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유토피아 - 좋은 사회를 향한 진지한 대화
에릭 올린 라이트 지음, 권화현 옮김 / 들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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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위해 정의를 팔았습니까? /그걸 어찌 알겠어요. 밥은 보이지만 정의는 보이지 않는데요./ 당신이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는 사이 이 사회는 더 병들고, 사람들은 죽어갑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런가요, 방금 먹은 밥과 김치 몇 조각, 된장국이 훔쳐 먹은 것이었다는 거군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입니다! 계몽이 다시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누가 사회정의를 바랍니까, 누가 사회변화를 이끌어 갑니까?/ 병든 세상을 낫게 한다는 거군요./ 못 믿겠지만 낫기도 합니다. 역사가 그걸 증명하잖습니까!/ 글쎄요, 두 번째 기회를 찾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은 아는데요./ 이래서 계몽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노예 근성을 버리세요. 저주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희망입니다! / 희생이라구요? 해가 기우는군요. 저녁밥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아직 모르는지라. 그건 제겐 너무 먼 이야기라오./ 당신은 채찍이 골수를 뚫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말과 똑같아 보입니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할 것 같군요./ 종국에는 … 도착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랄 뿐이라오.


수천년 역사에 이름만으로도 혀를 찰 독재자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면서도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비겁한 자들이었습니까. 권력에 아부하며 독재에 가담한 자들은 또 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약자와 무고한 자들은 또 누구입니까?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으며, 영원하지도 못했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었나요. 당신은 어떤 삶을 원하는지요. 또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을까요. 무고한 자의 유토피아는 대중의 유토피아와 얼마쯤 같을까요.


비참한 최후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독재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악이 쓰러지고 스러진 그 자리에 강제와 폭력은 교묘하게 부활하고, 비겁한 자, 악한 자, 약한 자, 무고한 자들이 강박적으로 출현합니다. 모든 것은 반복과 각인으로 역사라는 기계에 새겨지지만, 고통은 떠돌고 있습니다. 굴욕스러운 글자를 새긴 채로 역사 너머로 너울거립니다. 불행의 본질이 생존의 위협이었는지, 오명의 굴레였는지 밝히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사에 실눈을 뜨면서 말입니다.


폭군을 저지하고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동력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어쩌면 말입니다. 억압과 폭력을 저지하는 힘은 그것을 만든 힘과 비슷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저항하는 일, 예방하는 힘, 대안을 수립하는 힘은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동력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산업자본이 권좌를 금융자본에 내준 지난 시절을 돌아보십시오, 마냥 헛소리만은 아닐 겁니다.


금융위기는 불패를 모르던 자본주의에 위기로, 파괴 내지 해체의 신호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제도적 변화가 필요했고, 혁명적 형태의 경제체제가 요구되었습니다. 신문은 날마다 위기를 크게크게 부각시키기 바빴고, 새로운 제안들은 제각각의 이상을 머금고 위기에 빠진 경제주체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자리는 국가의 옷을 입은 자본이 다시 자리잡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은 이런 상황에 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강력하고 번드르한 칼날을 휘두를 빅브라더가 늘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안정과 평화라는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먼저 혼란과 불확실성을 견디고 수용해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수확물들이 썩어갈 때까지 건들지 않아야 가능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리얼 유토피아』의 저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효과적인 투쟁 방법을 권고하지도 않고, 정치적 호소력을 가질 의제를 조언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다만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성격을 명료히 하고, 진보세력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는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일종의 “분석틀”을 창조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내 연구의 이론적 좌표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마르스크주의”라는 용어는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전진하는 과학적 이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의를 암시한다. ~ 다른 전통들—게임이론, 분석철학, 페미니즘,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의 다양한 조류들—에서 나온 요소들이 내 경험적 • 이론적 연구의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경우, 나는 이 요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수입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희석시키기보다는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믿는다.


라이트는 소련이 해체되고 “역사의 종말”이 선언되던 1990년대 초에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라이트의 관심사는 ‘착취’에서 ‘계급’,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변화하는데요. 사회권력과 급진민주주의를 그 중심에 놓고 대안을 탐구합니다. 자본주의를 작동하는데 착취가 작동하지만 자본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축이라는 라이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부정적/ 적대적 현실세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도 보여집니다.

 

마르크스주의자 라이트가 “꿈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이고 유토피아적 꿈에 탐닉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 실제 현실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민주정치를 중요하게 배치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며 그 ‘전통’ 안에 묶어둘 몇 가지 기준을 덧붙입니다.


1. 사람들에게 해악을 가하는 한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진단과 비판

2. 계급적 지배 • 착취 관계들의 체계로서의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

3.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

4. 자본주의를 재생산하고 자본주의의 변혁을 가로막는 메커니즘들에 대한 관심

5. 의식적 투쟁이 의도되지 않은 사회변화의 누적 효과들과 상호 작용해서 변혁이 일어난다는 이해


라이트는 국가와 경제에 대한 사회권력 강화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제대로 된 민주화 과정이 계급구조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라이트의 주장은 노동계급이 더이상 종속되지 않을 유일한 길인것도 같습니다.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사회정의와 정치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을 힘차게 확대하며 자본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대한 사회권력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대단히 진지하게 취급한다는 것을 뜻한다. 넓고 깊은 사회권력 강화는 우선 국가권력을 시민사회에 근거한 사회권력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개념의 통상적인 의미이다. 민중에 의한 지배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에서 나오는 권력이 국가에 근거한 권력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권력 강화는 국가에 대한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경제권력이 사회권력에 종속됨을 뜻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이 더 이상 생산적 자원이 배분과 사용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아마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사회권력 강화는 시민사회 자체를 민주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폭이 좁은 결사체와 폭이 넓은 결사체들이 민주평등주의적 원칙들에 따라 조직되고 이러한 결사체들이 두터게 형성된 시민사회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통제하는 노동계급의 탄생이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라이트가 발견한 네 종류의 틈새에서 급진적 사회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읽혀지기도 합니다.

 

1. 낙후된 도시였던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 시티는 부패와 정치적 후견 관행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원을 재배치 하는 시민권력을 탄생시킵니다. 참여적 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합니다.

2. 反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위키피디아는 위계적 통계가 아닌 수평적 호혜성의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3. 몬드리안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복합기업으로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입니다. 위계적 권력관계와 자본주의적 재산관계가 필요하지 않으며, 비노동자 소유자 없이 광범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합니다.

4. 합법적 시민권을 가진 거주자는 무조건적 기초소득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빈곤선” 이상으로 살기 충분한 월간 생계비를 지급받습니다. 노동의 수행 여부나 기타 형태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보편적 기초 소득의 적용은 反빈곤 소득 지원 프로그램, 복지 정책을 제거함으로써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기여 소득을 허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얼마 간은 순 수혜자로, 얼마 간은 순 기여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라이트는 4년 동안 18개국을 여행하면서 대학에서 학술회의,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여합니다. 동료 학자나 아내와도 자전거 여행이나 도보 여행, 산책 등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했다고도 합니다. 잘 듣는 사람은 많이 본다고 할까요. 리얼유토피아를 주장하는 라이트는 현실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입니다.

 

그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일단 의심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시민권력은 부정의를 제거할 단일한 힘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위키피디아가 기부금으로 운용되는 지식의 유통 채널만은 아니라는 것, 소유자가 된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경영을 배격할 것이라는 것, 복지 대신 기초 소득의 보장이 소외와 차별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공상 대신 실질적인 이상을 보여주는 라이트의 연구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이 모든 미혹이 걷힌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만.

 

 

상당한 사회학자 라이트의 저작을 읽고 난 리뷰의 시작치고는 감상적이며 남루합니다. 너덜거리는 일상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참된 자유라고 강조하며, 인간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다원적 모델을 제안하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지 못하다니요. 멈춰 버린 까닭에 이탈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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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표현된 불행 - 황현산 비평집
황현산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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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의 상대말을 찾다 헤매고 있다불행은 사태이며 인식이지만…… 반추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불행은 온전히 주관적인 것도 아니며, 객관성만으로도 지탱하기 어렵다. 주객관계를 넘어서지만 정작 초월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직 세계에 대한 진술에서만 힘을 얻는 요상한 개념이(이라고 생각한). 사태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도록 조종하는 ‘불행’이라는 번역의 기제는 행운이나 행복과는 다른 차원에 머무른다. 무엇이 혹은 누가 ‘불행’인지를 혼란스럽게도 만든다. 미지에서 캐낸 비극적 정서-불행은, 오늘 같이 흐린 날, 다시 펼쳐 들기 손쉽다.


시를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읽는 일이 드물고, 적는 일은 더 그랬으니 당연하겠지. 시에 마음을 담지 못했던 이유는 모른다. 간혹 국어시간, 시와 그 해석을 일부러 외워야 했었던 일이나, 그 짧은 몇 줄로 궁극을 담아내는 이름모를 시인들에 대한 반감이었을 수 있겠다. 굳이 그 이유를 따져물을 만큼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알지 못했기에 좋아할 수도 없었던 것인가.


그럼에도 시 속에서 어떤 존재감이 큰 덩어리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한 아해가 오고, 또 다른 아해가 오고, 제 삼, 제 사, 제 오의 아해들이 질주하는 ‘말’들로 채워진 시도 그렇다. 유명한 그 구절을 어디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들은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 단순한 문장의 반복이, 살아간다는 것이 서러웠던 어느 날, 내 안에 너무 많은 놈들이 활개치는 것을 낱낱이 들여다봐야 했던 그런 날 무엇으로도 표현해내기 어려웠던 그 몹쓸 감정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한 놈이 있고, 또 한 놈이 있고, 제 삼, 제 사, 제 오의 놈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음이 괴롭고 무서웠던 날 그 시가 불현듯 기억이 났었다. 그리고 마치 연결된 동작인 것처럼, 터질것 같던 가슴이 눈알 속으로 모이는 듯하더니, (물방울이 되어) 일시적으로 사라져버렸었다.

만났다고는 했지만, 그건 아마도 시 자체가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는 아직도 내게 친근한 존재는 아니다. 아는 체 인사를 건넬 수도 없다. 그 시는 여전히, 레드빛 카펫을 밟고 있을 것이 분명한 머나먼 존재다. 뭔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시작하는가.


시를 모르니 시 비평집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인데, 제목때문에 계속 마음이 쓰였었다. 잘 표현된 불행이라니. 어색했지만 호기심을 일게도 했다. ‘불행’이 있는데 ‘잘’ ‘표현된’이라니. 불행을 관전하는 작자作者인가. 어떻게 해야 불행이 잘 표현될 수 있단 말인지. 표현된 것은 불행인가, 표현하는 사람인가? 불행에 대한 태도인가. ‘잘’이 수식하는 것은 ‘표현’이니, 이 제목의 강조점은 ‘불행’ 자체는 아닐 것이다.


잘 표현된 불행』은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보다 불행을 자신과 분리시키려는 자가 찾는 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불행을 잘 표현해서 행운을 쥔 문학가! 도서관에서 검색할 때마다 여전히, 아직도 ‘대출중’인 것을 확인한다. 인기가 많은 책이 분명하다. 대기 시간이 지속될수록 분해하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진다. 그건 오기에 불과하지만, 모난 자가 일상을 지탱하는 요령이다. 그렇게 건방지고 모호한 헛소리라도 쓸어내야만 하루를 지탱할 수 있다.


기다리며 몇 가지 짐작을 한다. 하나는 이렇다. 불행한 사태는 삶의 한 축이다. 그러나 대부분 불행이라고 느끼는 장면들은 ‘만들어진’ 불행, 가짜일 뿐이다. 잘 만들어진 불행, 멋지게 표현된 불행은 왜곡이고 망상이며 현실이 아니다. 가짜 불행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젖어 있는 현실이 진짜 불행이라고 고발한다. 개인적 경험의 질박한 한계, 사유의 불충분으로 생긴 현실을 낱낱이 펼쳐 해체시킨다.


(치유를 원하는 세태에)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불행을 ‘표현’하라는 것에 관한 계발서/혁명서일 수도 있겠다. 시의 세계는 고통 너머에 있다. 현실의 고통에서 또 다른 현실을 보며 그것들을 초극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인/비평가는 암담한 현실의 동아줄이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온다면 계속 우는 아이로 남을 것인가? 불행이 넘친다. 감당못할 불행을 견디는 동아줄을 찾는 것이 연대이며, 예술이다.


생각하기 싫은 짐작은 이런 쪽이다. 죽음과 소외, 고통이 난무한 상황을 실감나게 들여다보게 해주고, 밀착된 언어로 얼마나 끔찍한지, 얼마나 참담한지, 운명을 잘 설명해주는 책 말이다. 적나라하게 잘 묘사된 책. 잘 표현’된’의 느낌은 그랬다. ‘된’이라는 수동태를 취함으로써 불행 자체가 사람과 분리되어 격상되어 버리는 느낌이다. 혼을 빼고 불행을 관조하는 기계와 같고, 불행한 타자가 우글거리는 장면을 참관하는 증인이다. 당장에는 쓰라린 공감을, 종국에는 고통과 불행을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각인시키며, 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하는. 불행한 현실을 잘 보여주려다 외려 그 현실을 덮게 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마침내 잘 표현된 불행을 열게 되었다. 길게 이어갈 요량으로 ‘읽고 받아적는 길’을 택한다. 예상과 다르다. 바타유의 존재론적 효과로 시작된 첫 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괴롭기까지 하다. 여러 시간을 같은 대목을 반복해서 읽기만 한다. 간신히 몇 장을 옮겨적는데, 그 중간에 이런 낙서를 휘두르고야 만다. “힘들다. 지루하고………불행한 현실을 ‘잘’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은 이래서 불행입니다 라고만 읽힌다. 현실과 이론을 잇는 ‘표현’들의 어색함, 거부감이 싫다. 과정과 결론이 자꾸 뒤엉키는 것도 ……. 젠장! 나는 왜 이모양인가. 재주도 의지도 용기도 없으면서 책 한권 끝까지 읽어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거냐. 멍청한 년. 쥐뿔도 없는게 타박만 만들 줄 안다


여기까지가 작년의 일이다. 잘 표현된 불행은 어떤 질문도 응답도 없이 덮였다. 아마도 다음의 대목에 이르러서 밀어냈었지 싶다.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서구 편향’ 따위의 말은 이제 통용될 수 없으며, 해체니 일탈이니 하는 무의미한 말로 그들의 작업이 환원될 수도 없다. (68)


젊은’ ‘용기’는 ‘훌륭하게’ ‘통용’되겠지만, ‘변방’의 ‘무분별한’ ‘무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일상에 달라붙어 있다. 이 땅은 전혀 풍요로워지지 않았는데, 불행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고 있는데, 젊은 용기는 어떻게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게 되었을까.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무분별한 소비자가 되어 어두운 시대를 기어다니는 무의미한 시간들 사이에서, 젊은 시인은 어떻게 의미를 찾아 낼 수 있었을까. 젊은 시인의 문학적 소재가 되어 떠돌다 사라졌던 무의미한 사건들은 지금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까. 문학이 부르는 것은 체계와 운명인가, 사람인가. 시가 의미를 찾아내는 장치라면 모르는 게 좋겠다. 소설이 가치를 분별하는 무대라면 보지 않는 게 낫겠다.


한 해가 지났다. 며칠동안 레비나스의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을 옮겨적었다. 철학 강의록이었는데 한 장에 한번씩은 눈물이 났다.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닌데도 연이어 눈물을 쏟았다. 벌건 대낮에 멀건한 정신으로. 아무래도 내 몸뚱이에 ‘불행’이 각인되어 있나부다. 불행, 불행은 도처에 스며 떨어질 줄 모른다. …… 잘 표현된 불행을 다시 펼친다. 기대도 짐작도 없이 읽고 쓴다. 한달음에 몇 장을 누빌 수 있었다뛰어난 문학비평이, 훌륭한 예술론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과는 다른 출발이었지만 여전히 불만스럽기는 하다. 이것은 글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그는 자기 언어를 은유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현실이며 그는 그 현실을 산다. 이를테면 이성복은「남해 금산」의 첫대목에서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라고 읊는다.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풀어놓으면 아마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다. ‘사랑하던 한 여자를 잃고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 여자는 돌이 된 내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 질이 다르고 기운이 다르다. 풀어놓은 글에서 ‘돌처럼 굳어졌다’거나 ‘그 여자가 굳어진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는 말은 절망과 불모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사적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이성복의 돌은 현실의 돌이다.(142)


「남해 금산」은 해설해 놓은 말과는 정반대로 읽혔지만,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하자. 로버트 씨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절망에 빠진 나머지 닥치는 대로 일상을 부숴나갔다. 그의 생에 더이상의 환희는 찾아올 것 같지 않다. 로버트 씨는 잔뜩 취한 채 시를 쓴다. ‘내 마음은 돌처럼 굳었어요/ 돌이 된 내 마음속에 제인이 박혀 있어요/ 누구도 빼낼 수 없어요.’  이성복 시인의 시도 다시 보자.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경험으로 생긴 이별의 감정에만 충실한 로버트 씨는 돌이라는 사물에 모든 걸 의지한 채 현실을 슬퍼한다. 로버트 씨는 “절망과 불모에 대한 낡은 수사법 하나를 던져놓”았지만, 이성복 시인은 “절망과 불모 그 자체인 바윗덩이 하나를 세워놓”았다. 이 슬픔과 절망은 누구의 현실인가. 낡은 수사법으로 세워진 돌덩이와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바윗덩이! 발길에 채이는 보잘것 없는 돌덩이를 경멸하는 말은 분명 아니겠지만, 현실과 수사는 이미 상징체계 안에 두터운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어쩌면 모든 해석은 권력이고 폭력이다.

 

누구나 해석의 칼날을 휘두른다. 모냥 당하기만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역동적인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동질적인 현실이 그 수사법에 의해 결을 달리 한다는 것은 참기 힘들다. 이 이별과 절망이 로버트 씨의 것인지, 시인의 것인지, 모든 이의 보편성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많은 불행의 위계를 파악할 때 (질적) 차이를 준거로 들이미는 것은 상당히 억울한 일이다.


 제인의 사랑()이 사라졌다. 로버트가 절망한다. 그뿐이다. 해와 달에 의해, 물과 바람에 의해 녹아 스러져 모래가 되고 흩어진 사랑이 돌이 되어 다시 출현하는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을 노래하는 로버트는 실재한다. 로버트의 노래는 그를 위로할지 모른다. 사랑은 거품이라고. 그러나 이는 모두 사라진 사건의 사후(後)일 뿐이다. 시도 거품이다. 그뿐이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시인들과 작품들이 자주 인용되는데, 김수영 시인과 이상 시인의 시 세계는 특별하게 읽힌다. 이 시인들의 언어가 가진 힘이 비평가를 어떤 감동으로 이끌고 있는 듯하다.

김수영은「절망」이라고 이름 붙은 수 편의 시 가운데 하나에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라고 썼다. 이 시구는 아름답다. 낱말과 선율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분석하기 좋게 짜 맞춘 지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암담함을 말하면서 암담한 현실을 충전된 언어로 들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충전된 언어에서 발휘되는 힘이 바로 현실 위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현실이며,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라고 말할 때의 그 딴 곳의 바람에 해당한다. 비평은 시와 더불어 그 힘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144)


현실이 있고 또 하나의 현실이 있다. 관념은 과거의 족쇄이고 이미지는 현실의 감옥이라고 말한다. 암묵적 시 쓰기를 공모하는 현실을 용서하지 않았던 시인을 칭송한다.


'온몸으로 시 쓰기'의 본뜻'도 거기 있다. 지식체계에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탈주의 모험을 감행하는 그의 시가 말끔하고 지적으로 숙련된 외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311)


비평가가 하고 싶은 말은 “김수영은 다른 방식으로 지적이”라는 것이다. 기성 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편적 지적 구조를 답습하지 않는 참신함으로 새로운 심미감이 확장된다. 정신과 감각을 모두 사용하여 사소한 것까지 집중할 때 은유적 힘을 얻는 알레고리적 계기가 작동된다고 한다. 시인이 현실을 움직인다기 보다는 시가 가진 능력으로 현실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비평가는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거듭 믿는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정신적으로 각성된 감성에 좌우되는 실천은 위험하다. 감성은 다듬어지는 것이며 여전히 마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는가. 감동에 실린 난폭하고 생경한 언어는 또 다른 장면을 연출할 동력이 되겠지만, 감동의 생성과 소멸에 따르는 관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이 거래되고 정보력이 힘이 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실은 늘 갱신되는데 아름다운 시는 그자리에 붙박혀 있다.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나는 육사가 「曠野」를 쓸 때, 루쉰의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믿는다.(695)


시인은 비평가의 말처럼 다녀서 만들어질 새로운 길을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늘 예술에 메마른 회한을 느끼는 것은, 배척을 배제한 새로운 심미감들이 길이 되어 다닐라치면 처음부터 있었던 길이었다는 것을 애늦게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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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고단한 일이다. 무기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일 말이다. 입술 위에 가볍고 경쾌한 말을 매달고, 두 손에는 정을 나눌 초코파이를 쥔다. 휘두르지 못하는 것들이니 무기라 할 수 없겠는가.

 

깊은 잠을 담지 못하는 눈동자는 번득이며 두리번거린다. 거리는 미처 들이마시지 못한 냄새를 창 너머로 뿜어대며 유혹한다. 

 

달콤한 말이 독이 되고, 지글대며 타는 고소한 냄새가 약이 된다. 누군들 그 향연을 마다하겠는가. 누군들 금욕이 좋다 하겠는가.

 

독과 약을 들이마시고 나면, 그렇게 아침이 오고 나면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해질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매일 저녁 상채기 하나씩을 더 만들어 내며, 괴로워한다.

 

"못 나고 썩어빠진 글 뭉텅을 잘라낼 가위가 되어줄래."

뜬금없는 여자의 요구에 말문이 막힌다.

"누군들 괴롭지 않겠어요. 에휴~"

꾼들의 주정에 이력이 난 미스터 리가 답한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 태어날 이유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숨이 막혀요."

가위질을 멈춘 미스터 리는 초저녁 손님의 안색을 살피며 실소를 머금는다.

"이유없이 태어나는 것은 없다네요. 에휴~"

낮술이라도 걸치셨나, 중얼거리던 미스터 리, 고기 알바 3주차 답게 요령있게 불조절을 한다.

여자는 맨정신이다. 마치 흥건한 술자리에 둘러앉아 취해가는냥 흉내만 낼 뿐이다.

"무기는 자신에게 휘두르는 거야, 무기 끝은 꼭 자신에게 온다니까."

고기는 익어가고, 여자의 얼굴도 익고, 미스터 리의 두 손도 익는다.

여자는 고기 한점 입에 대지 못한 채, 온 얼굴 가득 달큰한 고기 냄새를 묻히고, 거리로 나선다. 알맞게 잘려진 고기들이 접시 위에 고대로 남겨진다.....

창밖에는 고스란히 남겨긴 고기를 탐내는 여러 눈동자들이 번득인다.

 

2. 허기진 산책길에 오릅니다. 이 산책들은 의도된 것으로 고행이 아님을 밝힙니다. 홍대 정문을 향해 약간의 비탈길을 오르다가, 셀 수 없는 인파를 피해 신촌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짬뽕집을 지나고 기찻길을 지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몇 마리의 비둘기가 도망갈 생각도 없이 앞 길을 막아 섭니다. 길 위에 뿌려진 약간의 음식물에 둘러앉은 비둘기들. 그들의 모양이 심각합니다. 머리 부분의 털빛이 좋지 않습니다. 뽑혀나가고 문드러진 살결이 보입니다. 이미 변색이 된 피부결에 이질이질한 고름빛들이 흥건합니다. 그래도 이 비둘기, 열심히 모이질을 합니다.

 

며칠 전 골목에서 보았던 비둘기 떼 중에는 하나의 다리로 서 있던 녀석도 있었지요. (야무지게도 살아가는구나.) 다른 비둘기들이 안정감있게 깡충거리며 두 다리로 이동하는데, 외다리 비둘기는 이리저리 흔들대며 움직여야 했습니다. (무리 안에서 벗어나지 말고, 잘 살아가렴.) 주접스런 닿지도 않을 말을 뱉어 봅니다. 

 

사실 이 산책길에는 참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있습니다. 예쁘게 염색한 꼬리를 살랑이며, 목줄을 힘겨워 하면서도, 장난을 즐기는 애완견들이야 [유기견이 되지 않고서야] 저무는 해를 따라 산책을 끝내겠지요. 그렇지요.

 

주위가 벌써 어두워집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파르르 자리를 떠나고야 마는 참새나 고양이는 또 어디로 갈까요. 신촌오거리를 다 갈 즈음 식당 아주머니 한 분이 생선 머리를 문밖에 던집니다. 기다리던 길고양이 잽싸게 낚아채고 골목에 주차된 차 밑으로 가서야 야금야금 먹기 시작합니다. 그 옆을 서성이던 다른 고양이는 괜히 안절부절합니다. 

 

제법 큰 횟집에는 여러 개의 수족관이 있지요. 개불이 장삼을 펄럭이듯 춤을 추고, 해삼은 유리벽에 턱 붙어 있습니다. 또다른 수족관에는 [어른 남자 팔뚝만한] 상어 한 마리가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이 길을 지날 때면 한참을 서서 쌩쌩한 상어의 움직임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오늘은 지느러미 부분이 벌겋게 변해 속살이 드러난 걸 확인합니다. 

 

3. 그 모든 생명들은 불이 꺼지지 않아 밤을 잃어버린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요. 천둥번개, 기나긴 장마와 무더위에도, 매서운 바람에도 작은 참새의 불평은 들리지 않았군요. 다만 아침이 오고 산책길에 나서야 그들 존재는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어제 본 참새가 오늘 산책길의 그 참새인지는 모를 일이지만요.

 

그 많은 동물들은, 이렇게, 잠깐, 스칠 뿐입니다. 어떻게 사라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참새와 비둘기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도시, 고양이의 죽음이 비밀이 되어버리는 거리 , 상어의 사라짐을 드러내지 않는 골목은, 그래서 늘 고요합니다.

 

녀석들이 떠나가고 또다른 비둘기나 참새들이 날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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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12년 제13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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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재 씨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선재 씨는 왜 자신이 재再서술되어야 하는지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군요. 소설가 김중혁이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칠만큼 웅변해 주었는데 말이죠. 그렇지만 요요란 놈은 살아가기 위해, 다시, 꼭 되돌아와야 하는 습성을 가졌으니, 이제 출발점에서 다시 처음인 것처럼 참아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차선재 씨는 폐허 위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폐허일까요.

먼저 선재 씨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로부터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어머니는 부부싸움을 할 때면 “선재가 없었다면 …”을 앞세우셨 다는데, 혼전임신과 친정 부모님과의 의절에서 오는 고통이었던듯 합니다. 선재 씨는 부모의 이혼 과정을 지켜보는 걸 몹시 끔찍해 했다는데, “헤드폰을 쓰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았다”고 표현하더이다.

그 무렵 선재 씨는, 불행의 연속이랄까, 친구들과도 싸우게 되고, 결국 학교에서도 (모든) 고리가 끊어진 외톨이가 되었다죠.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할 때는 여느 소년들처럼 소리도 지르고 말도 많아졌던 선재 씨 였지만, 사소한 말다툼 끝에 주먹질을 하게 되었고, 화해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따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제 선재 씨는 스스로 “관계를 부수는 사람이다, 고리를 끊는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선재 씨가 고독했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들에서 보여집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게 되었지만, 방에서 은둔하게 되었다는데요. 하교 후 빨래나 청소 같은 집안 일을 끝내고,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요. 아버지가 방문을 노크하면 잠든 척 하는 선재 씨. 손잡이를 돌리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대답 없는 문을 향해 마냥 서 있기만 했다는 아버지. 선재 씨는 친절하게도 그 행동의 이면을 해명해주었죠. 아버지의 표정에 “선재가 없었으면…”하던 어머니의 분노 어린 얼굴이 겹쳐지기 때문이었답니다.


지금쯤이면 선재 씨가 어떤 결핍과 고독 속에 살아야 했던지 알아채실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선재 씨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립 시계제작자가 되어 전시회를 열고 있답니다. 어떤 운명적인 끌림이랄까요.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일찍 잠들고 새벽 세 시면 기상하여, 여섯 시에 등교준비를 하던 선재 씨의 습관이 열쇠였습니다. 대개 그 시간동안에는 의미없는 말들을 적어 내려가며, 무의미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요. (어떤 말들을 적었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다만 선재 씨가 그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러던 선재 씨, 어느 날부터 기계식 시계를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깊은 밤, 아버지는 잠들고 거리의 소음도 누그러들 때, 그 새벽 세 시에, 시계 베젤과 다이얼을 벗기고 무브먼트까지 분해하는 선재 씨가 보이시나요. 선재 씨에게 이 작업의 목적은 무의미한 시간 만들기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이, 의도는 늘 비껴나가게 됩니다. 시계 속에서 “외부의 어떤 충격에도 와해되지 않을 것같은 단단한 세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저격수들이 총을 분해하는 연습을 하듯” 선재 씨는 시계 조립을 반복했는데요. 시침과 분침을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 이십 년 후를 만들고 싶기도 하고, 시계를 거꾸로 돌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답니다. (시간을 저격하는 선재 씨)


삶이 고독했던 선재 씨,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방대학 시계제조공학과에 입학하고, 장수영이라는 여학생을 만납니다. 부드러운 곡선이 리드미컬하게 휘어져 있는 얼굴로 장수영은 많은 제안을 하는데요. 그 어떤 제안도 거절하지 못하게 된 선재 씨는 강연도 보러 다니고, 긴 대화도 나누었으며, 명랑하게 인터뷰를 하고, 평생 잊지 못할 산책도 했답니다. 손 잡고 걸으면서 평생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니, 선재 씨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죠. 교내 방송 브이제이 장수영과 행사 촬영을 다니고 저녁을 먹고, 세상의 온갖 일들과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 시계 이야기까지 하게 되며, 사랑에 빠진 수다쟁이가 되었다니까요.

 

선재 씨의 달콤한 시간들, 정지하고 싶었던 순간들은 겨울방학에 고향집으로 간 장수영의 소식 두절로 힘들어졌답니다. 선재 씨도 서울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있었기에 “나쁜 조짐은 이 방에서 시작”되는 거라며, “관계를 부수는 방이다. 고리를 끊는 공간이다. 페허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개학할 무렵 기숙사로 도착한 장수영의 편지 한 통은 선재 씨를 몹시 혼란에 빠뜨렸는데요. 선재 씨는 군대에서 경계 근무를 설 때면 늘 가슴에 품고, 편지의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답니다.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던 장수영은 오랜 세월이 흘러 메일을 통해 다시 등장하는데요. 그간 선재 씨는 시계 회사에 취직하고, 십 년간 근무한 후, 독립 시계제작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은 흐른다’라는 작품으로 스위스에 초청 받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답니다. 한 평론가는 선재 씨의 작품이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진실을”, “철학적 논증이며 시간의 증명”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데요.


그 즈음 선재 씨는 다음 작품 준비에 애를 먹이고 있었고, 한 통의 메일을 받습니다. 기계어로 잔뜩 변환되어 내용을 알 수도 없었지만 선재 씨, 용케 발신자가 장수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벅차게 답장하고, 연이어 베를린에서 비디오 아트를 하는 장수영의 초대를 받게 된답니다. 장수영의 작품 중 “타임 오브 클라우드”와 “스테이션”을 인상깊게 보게 된 선재 씨. 그 설레임으로 장수영에게 선물 할 ‘스테이션’을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작업 기간을 고려하여 3개월 후 베를린行 예매까지 마치죠.


만나고 싶은 마음을 열심히 억누르고, 달리는 선재 씨에게 소설가 김중혁은 걸쩍찌근한 간섭을 하는데요.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옮겨진 것이죠. 그것도 일주일 전에. 짜증이 난 선재 씨. 낮에는 아버지의 검사를 돕고, 밤에는 피로가 넘치는 작업의 연속이었답니다. 출발 이틀 전에 베를린행을 포기하고 장수영에게 불발 소식을 알립니다. 전화번호를 몰라, 무작정 답장을 애타게 기다린 선재 씨.


메일이 간 것인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차선재는 장수영이 자신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관계를 부쉈다고, 고리를 끊었다고 생각했다. 차선재가 사건의 원인은 아니었지만 다를게 없었다. 모든 불운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31)


장수영의 선물로 기획했던 ‘스테이션’은 책상 속에 미완성인 채로 남겨져 있었죠.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군요. 선재 씨 다행히 불운을 이겨내고 ‘사계’를 제작했고, 또 작품번호 30번에 이르는 55세의 전시작가가 된 것이죠.

선재 씨는 이제 전시회장에서 장수영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계 멋지더라.” 장수영이 말하고 선재 씨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대화를 끝내고 “우리 다음에 만나면 술 한 잔할까?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어때?” 제안합니다. 선재 씨는 친절하게도 한 줄로 쌓인 모든 얘기를 허물거나 위에 쌓인 이야기를 전부 걷어 내야 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녀를 그냥 보냅니다.


오래전 장수영의 편지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네가 만들어 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고 있는 중인걸까. 난 생각했어. 나쁘지 않아. 그래, 나쁘지 않아.’ 차선재는 그 문장을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나쁘지 않아’라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 나쁘지 않지.(38)


선재 씨는 ‘요요’라는 제목을 붙일 시계를 구상하면서 (끝까지 한결같이) 주장합니다.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선재 씨는 시간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믿기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제 속시원히 선재 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우선 운을 뗍니다. 함께 해 주실 분들은 얼른 곁들여 주세요. 선재 씨를 불러놓고 그의 이야기를 하자니, 약간은 비匕겁한 처사로 느껴지는데요.


어느 평론에는 “관계를 통한 소통의 열망과 근원적 삶의 고독을 수락하고 내화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으로 그려지기도 하던데요. 솔직히 선재 씨에게 어떤 소통의 열망이 있었는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선재 씨가 삶의 고독을 수락하다니, 평론의 세계는 너무 멀리 있다는 걸 느낍니다.


요요를 한번 읽고 한번 쓰다가, 소설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되는 무한 루프에 갇혀 버리게 되었답니다. 선재 씨의 맹렬한 가벼움이 소설과의 관계를 부수는게 어떠냐고 채근하더군요. ‘소설로 지어 올린 폐허는 부숴지지도 않잖아.’ 애초에 소설을 집어 ‘든’ 순간, 고리는 끊어지게 되더라고 속삭여대기까지 합니다. 미쳤지요. 이런 미련한 반복들을 지치지도 않고 끌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소설이 어디 ‘탐구’로 끝나나요. 그런 걸 원하는 독자도 없을테구요. 어떤 카타르시스의 경지를 선사하며, 삶의 불안정을 잠재우려고 해야 소설이죠. 갓 지은 밥이 식탐을 불러일으키고, 소화과정을 거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면 반가운 일이죠. 거래되고 교체되는 관계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 속 잉여물들을 떠올려 보자구요. 트름이 되고, 토사물이 되곤 하는 그들의 정체는 무어냐 말입니다. 현실이 껄끄러워 삼키기 어려울 때 솜씨좋은 소설가를 기다리며, 소설에 흐르는 무언가를 두 손 가득 모아야, 선재 씨 마냥 다시 스케치북을 넘기며, 나쁘지 않아라고 읊조릴 수 있는데, (저같은 빙충이들은) 왜 그걸 못하고 방구만 뀌어대냐구요.


. 알겠어요. 그렇겠지요. 도서관의 절반 이상이 800번인데 왜 그걸 모르겠어요.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100번대에 비하면야, 그 마르지 않는 열정들은 고름이 흘러내리는 상처들을 바지런히 소독하게 되겠지요. 인간답게, 더 인간적인, 그리고 더 성숙한 대처를 찾아 헤매겠지요. 그 모든 노력들은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겠구요. 그런데도 왜 선재 씨에게 서운함을 느낄까요. 선재 씨의 요요가 돌아오는 지점은 늘 동일한, 그 시각이라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일 수도 있겠군요.

선재 씨에게 어떤 종류의 불행이 흘렀고, 시간을 다루는 시계에 집착했으며, 그 일상을 낱낱이 새겨 작품으로 만들어 가며, 삶의 본질적인 화해/깨달음을 얻게 됨.....모두 훌륭한 일이지요. 그런데 모래알같군요.


몇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왜 헤드폰이어야 했을까요. 소리의 차단과 시간이 관계가 있나요. 소음이 없는 세계에 (선재 씨에게는 무의미한) 말들이 떠돌아다니더군요. 선재 씨가 밖으로 이르는 길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헤드폰이 On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선재 씨에게 ‘아는 사람’은 또 몇 명이던가요.


그리고 선재 씨의 거짓말. 이건 뭐라고 할까요. 장수영이 강연회를 마치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선재 씨. 조롱하며 듣던 강연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찬사 넘치는 멘트를 날리는데요. 유머였을까요. 얼음물이 쏟아져 내리던 것마냥 무섭던데요. 선재 씨, 능숙한 요령을 아는 사람이었나요.


요요에 드러나는 갈등들은 세련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요. 깨진 의미와 가치들이 횡단하는 폐허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을 하고 완벽한 자기세상을 만들줄 아는 선재 씨가 그렇듯이 말이죠. 오로지 홀로 걸어가는 세상이면 그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온전한 자기가 되는 법, 그 주체적 인간의 징후들과 평론에 등장하는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해 조금 더 말해 보고 싶군요. 리셋이 가능한가요,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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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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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잘 알려진 뭉크의 그림, 절규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뭉크가 “피 같은 구름이” 뚫고 나오는 절망을 온몸으로 느꼈을 때, 오슬로의 피오르드를 함께 산책하던 친구들은 평온해 보인다. 두 손으로 감싸쥔 구겨진 얼굴 속에 노을이 반사되고, 둥그렇게 열린 동공에는 산책자들이 얼비춘다. 뭉크의 이 유명한 명화 <절규>의 완성은 자연을 뚫고 나오는 뭉크의 뭉개진 얼굴에서가 아니라, 노을과 일상을 즐기는 두 친구로부터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가.)


2. 앙드레 고르는 사르트르에 의하면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다. 고르가 30년간 아내를 간호하다 함께 죽음의 길을 떠난 일은 세간에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 그의 나이가 84세였다는 점이 중요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가 평생을 자본주의와 현대정치를 예리하게 비판했고, 보편적 무능력 상태에서 벗어나는 주체를 열망했었다는 점에서 삶의 일관성을 오래도록 유지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앙드레 고르가 아내와 함께 맞이한 죽음의 순간은 ‘희망’과 ‘절망’이 일치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선택에, 그녀의 동조에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많은 시간을 ‘선택’ 하기 위해 쓴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또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남김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회에 우리는 물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절망이 ‘선택의 중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3. 고르가 아내에게 보내는 D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고 한다. 그 책을 따라 읽어볼 욕심은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고르라는 ‘남편’으로부터, D라는 ‘아내’에 이르는 메시지를 타고 흐르는 사랑에 기반하여, 고르와 D의 죽음의 순간을 연결해내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그 연결지점은 그대로 두어도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가, 아니 설명도 필요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말하자면 개인 고르와 직업인/사상가 고르, 그 사이를 어떻게 분리-통합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각각의 인간은 현실을 긍정/부정하며 희망/절망을 쌓아간다. 그것들은 ‘선택’에 의해 완성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하는데, 인격과 의지로 부풀려지기도 하고, 무능력으로 내동댕이 쳐지기도 하면서, 그 모양새를 변형해 나가지만 결국 어떤 완결된 구조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4.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다. 그렇게들 ‘진단’한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스스로 해체될 줄 알았던 자본주의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아니다, 더 악독해졌다고들 한다. “자본주의는 비정상적 상태에서도 계속 작동하는 법을 알며, 심지어 그 상태에서 새로운 힘을 끌어낸다.”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주의의 물적 토대가 완성될 거라는 예측이 오산이었다고 말한다. 발전하는 생산력 속에는 자본주의적 본성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생산력 발전이 탄생시킨 노동자 집단은 생산력을 소유할 기회를 점점 잃어가고 있고, 이해관계에 첨예하게 반응하는 임금노동자만 넘쳐 나게 되었다는 비판은, 노동계급의 해체를 상징하는 것인가.


노동계급이 정당을 조직하고 국가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에서 ‘시민 권력의 탄생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게 되면’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은 사라졌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에 의해 힘을 잃어가고, 현실사회주의가 완전한 몰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사회는,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의 본성이 결코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끔찍한 불안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고르는 묻는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5. 사회주의를 현실로 불러낼 계급이 사라졌다. 하지만 고르의 진단에는 여전히 혁명의 주체는 견디기 힘든 행위적 제약을 경험하는 계급-존재들이다. 자본에 의해 부정되는 노동관계 속의 주체성으로 인해 필연적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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