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티는 표상주의자와 어떻게 대화하겠다는 것이었을까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보잘것 없어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지루할 수도 있고 때로 거북스러울 수도 있으며, 그 자체의 불완정성으로 인해 부족하거나 억울할 수도 있다. 현실을 ‘드러내는’ 일이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주 말하게 되지만 우연의 능력이 그 숨겨진 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연성을 말하다 보면 몇몇 사람이 떠오르는데, 리처드 로티가 그렇다. 로티는 우연성을 표상주의를 격파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 인상을 받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로티가 말하는 우연성은 보편성보다 더 강력한 규준이 되는 듯하다.


로티가 누구인가. 듀이를 대놓고 싫어하고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남몰래 의심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로티를 비롯한 프래그머티스트들은 본질-현상, 객관-주관을 탐구하거나 타자라든지 헤게모니를 연구해봐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고, 세상이 자유로워지거나 불평등이 해소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감소시키고, 평등을 증가시키도록 하는 실천적인 유용성에 집중한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본질이나 세계를 담을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완성하려 했다면 로티는 적용과 대응관계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고 말하며, 철학적 원리나 위대한 사상을 중심으로 사회를 개조해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로티의 이런 노력이 닿는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다. 고착되고 습관화된 어휘나 서술을 거부하고 자아창조에 열정을 가졌으나, 사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사회적 정의나 연대의 고리를 만들지 않는 사람, 자유롭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인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새로운 대안은, 이미 가지고 있는 규준을 들이대며 논해봤자 갈등만 심해진다는 것이다.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 종결되지 않는 대화와 타협 과정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예외도 없고 입증도 필요없는 만고의 진리만 찾다가 지치지 말고 개인의 자아창조와 일상의 변혁을 시도하는데 집중하자는 것이다. 절대정신,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으니 역사도 당연히 우연한 산물일 뿐이다, 로티에게는.


언뜻 혹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자유를 돌보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본다.” 상식이 굴레가 되지도 않고, 이론이 족쇄가 되지도 않고, 다른 인간에게 굴욕을 당할 필요도 없는 사회, 오직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참여하는 자유로운 사회, 얼마나 평화로운가. 맥락화를 본질이나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몰아(沒我)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말이다.

로티가 결국 호출하는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마지막 어휘를 만드는, 만들어진 어휘를 스스로 갱신할 수 있는, 재서술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인간, 낡은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 놀이를 할 줄 아는, 책과 건축물, 그림, 노래, 문학작품을 만드는 만화가, 저널리스트, 작가를 호출하며 문화정치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로티의 우연성이 무기가 되기엔 애초에 글렀다.


2. 우리를 고통 속에 붙잡아두는 것은 무엇인가


집단지성을 말하고 변화의 등燈을 높이 들던 때가 언제입니까.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이 대중은 피로감을 느끼고 흩어집니다. 또 누군가는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해 공격성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부모 세대는 등골이 휘던 청춘이 억울하고, 자녀 세대는 불안정한 위치로 방황합니다. 세계는 별반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먹고, 일하고, 씻고 자는 것은 그대로이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가치를 일궈내거나 희망을 떠들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 스멀거리며 의문이 피어납니다. 이래도 될까. 학대와 방임으로 손상된 시간들, 끊이지 않고 증가하는 잔인한 사건들, 목숨을 걸고 지켜도 지켜지지 않는 소중한 생명들…. 공습으로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휴전을 기뻐하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이 그토록 갈구하는 독립국가와 개방된 경제가 있는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요.


세계는 확연히 갈라졌습니다. 아군아니면 적군입니다. 신분상의 차별 못지 않은 경제와 문화의 차별은 인류 문명 멸망의 충동을 부채질 합니다. 도서관의 분류코드가 무색하게, 더 세밀하게 분자화된 개인의 세계에 인공적인 네트워크는 독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적대자를 설득하는 것은 진작 포기하고, 서로를 벌레와 쓰레기로 칭하기 바쁩니다. 로티 방식으로 충고하자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행 규준을 내려놓고, 문제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서구 지성인의 생활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정의며, 누가 정의를 누가 말하느냐로 구분하고 싸우는 것이 불평등을 해결해주지 못하니 말입니다. 일부는 맞는 것 같고 또 전부는 그른 것 같습니다. 대화할 수 있는 동료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정치적 대화는 그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얼마 전, 미국인 기자를 참수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큰 비난을 샀습니다. 동영상은 신문 기사에서도, 유투브에서도, 개인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유포자의 의도가 통한 것일까요. 설마 하는 생각에 접속했습니다. 재생 버튼 위에 마우스 포인터를 갖다 대고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현실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슷한 시기 가자 지구 어린이들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500여 명 사망했으나, 세계인들은 그 상황을 용인한(유도한) 가해자에게 폭격을 멈추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도 끊임없이 잔인한 사건들이 자행되지만 침묵 속에 놓입니다. 비단 사회적인, 정치적인 권력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이미 개인 간의 관계는 정치사회적 구조를 완벽하게 답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잔인합니까. 왜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했을까요.


3. 웃음기 가신 얼굴들


제대로 걷기가 힘든 인파 가운데 서 있습니다. 팔꿈치도 치이고 옆구리도 찔리면서, 더 밀리지 않으려고 그 자리를 고수해봅니다. 몇 걸음을 떼어 봤지만, 이내 가다서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밤이 깊을수록 인파의 이동속도는 동동거리며 달립니다. 마지막 시외버스 시간이라도 되는 냥, 급하게 해내야 할 과제를 독촉받은 양, 매끈하지 못한 걸음걸이로 서너 개의 입구를 통과해 모이고, 12개의 출구로 흩어집니다. 어디로들 갈까요. 자정이 다가오는데 어디로들 가시나요?


지하상가 불이 꺼지기 시작하고 모두가 빠져나간 대합실은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몇 시간 후, 날이 밝고 해가 뜨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다시 누군가 몰려올 것이고, 또 빠져나갈 것입니다. 이곳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러라고 만든 곳이니까…중얼거리다가 얼척진 생각을 합니다. 그냥 이곳에 침낭을 펴고 잘 수 있을까. 종일 지친 몸뚱아리는 외려, 멀리, 저멀리 누추한 집을 찾아가는 것보다 그걸 원할텐데. 이름표를 ‘침실’이라 붙이고 저 반듯하고 깨끗해 보이는 대리석 바닥 한자락에 폭신한 이불을 깔면—누구라도 피로를 풀 수 있다면. 다같이 그러면 이상할 것도 없는데—집 구하느라 입술 바트지 않을텐데. 집세에 공과금에 애타지 않을텐데. 모이고 흩어지는 대합실을 여기저기 만들게 아니라, 누구든 지나다 잠잘 수 있는, 아무나 말끔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공동’의 침실을 만든다면, 웃음기 가득한 아침이 올 수도 있을텐데….


허망하고 미련한 생각입니다. 이상이란 그렇게 허투루 흐르기 쉽습니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본능이 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직장에서 2시간을 달려야 한다고 해도, 몇 번의 환승을 거듭하며 비탈길이라도 올라야 한다고 해도, 돌아올 공간이 절실합니다. 도착한 집이 뒤척일 공간도 없는 작은 방일지라도, 축축한 냉기가 흐르는 동굴일지라도, 바라고 원하며 안도합니다. 싸우고 억눌리고 곤두서있던 정신과 마음을 내려놓을 장소가 절실한 우리시대에 공동 침실은 재앙이 되기 쉬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우둔한 생각은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현실회피의 증상? 육체의 신호일 수도 있겠지요. 그도 아니면 우연인가요. 전자라면 깨어남을 필요로 할테고, 후자라면 거듭남이 호출될 겁니다. 마지막 경우라면 정지하고 멈추는 반복을 계속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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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원에는 가설이 없다


구원을 위한 역사적 임무는 완수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구원되지 못했다. 메시아는 이천 년전에 다녀갔으며, 노예는 수백 년 전부터 해방되기 시작했고, 인권을 위한 세계적인 기구도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애초에 구원은 없었거나 찰나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부질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정할 수 없는 구원의 흔적들을 여미며, 부스러기들을 끌어모은다. 구원은 형태도 없이 소리도 없이 고통 뒤에 널부러져 있다.


구원이 무엇인가. 고통의 중단, 죄의 사함, 새로 태어남. 누군가는 고통이 제거되어 즐겁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과거를 용서받고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구원의 기제는 정확히 어떤가, 그런 일들은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가. 구원은 절차가 없다. 가설도 전제도 없이 일시에 초월적 능력자에 의해 일어날 뿐이다.


<2>비평은 악몽이 되고 만다


타자라는 말에는 이질성이 강조되는 지점이 있다. 반면 객체라는 말에는 분리된 상태, 물질성을 띤 영역이 있다. 이질성이란 동질성을 파악한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타자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 분모가 존재하게 된다. 에둘러 말하면 내 의식에는 타자가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영역의 누구를 부르고 무엇에 의존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한 내가 아니다. 그러니 주체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처럼 뒤죽박죽이 된다. 자립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익숙한 관계와 상황에서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반대의 경우에서라도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조금의 여지야 늘 생기곤 하겠지만 ‘나’란 그런 존재이다. ‘나’ 이외의 ‘대상’을 바라볼 때 ‘나’의 위치는 언제나 우월하며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와 존재 근거는 늘 세계에 있다. ‘나’는 불완전한 ‘나’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야 그나마 형태를 드러내곤 하지만 결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참된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 어긋나는 상황에, 불안한 관계가 가중되면, 깨져버리는 진심들은 ‘주체’에 더욱 집중하라며 독촉한다. 이기심이 수치심을 덮어버리는 순간은 쉬이 일어난다. 망각 능력은 그 사실을 은폐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다. 남아 있는 것은 진심과 깨져버릴 때의 고통이다. 더욱 더 완벽해진 알리바이는 ‘억울함’만을 주장하게 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아득히 먼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문제는 자신을 항시 들여다보게 하는 이런 장치와 비평들이 사회를 향하게 될 때 일어난다. 결코 타인에게 들이대지 말아야 할 잣대를 휘두르고 내치는 인물 비평은 독이고 악몽이다. 그 형식이 논문이건 칼럼이건 잡담이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일이다. 비평은 고통의 완화와 나-타자 관계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알리바이를 깨고 반복을 중화시켜 나갈 작은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나는 실패한 자이다.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회성을 가졌으며, 체제 바깥을 당당하게 거닐 대안도 갖지 못했다. 소박한 노동으로 일상을 깨우기에는 게으를 뿐만 아니라, 지적 충만감()에 중독()되어 흔들리지 않고 일궈나갈 힘조차 없다. 사회적으로 내 인상()을 투영해보면 루저에 속물 경쟁에서 도태된 잉여이다. 속물이 되려다 동물이 되며 사물이 되고 괴물이 되어간다.


무엇으로 불리건 나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어찌 다 알겠는가? 속물에서 괴물까지, 모두 내 안에 있겠지만 계속 머무르지도 않으며 그것만이 전부도 아니다. 타자를 부르는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타자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는 결국 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자립하며 산다는 확신에서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3>혁명은 불안했던 과거의 반향이다


우리 시대의 숙제는 속물과 동물, 잉여들을 인간화시키는 것인가 보다. 너도나도 달려들어 나같은 사람들을 새롭게 개화시키려 한다. 그것을 혁명이라 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나를 지우고 무언가를 영접해야 하는가, 아니면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미 형성된 자아상()을 개조해야 하는가, 혹은 배제되고 소외된 자리에서 더 무기력한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가.


구원은 확신에서 비롯되지만 오직 찬란한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다. 남겨진 자와 배제된 자에 대한 자리가 부족하다. 비평은 엉켜진 시간을 해명해야 하며, 종결된 위치를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연을 떠나 문화 세계로 진입하던 인간이 바쳐야 했던 공물, 수치심이 개체화의 본질이었다.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자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세계는 경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나 비평을 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 사회적 ‘나’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인간화()의 시작이란다. 이제 속물과 잉여, 동물과 식물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정지시켜야 한다. 정지한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불안과 좌절, 고통과 기쁨, 행복 마저도 정지시킨다는 것이다. 정지는 과거를 돋아내는 것이다. 더이상 그것들을 붙들어 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혁명과 비평에 공통점이 있다면 정지한다는 것이다. 흐르던 물길이 멈추지 않고 역행할 수 없듯이, 내 자신이 바뀐다는 것은 (그렇게) 일순간 정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이를 악물어야 정지할 수 있을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기득권의 전부였던 자격증도 반납했고, 가진 것도 변변치 않다. 택배상자 몇 개도 채우지 못할 만큼 ‘별 것도’ 없다. 그러나 내 의식은 여전히 몇십 년 간의 연장선에 있고, 하루는 견고한 체제와 몇 사람의 호의에 의존한 채 흘러간다.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자, 노동에서도 관계에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의 아침은 또다른 죄책감을 뒤바른 채 밀려온다. 어떤 연명은 그렇게 사회로부터 불한당 취급을 받는다. 매 끼니를 당당히 챙겨 먹을 자격을 상실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이 말들은 오로지 내 감상에 불과하지만, 방향을 갖고 있다. 감성에 가려진 본성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우연으로 덧씌워진 나와 너의 비밀을 공공연히 하는 것, 그리고 존재가 존재근거인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논리의 일관성이 늘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출처를 밝히는 정밀함도 모른다. 학계()나 사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다. 공부한 적이 있더라도 그 궤를 이을 능력이 없다. 그저 옮겨적는 글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거나 들여쓰기를 할 뿐이다. 그것도 불충분하겠지만 능력’껏’이 그정도다.

가끔 메모해 놓은 공책을 죄다 파쇄해 버리곤 하는데, 찢다 보면 잘려나간 종이조각에서 아까운 글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잠깐 갈등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 갈등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발길이 닿지 않는 도서관의 오래된 새 책들 속에서나, 너덜거리고 헤진 신간 헌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할까. 오래된 새책이 의미하는 것과 헤진 신간이 말하는 것은 양면일 뿐이며, 같은 줄기의 다른 잎사귀다.


왜 나는 이런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늘 존재에게 존재근거를 대주는 꼴이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정지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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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70년대는 사라진 망령이며, 짚어야 할 역사적 기록일 뿐이었기에, 단 한번도 반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너무나도 뻔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배부른’ 나라 만들기는 독재를 위한 허울좋은 명분으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기고 허기졌으며, 또 많은 사람들은 울분 속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그 고난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경제적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았다. 국가경제의 규모가 더 커질수록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차이는 더 심각해졌을 뿐이다. 적어도 배고파 쓰러지는 사람은 없으니…하면서 애써 위안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누구를 밟고 일어서야 했는가. 너무 잊고 사는 것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표면적인 민주 사회의 행진이, 파업과 시위가 사라진 거리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착각이 지배할수록 경제적 부정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의를 막는 것이 파국적 상황인지, 평화로운 침묵인지 따져 물어야 할 때다. 사회 정의를 경제논리로, 국가폭력으로 눌렀던 과거는 경제적 부정의를 정치적 파국으로 덮으려 하는 현실을 만들고야 말았다.


애덤 스미스는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 고 했지만, 지금 경제현실은 부자 한 명을 위해 필요한 가난한 사람 수가 얼마일까 짐작조차 어렵게 만든다. 경제적 재분배, 생존권의 문제를 전방위의, 최우선의 문제로 배치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배부른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어서인가. 끊임없이 먹고도, 채 먹지 못한 식량을 주렁주렁 채워 담아도, 여전히 허기진 사람들이 갇힌 성城벽은 무엇으로 허물 수 있을까. 필시 그것은 삶에서 ‘부채의 문제’를 엄중히 대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삶을 얻었는가? 왜 나는 배고프고, 불안한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묻는다.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그리고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는 10퍼센트는 늘 배고프다.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 프리카리아트에게 경제 불황의 충격은 삶을 해체할 수준에 이르지만, 0.1%의 최상위 부유층은 (여전히) 매일 수십 억원을 벌어들이며 부를 증식해간다. 그들의 호황이 트리클 다운으로 이어졌는가? (trickle down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경제 이론) 국가의 평균 임금 수치가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를 상회할 때 최저 임금은 얼마이며, 그 숫자는 어떤가. 이미 ‘평균치’는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니다. 다분히 공격적인 바우만의 질문을 다시 상기하며, 가난에 덧붙여진 편견과 위선을 바로잡아야 한다.


더구나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1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권리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세계 인구 30억 명이 하루 2달러로 정해져 있는 빈곤선 아레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지위, 능력, 자격, 보수 등이 차이나는 것은 당연하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와 사회의 안녕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기여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거짓된 믿음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은 어느 부분에 먼저 칼을 대겠는가?

충분히 오래 지속된 불평등은 감지하기 어렵다. 평등을 정의하거나 실행하는 문제는 경험치가 미약한 인류에게 어려운 일이다. 삶을 파괴시키는 가혹한 조건들, 추악한 세력들로 가시화되는 불평등의 문제를 역추적하며 그 날을 꿈꿀 수 있을 뿐이다. 바우만은 부자연스러움에 익숙해진 개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현실적’이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여러 세계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규정할 세계에 살면서도 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존재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바우만의 질문에 다분히 섞여 있는 ‘불평등을 기꺼이 감수하는 대중’이라는 전제는 여전히 까칠한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바우만의 질문을, 의문을 강박적으로 묻고 되물어야 한다. 자신에게, 사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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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인간 - 인간 억압 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1. 지난 몇 년간 집안 폐인으로 떠돌면서 자주 이렇게 주절거렸습니다. 벽을 보고 읊는 거지요. 지적 신뢰에 기반한 공동체는 불안 그 자체입니다. 불안은 그 자체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겠지만, 지적인 불안은 파국일 뿐입니다. 지적-신뢰 공동체는 정보와 경험의 격차로 인해 늘 비대칭적인 채무관계를 발생시키고, 채무 불이행은 권력을 강화시키게 되곤 합니다. 그래서 늘 묻지요. 공동체가 채무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채권채무, 의무와 죄의 청산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다면? 사회 불평등을 완화/해체할 수 있으려면 어떤 삶의 증거들이 필요할까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신성한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장 크고 황당한 채권채무관계를 자연스럽게 주입시키는 억울한 주장아닙니까. 신생아는 사랑과 순수를 상징하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아주 작은 위해爲害도 가할 수 없는 ‘보호대상’이지요. 부모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그 자체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한 것이지요. 그런 아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은, 위대한 신의 이름이 아니면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아기는 무능력하지만 또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절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 타인에 의해서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존재지만, 그것을 죄라 말하지 않습니다. ? 어째서요? 아기는 무궁한 가능성이며, 미래이며, 완전한 세계일 수 있습니다. 근대의 인간들은 이렇게 아기라는 생명체를 불확실한 세계에 확실한 존재라고 믿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경이감이 옳은 감각이었는지는 근대 이후의 아동-개인의 탄생을 통해 낱낱이 증명되는군요.


무능력한 상태에서 자립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온갖 지적-신뢰 공동체 프로세스가 작동합니다. 이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원죄와도 같은 채무관계가 끝없이 생성되고 희석되고 강화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제 태어난 아기가 진 빚은 얼마인가요. 어떻게, 무엇으로, 누구에게 갚을 수 있을까요, 10년 후에, 30년 후에는 완전히 가능한가요. 빚에서 해방될 수 있나요. 빚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부채인간의 운명은 주체라는 멍든 영혼을 만들기에 충분하군요.


2. 화폐의 기원은 상품 교환과 무관하다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가족, 사회, 종교, 정치) 세계는 인간 간의 위계를 만들면서 확장합니다. 불균형을 만들며, 무수한 채권 채무 관계를 만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의무를 짊어진 인간에게 채무 관계의 청산은 공동체에 대한 응답의 증표가 되는 셈이지요. 화폐 경제의 시작점을 이렇게 정치적, 종교적 의무의 계산과 청산을 위한 수단에서 보는 시각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습니다.

 

결국 하나의 공동체 혹은 사회의 주요 임무는 무엇보다도 우선 약속할 수 있는 사람, 채권자-채무자 관계에서 자신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 즉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에게 부채에 관한 기억을 구성시키고, 망각에 反하는 의식과 내면성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 주체성 및 의식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부채의 의무 영역 속에서이다.


슘페터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채권 채무인 신용화폐를 창조하고 소멸시킬 권력을 은행이 가지면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실물 경제와는 별도로 채권 채무 관계를 생성, 팽창, 수축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탄력성을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최근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국가를 넘어 천문학적 규모로 불어난 채무를 일시에 파괴해줄 우주적 힘이 생기지 않는 이상 대책이 묘연해 보인다는 말이겠지요.   


대안적 경제학의 오랜 전통이 이야기하는 대로,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철학적 인류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 제기하듯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이 상품 교환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부채의 계산과 청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지구적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소위 디레버리징의 과정을 기계적이고 몰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화폐’라는 신용창출의 기원을 비대칭적인 인간 관계들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는데 동의한다고 해도, 상대적인 관계에서 주체를 설명해 내기에는, 턱도 없이 힘이 달리는데, 오히려 근대는 이 과정을 수월한 것인양 치장해왔습니다. 조상과 후손, 신부와 신도, 남자와 여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이런 연결보다 더 애처로운 꼴이 주체와 객체, -, 개인과 세계의 관계입니다.

 

3. 오랜 시간 죄와 죄책감, 불평등에 집착해 왔습니다. 이미 너덜해진 주제의식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준 책이 『부채인간』입니다. 묘한 긴장 속에서 읽었고, 또 재빨리 지워지길 바랐지만 어림없더군요. 여러분도 직접 읽어보길 권합니다.


이제 자연과 상품의 이동은 권력관계의 파생에 좌우됩니다. 특정 자본가가 늘 이기지도 않으며,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가 주된 관계도 아닙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구도로 불황기의 손실은 사회화되고, 호황기의 이윤은 사유화된다고 합니다. 공공영역을 대표하는 주체의 형상이 부채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부채는 현대경제의 주체적 동력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주체 패러다임은 억압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약과 신뢰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 단 한 푼도 상환하지 말라고 주문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권력장치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부채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공제’ 기계 혹은 ‘포식’ 기계, 포획 기계이자, 거시 경제의 규정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구인 동시에, 하나의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 부채는 또한 집단적 개인적 주체성의 ‘통치’ 및 생산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부채 경제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다. (상호부조, 연대, 협력, 만인을 위한 권리 등과 같은) 집단행동의 무력화, ‘임금노동자’ 및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조직, 행동 및 투쟁 기억의 무력화를 보라. 대출(금융)을 지렛대 삼아 이룬 경제 성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보조, 은퇴 연금, 직업 교육 등을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집단적 권리로서 바라보는 주체들과 마주하는 것은 ‘채무자’ 소규모 자산가, 소액주주를 통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


라자라토가 제기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불안 속에 잠재해 있던 저항-무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공명이 있습니다. 이제 할 일은 더 철저하게 부채와 죄책감의 기원을 확인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배격할 주체-객체를 바로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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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이 해를 누르는 일을 불가능이라 하지 않고 희망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묻는다, 누르는 일은 결국 지우는 일이 되느냐고 말이다. 서둘러 답이 돌아온다. 함께 '누리기' 위해서는 눌러야만 한단다. 어설픈 질문자는 애맑은 소리로 되묻기에 바쁘다. 그럼 달이 해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즈음 신경증이 발현되는 사람들은 외치듯 말하고 등을 돌린다. 모두가 동등해진다는 겁니다. 뒷모습만 보이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질문자는 하다만 말을 삼키며 중얼거린다. 그건 해도 달도 원하지 않을걸요. 


2. 8월이 시작되며 나타났던 어지러움과 끝도 없는 방황을 정리하기에 10월은 알맞다. 다시 해가 뜨고 추위가 몰려오는 것이 지각된다. 눈을 들어 거울을 보고 팔을 들어 책을 연다. 망각, 위선, 거짓말이 흐른다. 그것들이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기 적당하다.

거대 언론은 개인에게 닥친 불행의 배후를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서는 시스템을 방기하는 이익 집단의 추악함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다. 한 사람의 '살아감'에 망각은 일정한 가치를 지니겠지만 사회에게 망각은 독이 될 뿐이다.


3. 부채인간의 리뷰를 쓰다가 멈췄다, 두 번째다. 좋은 책인데 말이다. 많은 의문을 허용하고, 수행적 발화의 연속작용을 일으키는데...좋은 책은 완결되지 않는다. 질문지를 만들어내다 리뷰를 끝맺지 못한 것은 허약하고 병든 심신의 영향이었다. 부채 의식과 죄책감을 따져 물어야 하는데...그 끝이 두렵다. 죄책감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벌판을 헤매는 것과 같다. 행여 누구라도 마주칠까 두렵고, 행여 아무도 없을까 두려운 것, 그것.


4. 정상상태란, 한 끼의 성스러움을 알아가는 것, 한 숨을 쉴 때 곧 뱉어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쪼그라드는 신체를 보드랍게 만져 주는 것, 가진 것을 점점 줄여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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