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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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 사랑해”는 사랑의 선언이지만, “서로서로 사랑하십시오”는 공허한 표현이라고 말하는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신성하게 다루지 않는 사회를 문제라고 말합니다. 철학자가 사랑을 주제로 말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더구나 남녀 간의 사랑을 거론하니 낯선 일입니다. “사랑해”하고 말할 때마다 “살아야 해”라고 다짐하는 사회에서 보자면 적절한 주제입니다만,

그의 사랑예찬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파리에 '미틱'이라는 만남 알선 사이트가 유행합니다. 바디우는 위험 없는 사랑, 좌절이 없는 사랑을 제안하는 광고에서 사랑까지 안전한게 접근하려는 체제에 경고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것들이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헙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성은 계약을 통해 제한된 쾌락을 제공하는 대신 안락을 담보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적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위험과 모험에 뛰어들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사랑의 경험이 보편의 씨앗이라고 했답니다. 자기중심성, 이기주의를 벗어나려면, 하나가 아닌 둘의 세계를,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통해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사랑은 보편적 가치의 이행 요소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연으로 만남이 발생하고, 선언을 통해서 진리를 구축하는 사건이 됩니다.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최초에 선언된 바로 그 사랑도, 역시 “다시 선언”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애초에 격렬한 실존적 위기이기도 한 까닭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진리의 모든 과정처럼 말입니다.

 

거래에 의해 사랑을 유지하려다 보면 사랑은 무엇이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안전성을 담보해서도 안 된다. 소비의 달콤함에 젖어서도 안 된다. 열정을 절약하며 쾌락을 채워서도 안 된다. 이런 금지문들로 사랑을 논하는 것은 탐탁지 않은 일입니다. 사랑과 非사랑을 분류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성을 추동하는 욕망을 설명하니까요.

 

그러나 어떤 순간 바디우의 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경험이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충돌과 파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렷하게 부각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할 힘을 준다는 사실 말입니다.

 

중요한 작품들, 위대한 소설들은 자주 사랑의 불가능성, 사랑의 시련, 사랑의 비극, 사랑의 이탈, 사랑의 이별, 사랑의 목적 등을 토대로 집필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지속성에 대해서는 별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부부의 속성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해 보입니다.

 

바디우는 사랑과 정치를 섞지 말라고 따끔하게 충고하지만, 코뮤니즘 안에서 차이를 부정하지 않고도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사랑의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을까요.

 

주체를 회복하려는 바디우의 사랑론은 타자의 육체를 매개로 해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삶의 신비를 역설하는 것 같습니다. , 주체가 담을 수 있는 타자의 한계치로 사랑을 설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단정은 저의 개인적인- 위험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행사하는 무자비한 폭력에 매정하게 노출되어 이리저리 휩쓸리는 지금 여기에 필요한 경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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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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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을 지워줄래?>


따로 떼에서 보면 살아있는 존재와 그 환경은 다 정상이 아니다. 그들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간의 관계다.”(캉길렘)


이상문학상 수상작 「몬순」은 잠시나마 말문을 막아버렸다. 허탈감은 문학상 뒷단의 텁텁함을 상상하게도 만들었다.  완성이나 정상적인 접근을 바라는 내 모자란 이성이 발동해, 공격할 지점을 찾기 바빴다. 쉬운 일이었다. 실망하고 외면하는 일은 언제나 쉽다. 이후에 맺어야 할 관계가 난감해지는 것은 인상비평의 당연한 순서다. 비평은 재비평 되어야 한다. 「몬순」이 작가에 의해 재창작되는 일은 없겠지만, 독자에 의해 재비평 되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상이 주는 무게 때문이 아니라,  재비평으로「몬순」의 온기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찬사와 마찬가지로 비난도, 무관심도, 개입이다.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삶에 개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개체 차원의 적응과 집단 수준의 대응이 달라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인상을 잠시 내려놓고, 어떤 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 (작품 속) 인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그래서 시점이 중요하다. 시점은 방향과 위치를 이동 시킬 수단이다. 독자가 자신의 관점 너머를 상상할 여지를 가지려면, 때로는 작가가 안내하는 주인공의 심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비평이 아니라 재비평이다.

시점을 선택했다면 그 시점으로 이동해 다시 읽고 써야 한다. 매개가 될 재료를 찾아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애착을 보류해야 한다.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인가.


의사는 아기에게 정기적인 예방주사를 놔주었다. 시시콜콜한 감기를 앓을 때면 처방전을 써줬다. 나중에 아기의 차가운 팔다리를 주물러보고 감은 눈을 억지로 뜨게 하고 망막출혈을 확인한 것도 그 의사였다. 태오는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는 의사의 멱살을 힘껏 잡았다. 화가 나 씩씩거리고 몸을 흔드는 태오에게 의사는 부모 노릇도 못하는 주제에 엉뚱한 데서 화풀이냐고 소리쳤다. 멱살을 잡은 게 먼저였는지 그 얘기를 들은 게 먼저였는지 헛갈렸다. 진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고 몇 사람이 달려와 태오를 의사로부터 간신히 떼어놓았다.

아내 분은 휴가가 끝나셨나요? 요새 통 안보이시네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자가 물었다. (18)


의사 역시 태오의 생각을 거들었다. 아내분의 우울한 기분이 심려스럽다고 했다. 태오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의사의 말에 화가 났다. 화가 난 나머지 의사의 멱살을 잡은 채로 앞뒤로 흔들었다. 태오가 한 짓은 금세 아파트 주민에게 퍼졌다. 태오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소문이 돌지 않았을 것이고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어두워진 틈을 타 아파트 유리창이 깨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태오는 정확히 몰랐다. 모르는 채 일단 인생을 살았다. 시간이 지났다. 점차 그날의 일을 유진에게 묻지 않게 되었다. 어떤 유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질문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재미로 질문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27)


아내도 여기에 온 적 있어요. 아기 혼자 재워두고요.”

태오가 말했다. 그는 조심하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도 앴다.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알았지만 확신을 버리지 못했다. 술에 취해서는 아니었다. 태오는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몹시 취한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다 말해버릴 뻔했지만 뒤쪽 테이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 정도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29)


「몬순」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단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전개방식 때문에, 끊임없이, 읽기를 멈추고 장면을 상상해야만 했다. 시점이 부자연스럽고, 문체로만 끈질긴 고통을 설명하려는 것 같아 거북스럽기도 하다. 소설 속 어느 귀퉁이에서도 아기를 찾을 수 없었다. 태오의 아기는 끝까지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아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유진은 태오의 기분에 따라 해석되는 사람이며, 이웃집 여자, 의사 모두 누군지 알 수 없는, 혹은 알 필요가 없다고 작가가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첫인상이 전부인 등장인물들. 태오는 어떤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 길을 막아 버린다


그날 태오는 나무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아파트로 갔다. 서둘렀다. 아기는 홀로 있었다. 다행히 푹 잠든 것 같았다. 태오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자고 있는 아이 곁에 누웠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그를 안도하게 했다. 그러자 궁금해졌다. 잠든 아기를 홀로 두고 어딜 간 걸까. 급한 일이 있을 게 무언가. 누굴 만나러 간 걸까. 그게 누굴까. 두꺼운 나무문이 머릿속에서 안달했다. 태오는 아기가 깨지않도록 조심하며 일어섰다. 아이가 조금 칭얼거렸다. 몸을 뒤척였다. 태오는 깜짝 놀라 멈춰섰다. 아이가 칭얼대다 몸을 엎드렸다. 다시 잠들었다. 새근거렸다. 태오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

아까 그곳에 닿기도 전에 아파트 쪽으로 황급히 걸어오는 유진이 보였다. (30)


유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태오의 추궁과 의심을 홀로 견뎠다.

대신 태오가 자주 물었다. 정말 그게 다야? 유진이 모르는 척 잡아 뗀다는 듯이, 내 말 안 믿지? 유진이 여러 번 되풀이한 설명을 다시 한 번 침착하게 끝내고 태오에게 물었다. 태오는 침묵함으로써 유진을 실망시켰다. 그다음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울먹였고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32)


밝은 빛 속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유진이 자신의 말을 다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려웠다. 태오의 말은 유진의 분노를 살게 분명했다. 유진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태오가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불빛이 태오의 무익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막아주었다.(33)


몬순과 단전이라는 배경이 보내는 메시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불어온 후에야 방향도 크기도 알 수 있다는 계절풍” 몬순처럼 불확정성은 삶을 휘돌고 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아기의 죽음 이후, 부부가 나눠 가진 책임과 오명의 굴레는 아파트 단전이라는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불안을 껴안고 살고 싶지 않은데,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머물러야 하기에, 비극 후의 삶은 고단하다. 태오가 암흑이 된 후에 유진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태오의 이 독백이 그들 삶을 이어갈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암시들은 사실, 고통 앞의 인간에게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이다. 단전 속의 어둠도 그냥 어둠이 아니다. 더 밝아지고 안전해질 미래를 안내하는 어둠일 뿐이다. 폭풍우 속의 정전처럼 불시에 들이닥친 정전일지라도, 스위치 켜듯, 끄고 닫을 수 있는 상황을, 끔찍한 삶의 비극에 빗댈 무언가로 촉발하는 것은 허무하다.


<알리바이를 찾아서>

태오를 애써 설명해보자면 알리바이를 찾는 사람이다. ‘오해’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쉬지않고 자신을 옹호한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려는 사람의 눈에 타자가 들어올 일은 없다. 말할 수 없는 사실에 초조하다. 알아낼 수 없는 진실에 불안하다. 접근하지 못하는 절망감에 떠돌고 있다.

때로는 타인에게 죄를 묻고, 흑백을 논하기도 하면서, 모종의 상황을 연출한다. 삶이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은 방향이나 크기를 알 수 없어서가 아니다. 알리바이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오는 죄가 없음을, 있었더라도 그간의 고통이 상쇄해 갔을 거라고 말한다. 이 소설이 알리바이다

재비평을 시작한다면 태오의 알리바이를 깨든지, 숨겨진 인물들을 불러내든지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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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지 않는 길을 찾다 너무 멀리 갔었다. 시가지의 끝이면서 도시 시작을 알리는 곳에 닿자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논밭도 없는 텅 빈 4차선 도로를 한참 걷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고, 도시의 소음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구획 정리만 끝난 도시개발 용지들에는 상하수도 관이 싸매져 있었고, 신호등은 점멸 상태로 끊임없이 노란색으로 반짝였다. 보도블럭 사이로 용케도 자리잡은 풀잎들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생물의 흔적은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러 블럭을 걸어도 헤집어진 흙구덩이 사이로 크고 작은 길만 있었다. 이곳에 상가와 주택이 들어오고 저쯤에는 골목길 슈퍼마켓이 펼쳐지고 노점이 들어서겠구나. 가끔은 공원용지로 보이는 곳에는 성급하게 들여놓은 놀이기구가 두꺼운 비닐에 싸매져 이용을 기다릴 뿐이었다. 개발 열기가 푹 가라앉아 구경꾼조차 사라진 그곳은, 시작도 끝도 없는, 자연도 도시도 아닌, 그저 대기상태로, 열린 채 닫혀 있었다. 


20여 분쯤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걸어볼 참이었다.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주 산책을 나설 길이 되었을 거라는 말이다. 최근 몇 년동안 그렇게 당황하고, 뒤통수까지 허둥거린 적이 있었던가. 어떤 기척을 느끼고 주위를 살피다 눈이 마주친 것은 마르고 털이 부족한 흰색 개 한 마리였다. 10미터 앞 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오직 헤집어진 흙더미만 있는 도심에서 뭘 먹고 살려고. 애처럽다고 느낀 것도 잠시, 흰 개는 시선을 내게서 거두지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틀며 어슬렁거리다 다시 날 보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 내가 침입자일 수도 있겠네. 


길을 건너 다른 길로 비껴주었다. 그런데 흰 개는 조금 더 가까워진 간격을 유지하며 같이 길을 건넜다. 사거리에서 한 번 더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또 시선을 보내며 내 앞을 막고 있었다. 꼬리를 흔들어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호의적인 제스쳐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개가 왜 이럴까. 아예 뒤돌아가려고 돌아선 순간, 난 소리지르며 주저앉고 싶었다. 줄곧 내 뒤 쪽으로 두 마리의 개가 더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갈색 개들은 더 컸지만, 왜인지 흰 개가 우두머리처럼 느껴졌다. 앞에는 흰 개가 뒤에는 갈색 개 두 마리가 날 지켜보며 이 길을 안내하듯, 감시하듯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들개는 아닌 것 같은데, 인간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는 것, 떠돌면서 지치고 더 공격적이 되었을텐데, 물리면 방어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는가. 소리치면 누가 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자세를 낮춰 달래볼까. 이럴 때 유용한 행동요령이 있을텐데.... 무기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빈약한 가로수 말고는 돌멩이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급한대로 회초리보다 힘이 없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손에 쥐었다. 커보이려고 손을 높이 들까도 생각했다. 반대편 도로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간절하게 달리고 싶었지만, 끝까지 가지를 활짝 위로 올린 채 걷고 또 걸었다. 난 이걸로 너희를 치고 싶지 않아. 먹을 게 있었다면 분명히 나눠 줬을거야. 너희들의 가혹한 운명에 내게 책임을 묻지마. 따라 오지마. 아는 체 하지마. 난 너희를 몰라. 제발 따라오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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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멀지 않은 어느날이었습니다. 그즈음 괴로운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던 차였기에 어디에서나 불안 불편했었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집을 나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강화된 단속으로 승차인원을 준수해야 했기 때문에, 20여 분을 기다린 후에야 버스에 오를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버스는 제 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얼마의 사람은 자리가 없어 내려야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버스 바닥에 철퍽 앉으며 말합니다. 지금 가야 병원예약에 늦지 않는다고. 기사님은 채근합니다. 할머니가 이러시면 면허정지 당할 수도 있다고. 5분이 지나도, 할머니는 더 당당히 요구하고 버스가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기사님은 회사에 연락하느라 버스에서 내린 상태였고, 승객들은 하나둘씩 할머니에게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 누구는 병원에 좀 늦을거라 전화하라 하고, 누구는 병이 중하면 119 부르라 하고. 할머니는 더 크고 당당한 태도로, 병원 진료 못 받게 되면 책임질거냐고, 여든이 다 된 어른에게 대드냐고 소리칩니다. 심사가 괴롭고 힘들었던 나도 한 마디를 소심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고. 통화를 끝낸 기사님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더 당당하게 부르라고 합니다.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 여기, 제 자리에 앉으세요. 그러자 그러면 안 된다고 승객들이 말합니다. 자꾸 그러면 버릇된다고. 그 목소리는 연이어 말합니다. 제게는 급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뒷 차를 타겠으니 할머니가 앉아 가세요. 갑자기 할머니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얼굴이 빨개졌다고 느낀 것은 내 뒤틀린 심사 때문이었을까요. 할머니는 작게 중얼거리며 내렸습니다. 양보해 준다고 말한 아줌마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감사 인사도 없이 훌훌털며 버스를 내려갑니다. 아마 이런 말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는거 아니라고. 사람들 그러는거 아니라고. 


가끔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기억될 일이 없었을텐데요. 드라이로 멋을 낸 머리모양, 계절에 맞는 코트와 옷차림, 주름도 많지 않은 뽀얀 얼굴에 곱게 한 화장....어떤 면으로 봐도 평범한 중산층 할머니였으니까요. 할머니는 그날 병원진료를잘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를 일어나게 한 것은, 혹은 얼굴을 달아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내내 벼르고 덤벼보지만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요구와 설득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2. 대부분의 관계는 고통입니다. 관계를 푸성지게 하려면 그 고통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공적 관계는 어떤가요. 까다롭게 말하자면 사적 관계는 모두 공적 관계망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도, 친구도, 가족도, 공적 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규정들이니까요. 그렇지만 정반대의 인식과 감성들에 더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의 혈육과 인연들에게는 모든 관계의 형식을 허물고 싶어하니까요.가까울수록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3. 이 블로그는 세 분의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한 분은 가족이고, 한 분은 무명입니다. 유일하게, 비록 비공개지만, 실명을 밝힌 분의 블로그에 가끔 방문하곤 합니다.어떤 심성을 가진 분이 이 황량한 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을까하는, 감사와 호기심 때문이었겠지요.몇 달만에 방문한 그 분 블로그에서 약간의 혼란을 경험했습니다.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줄곧 그 분을 가까워질 수 있는, 형식을 허물어가며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혼자) 생각했었다는 것을요. 그 분의 짧은 댓글에, 한 마디의 짧은 말에 오해를 키우며 살았던 것이지요. 내 말을 이해하고 내 말을 들어줄 '내 편'으로 만든 것이지요. 많이 외롭나봅니다.


굳이 따져보자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쓰는 글들은 인기가 많았고, 흐름도 비슷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책을 많이 읽었다고 주장하는, 인기많은 저자가 거짓말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그 분도, 다른 댓글 친구들도, 시간 상으로 그렇고 본인들의 경험에 의해서도 그 많은 책을 읽을 수 없다고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증언으로 강화되는 것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우대해야 한다는 섣부른 계산 뿐입니다. 


생각이 너무나 판이한 걸 알았으니 그 분은 이제 내게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없을까요. 또 그 분의 글은 계속 읽어야 할까요.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니체의 책을 읽다가 덮어버렸습니다.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반항끼가 어디로 향할 지 알 수 없는 날들이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노여움에 부르르 떨면서 말이지요. 요즘 다시 읽는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날 읽으려면 유머를 먼저 배우라고요.

우리에게, 아니 적어도 내게는 심층과 심연이 모두 있습니다. 유머가 필요할 때입니다.   


3. 낮술이 다 깨어갑니다. 글은 언제 써야 할까요. 넘쳐나는 파편으로 머리가 엉망이 되려하면 무작정 메모합니다. 그렇게 글이 되길 기다리는 메모장과 작은 단락들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부스러기와 문단을 모으고 제목을 붙여 글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더 해체시키고 단련시켜 오류를 줄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까요.


어떤 사건이 혹은 일상이 내게 옵니다. 이미 왔다는 것은 해석이 끝났다는 말이지요. 올바른 해석일지 반문해야 합니다. 경험으로, 배움으로, 물음으로, 숙고로, 어리석음으로 반추합니다. 이때 과거라는 모지래기가 모조리 딸려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마냥 거부할 수도 없지요. 거칠게라도 모양을 잡아야, 개입을 해야, 글이 됩니다. 개입이라는 것은 증명할 뿐입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구요. 


좁은 방에 홀로 앉아 낮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글은 완성될 수 있었을까요. 아니 공개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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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곧 다시 만나리


검푸른 물이 가로막고

차단당한 희망으로

칠흙이 되어버린 창벽

닿지 않는 비명이 정지되어 허공에 떠 있다

이렇게 떠나지 말라고, 이렇게 헤어질 순 없다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고


쓰지 않을 수 없는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음이 남기는 말을 받아적는 것

그리고

이제 곧 다시

물이 되고 노래가 되어 다시 만날 것이다



2. 반복은 생명장치


반복은 자연스런 본능입니다. 의식적인 노력없이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생명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반복하는 행위를 의식으로 끌어올려 조작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저항없이 수용하게 됩니다. ‘우리’를 만들어줄 몇 개 남지 않은 귀한 능력, 반복을 애정하세요. 이럴때 발랄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반복은 지겨울 뿐이죠.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는 일, 어제보다 나은 새로운 내가 되어가길 기대해야죠.” 조금 진지한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나리자는 다시 반복되지 않아서 위대하잖아요? 위대함은 죽지 않아요. 예술이 없는 사회, 문화유산이 모조리 파괴된 인류를 상상해보세요. 원시적 공황상태에 빠지겠죠. 끔찍한 재앙이니 부디 문화예술을 보호해 주세요. 모조품에 속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반복이라는 능력 때문이지요. 모든 위대한 것은 ‘위대함’이라는 반복 때문이라니까요. 한번 찾아보세요. 반복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나요. 당신이 걷고, 말을 흉내내고, 숨쉬고, 자고, 먹고, 배설하고 당신이 유일하게 한 번만 할 수 있는 일은 죽음뿐입니다. ‘뭐 이런 억지를 쓰나’ 하시는 당신에게 또다시 반복해 보겠습니다. 탄생과 죽음은 다른 맥락이랍니다. 탄생이라는 사건은 죽음 이전까지 반복이라는 생명장치를 유지하게 된답니다. 호흡과 언어가 다른 차원이 아닌 것처럼, 본능이 된 것들은 반복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혹은 저항하는 순간 당신은 병이 들 것이고 당신 생은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악담이 아니라니까요. 반복하며 반복함을 잊고 반복적으로 반복을 돌아보세요.


순간을 지속시키려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되기 쉽습니다. 아주 조금 덜 그런 사람들-예술가가 아닌 사람들-보다 예민하게 굴거나 병에 쉬이 걸리는 것도 반복되어야 할 것을 잡아두기 때문이지요. 예술은 부질없이, 병증으로 태어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인류의 면죄부가 되어 지구정복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답니다. 훌륭하고 멋진 삶이란 예술과 함께 지상을 휘어 감습니다.


위대함을 탄생시키는 것은 예술가가 아닙니다. 순간을 잡아내는 것은 예술가의 노고지만, 지속은 타인의 능력이니까요. 그렇지요. 내내 부정적인 당신은 주장하겠지요. 예술이 일상을 이기게 해주는 또다른 본능이 된 것을 거부하지 말라구요. 먹고 싸고 자는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도덕을 심어줄 수 있는 힘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예술의 힘이라구요. 읽고 쓰고 노래하는 일을 뺀 삶이 얼마나 메마른 것이냐구 하겠지요. 


아니랍니다. 반복을 거스르는 예술의 힘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회복하는 희망이 될 수 있답니다. 거대 자본과 다국적 기업 뿐만이 아니라 지적 재산권도 얼토당토 않은 억압이니까요. 자본주의를 견고히 하는 큰 틀 중 하나가 저작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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