대 상황을 파악하고,
동시대
지식인들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루소 연구자도 아니고 루소의 정통성을 밝힐
문헌의 계보를 엮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주의가
일궈 온 예속의 정당성을 가뿐히 제껴버리고,
인간의
자연권을 근거로 정치적 승리를 희망했던 루소를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세계를 인식하는 단절이 존재합니다.
고통과
참상을 해석하는 퇴행적 시선들은 극적 갈등 상황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불안과 악덕을 장려합니다.
인민(people,
人民
;
혹은
시민,
노동자,
비관적으로
국민)이
예속을 벗어나,
주권자의
위치를 회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비관론이
휘몰아칩니다.
루소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이 멸시하는 저 자유라는 유일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쾌락과 안식,
부와
권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자유롭게 태어난 동물이 감금 상태를 몹시 싫어하여
감옥의 쇠창살에 머리를 찧어대는 모습을 볼 때,
또한
벌거벗은 수많은 미개인들이 유럽인의 향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독립을 지켜나가려고 굶주림과 불,
칼과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자유에
대한 논의는 노예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22쪽)
인민이
평화와 안식을 찬양하며 누리고 있는 쾌락과 안식에
대한 루소의 반감은 노예와 쇠사슬이라는 비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노예가
된 인민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자유와
독립이 무엇인지 더 짚어볼 문제입니다.
다음
글에서 첫 번째 회의 문제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루소에
따르자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의
증거입니다.
전제정치가
실행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자연법만이
지배하던 인류에게 사회가 형성되고,
소유
재산이 확대되면서 부자들은 적대자들을 자신들의
방어자로 만들려는 의지를 '법과
소유권'의
탄생으로 현실화 했다고 합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법이라는 공정한 영역이
탄생하면서 중재된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법률이 발달하고 행정 제도가 세밀하게 완성되어 갈수록
강자와 약자의 거리는 더 멀고 깊어지게 할 뿐이었다고
진단합니다.
합법적인
권력이 아닌,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된 세계에는 주인과 노예만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주인
한 사람의 의지가 현실이 되는 가혹한 세계 말입니다.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분열의 씨가 뿌려질
수 있다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상호간에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어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문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국가 République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혼란과 재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된다.
이
순간부터는 풍습이나 미덕이 문제되지 않는다.
“정직한
것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전제군주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전제 군주 외의 다른
어떤 지배자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135쪽)
그런데 요상한 것은 이 불평등 최후의 단계,
전제군주제라는
폐허를 바라보는 루소의 또다른 시선입니다.
오직
한 통치자,
지배자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또다른
완성 가능성에 대한 내포라는 것입니다.
본질적
특성을 바꿔 개선하는 변화의 역사를 말하는 루소의
말이 '어둠이
짙을수록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만
깊어진다'는
외침을 덮을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